Story Transcript
2018년 통권 169호
12월호
우 리 가 함 께 해 요
이면裏面의 문화재
우리민족은 ‘많은 것보다 알찬 것’을, ‘크기보다 깊
이’를 중히 여기며 지혜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겉으 로 드러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잘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공을 들이고 작은 것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우리민족의 심성과 지혜
특 집
裏面
는 문화재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지나치기
쉬운 문화재의 귀퉁이, 혹은 잘 보이지 않는 이면에 우리가 몰랐던 문화재의 가치, 조상의 정신이 숨겨 져 있습니다
"속, 드러나지 않는 내면에 정성을 들이고 의미를 담다"
거죽이나 껍질로 싸인 물체의 안쪽 부분, 속. 우리조상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곳에도 의미를 담고 정성을 들였다. 감춰져 있는 곳에 소중한 가치를 간직했다.
그러한 조상의 심오한 정신세계를 발견할 때 우리는 현재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가꿔갈 수 있을 것이다.
특집│하나 속
발행일 2018년 12월 1일
창간일 2004년 10월 29일 발행처 문화재청 대변인실
(우)35208 대전 서구 청사로 189 정부대전청사
전화 (042)481-4675 팩스 (042)481-4679
전자우편 chloveu@ korea.kr
특집│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제주도 용암동굴 - 신비한 거문오름용암동굴계
발행인 정재숙
제작총괄 박희웅, 최계원, 강형도
편집위원 김계수, 김용희, 방인아, 안호, 오명석, 윤리나, 이동융, 이원호, 이종숙, 정은선, 정현정, 조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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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디자인·제작 (주)홍커뮤니케이션즈
특집│셋
탑 속에 간직된 보물, 삼국시대 사리장엄구
www.hongcom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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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넷
기도로 속을 채우고 애정으로 누비는 예인의 손 국가무형문화재 제107호 누비장 기능보유자 김해자
오른쪽 마크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변환 보이스아이 바코드입니다
세월이�깃든�물길��생명을�품은�너울
가까운 곳에 있는 행복, 한강변을 따라 초겨울 속을 걷다
인류무형문화유산
18개 나라가 공동으로 등재한 살아 있는 인류 유산 - 매사냥(Falconry)
과거와�현재의�오버랩
명인열전
- 전통사회 구휼문화 VS 현대사회 기부문화
- 단청 명인 이치호
종족 구휼을 위한 의장(義庄) 그리고 그 확산으로서의 나눔
현장의�숨결
20년 만에 다시 일어선 익산 미륵사지 석탑
전통을�잇는�사람
속도보다는 정성 추정보다는 역사적 사실 - 국립문화재연구소 김현용 학예연구사
전통을 잇고 현대의 미감을 창조한 금어(金魚)
문화재�다가가기
국립무형유산원 국외교류전시
「한국과 중국의 무형유산, 비단」 특별
함께하는�문화재청
백제 사비시대 왕궁터 ‘부여 관북리 유적’ 발굴 시작
이야기가�있는�식사�食史�
카툰으로�보는�문화재�정책
자수박물관, 그리고 평생 모은 소장유물 기증한 허동화·박영숙
새 단장 마친 천연기념물센터
가깝지만 이국적인 북한의 겨울 별미들 뜻 있는 사람, 소중한 선물
이야기가�있는�식사�食史�
가깝지만 이국적인 북한의 겨울 별미들 명인열전
상상력 가득! 구석구석
독자�코너
衣 바 로 보 기
우리는 언제부터 백의민족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 것일까?
분명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고 그 뒤를 이어 여러 사람에게
회자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표적인 복식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 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었던 것은 사실이다. 또 그 역사도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백의만이 존재한 것은 아니며, 흰색만을 입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글. 이민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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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직물은모두 소색(小索)이라고 하는 옅은 베이지색이다. 이 소색의 직물을 빨랫 방망이로
1275년(충렬왕 원년), 동방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두드려 깨끗이 빨고 잿물에 넣어 삶고 풀을 먹여
목위(木位)에 해당하므로 푸른 빛깔을 숭상하는
다듬이질했을 때 비로소 백색이 된다. 색깔만 바뀌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많은 사람이 흰모시
등거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백색인 금(金)에 절제를 받는 형국이라고 하여 흰색 착용을 금지했다. 반면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이익은 백의 착용을 금지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흰옷을 즐기고 오랜
세월 흰옷을 입는 풍속은 예(禮)와 악(樂)을 지켜 온 결과이기에 자랑스러워할 일이지 싫어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백의에 대한 인식은 서로 달랐다.외부에서 바라보는 우리 옷에
대한 이해는 어땠을까? 일본의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 사람들은 남녀노소 한결같이 흰옷을 입는데 그 이유를 우리 민족이 겪어 온 고통스럽고
의지할 데 없는 역사적 경험과 색채 결핍에서
찾았다. 또 미국인 목사이면서 의사인 알렌은 『조선견문기』에서 흰색을 조선의 국색(國色)이라고 하며, 3 년상을 치르는 상례문화에 따라 흰옷을
오랫동안 입은 결과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 옷을 얼마나 알고 기록해 놓았는지는 따져 봐야 한다.
예와 효를 중시했던 우리 민족이 3년상을 치렀던 것은 맞지만 상복으로 입는 베옷과 일상적으로 입는 흰옷은 다르다. 또 우리는 기본적으로 흥이
많은 민족이다. 노래와 춤이 생활이었고 이를 더욱 신명나게 할 수 있는 것이 자연을 닮은 순수한 복색과
고름, 띠, 색동이 어우러진 활기찬 복식이었음은 개항기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에 의해 더 분명해졌다. 프랑스인 듀크로는 조선인이 즐겨 입는 흰색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색상으로 여기에서
창의적 정서가 생성되어 조선인의 심성이 어린아이와
같이 밝고 깨끗하다고 했다. 다른 프랑스인 드 라 네지에르는 조선의 흰색은 백옥같이 밝은 흰색에서
거칠고 투박한 흰색까지 마치 음색의 향연 같다고 했다. 우리 민족이 즐겨 입었던 삼베, 모시, 무명 등 직물에 관한 통찰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해석이다.
색동소매를 단 빨간색 저고리에 연분홍색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와 흰색 풍차바지에 푸른색 저고리를 입은 남자아이,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은 엄마가 정월 초하룻날 경복궁 앞으로 나들이 나온 모습이다. 한겨울이라 모두 남바위를 쓰고 있으며, 남바위에 달린 끈, 산호줄 등이 보인다.
엘리자베스키스 作, , 채색목판화, 1921년, 40×27.5cm 국립민속박물관
것이 아니라 직물의 느낌 자체도 투박하거나 거친 느낌에서 윤기가 흐르는 고급 비단인 공단(貢緞)의 느낌으로 탈바꿈한다.
한국인이 즐겨 입는 백의가 결코 흰색 한 가지만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흰옷을 즐긴 우리
민족의 순수함 내지 활기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거기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미국인 목사 와그너는 남녀 가릴 것 없이 어린이의 옷은 매우 화사하다고 했으며,
영국의 화가 새비지 랜도어는 한국인의 단순한 형태의
의복을 멋지게 표현하는 옷고름의 색상은 옷에 활기를 주는 구성상의 절묘한 비례에서 나온다고
인식했다. 또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을 쓴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오렌지색이나
파란색 주머니와 술이 달린 긴 명주 허리띠를 오른쪽에 우아하고 길게 늘어뜨려 걸을 때마다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한다.더욱이 파랑, 초록, 노랑, 빨강,
자주 등 화사한 색깔은 흰옷과 어울려 ‘색동의 축제’
같은 느낌을 준다고 했다. 이들 색은 어디에 쓰였을까?
물론 어린아이는 남녀 할 것 없이 색동소매를 단 저고리와 함께 오방장두루마기며 까치두루마기를
입었다. 여성은 남색 또는 붉은색 치마를 입고 깃과 고름, 끝동에 자주색이나 남색 단의 저고리를 입었다. 남성도 바지저고리 위에 배자를 입고 그 위에 흰색의
두루마기를 입었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한국의 파란 하늘과 회색 돌, 빛바랜 담장은 순수함을 즐긴 한국인의 복색과 어우러져 순수하면서도 활기찬
조화를 이루었으니, 누가 봐도 축제 같은 흥을 느끼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복식의 힘임을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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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방영된 드라마 의 반응은 놀라웠다. 특히 외국인은 조선시대 모자인 '갓'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각종 리뷰에는
'좀비와 모자에 대한 드라마','팬시한 모자', '아름다운 모자'등 좋은 반응이 이어졌다. 또 사람들은 영어의 '신(God)'과 같은 발음인 '갓'을 'Oh, My
Gat' 등의 언어유희로 즐기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관심은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1900년대에 조선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은 갓을 쓴 조선 사람들을 '의장(儀裝)을 갖춘 범선', '모자의 나라 사람들'등으로 부르며 책과 신문에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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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민보라(국립대구박물관 학예연구사)
‘갓’은 순수한 한국말이며 한자로는 ‘립(笠)’ 또는
‘입자(笠子)’로 쓴다. 갓은 넓은 의미로 모자(대우)와 차양(양태)이 있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갓’이라고
하면 대부분 조선시 대 모자인 흑립(黑笠)을
떠올리지만, 갓은 이미 고구려 고 분벽화에서도 나타날 만큼 역사가 매우 오래된 모자이다. 5세기
고구려 감신총 벽화에는 패랭이 형태의 검은 갓을 쓴 채 말을 탄 사람이 그려져 있다. 신라와 백제 고분에서 는 갓과 모양이 다르지만, 다양한 형태의 관과 관모류가 출 토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갓은
실물자료로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15세기 김진,
16세기 김시습의 초상으로 그 모양을 유추할 수 있다. 고려와 조선 초기의 갓은 모자의 꼭대기가 둥근
형태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갓�흑립� 모양은 조선 중
기 때 비로소 등장하였다.
조선시대는 갓의 아름다움이 활짝 꽃피었던 시기였으며, 그중에서도 흑립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갓이다. 흑립은 먹칠과 옻칠을 여러 번 하여 선명하고
맑은 검은색을 띤다. 검은색을 통과한 빛은 흰색의
도포와 어우러져 세련되고 우아한 기품을 느낄 수 있다. ‘의장(儀裝)을 갖춘 범선’이란 표현은 바로 이 같은 옷차림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선비의 덕목 중 하나인 ‘의관정제(衣冠整齊, 의관을
바르고 가지런하게 하다)’는 유교적 가치이자 전통적인 몸의 개념 을 담고 있다. 성리학 이론에서
정신과 몸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몸은 유교적 가 치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선비가 상투를 올리 고 망건을 착용하며, 갓을 쓰는 일련의 과정은 유교 문화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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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자부심으로 나타났다. 조선 후기 학자인
대우와 양태 모두 대나무를 사용했다. 하지만 대나
상투의 유무에 따라 오랑캐를 구분했고,
조심 하더라도 가는 대나무실을 엮어 짠 갓은 문에
조재삼의 『송남잡지』와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연행록』에는 망건과 갓을 쓰는 유교 적 의관제도가 청나라에 비해 조선에 잘 계승되어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1895년(고종32)에 발표된 단발령은 조선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단발령은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지 만 한편으론 몸과 정신이 동등한 위치에 놓이는 계기가 되 었다. 즉, 몸과 정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유교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신체의
일부인 몸과 머리를 독립적인 개체로 인식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외국에서 들어온 제도는 몸을 인식하는 데 새로운 변화를 보였으며, 모자를 패션으로 인 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단발령 이후 서양의 양복과 중절모가 유행하면서 갓은 점점 작아지고 중절모와 비슷 한 형태로 변했다. 두루마기
같은 전통 한복에 서양식 중절 모를 착용하기도 했다.
두루마기와 중절모 차림은 다소 낯 선 모습이었지만 새로운 문화와 전통이 자연스럽게 섞이 는 과정이었다.
조선시대의 갓이 대중성과 더불어 독특한 조형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재료와 제작 방식에 있다. 갓의 재 료로는 흔히 말총을 떠올리지만, 사실은
말총과 대나무를 섞어 만든다. 특히 조선시대의
갓은 대우(모자)와 양태(차 양)를 따로 제작하여 조립한다. 갓에 다양한 재료를 사용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제작 방식 때문이다. 초기의 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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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를 다루는 방법은 쉽지 않았다. 선비들이 몸가짐을
걸려서 부서 지는 경우가 많았다. 대나무로 가는
실을 만드는 공정 또한 꽤 까다로운 일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대나무를 대체할 재 료를 찾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말총이다. 말총은 이미 탕 건과 망건을
만드는 재료였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재료였다. 머리카락과 비슷해서 질기고 탄력이 있 기
때문에 갓을 만드는 데도 매우 적합하다. 이렇게 말총 으로 갓을 만들게 되면서 점차 늘어나는 갓의 수요에
맞춰 갓의 표준화와 대량생산이 가능할 수 있게
되었다. 양태는 머리카락만큼이나 가는 대나무실을
씨실과 날실로 엮고, 사이에 비스듬히 빗대를 꽂아 견고하게 만든다. 조선의 장 인들은 이를 더 발전시켜 이 위에 명주실이나 비단을 올리 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이렇게 하면 양태는 더 견고해지 고, 표면은
대나무와 또 다른 독특한 질감이 느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갓의 아름다움은 은근하게 드러나는 멋 스러움에 있다. 선과 선이 겹치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 고, 가는 대나무 사이로 빛이 들어와 아른거리는 색감을 만 든다. 특히 갓의 조형미는 양태의 곡선미에 있다. 양태의 선 은 가운데 부분으로 가면서 봉긋하게 올라왔다가 완만하 게 아래로 떨어진다. 갓의 평평한
모정에 숨겨 있는 정꽃 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떤 문양인지 보이지 않 는다. 착용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은근한 멋이다. 이렇듯 갓 은 조선시대 남성들의 예의 갖춤이자 늘 함께했던 아이 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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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전시실 속 복식 이야기
현대인은 의복의 색상, 디자인을 통해 그 사람의 성향, 분위기 등 자신의 개성을 나타낸 다. 반면 과거에는 의복의 종류, 재료, 색상 등은 신문이나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
이었다. 직물을 염색하기 위해 사용되는 염료는 돈으로 거래가 될 정도로 가지가 있었기
때문에 홍색, 아청색 등 색이 있는 옷은 아무나 착용할 수 없었다. 특히 왕실의 인물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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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에 맞는 의복을 착용했다.
글, 이정민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국왕의 의복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
왕실 여인들의 의복, 다양하게 만날 수 있어
국립고궁박물관 2층에 위치한 '조선의 국왕' 전시실
임금의 면복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이에
가례(嘉禮)나 국가의 큰 제사인 종묘(宗廟)에서
점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 모두 대한제국기에 제작
은 어좌, 어보 등 임금의 상징물이 전시된 곳으로,
상응하는 여성의 대례복인 적의(衣)는 국내에 석
제사를 올릴 때 임금이 착용했던 예복(服)인 '면복
된 것으로 청색 바탕에 홍색 선으로 가장자리를 둘
(服)' 구성품이 전시되어 있다. 면복은 '양'을 뜻하는
렀고, 꿩과 이화문이 선을 이루며 19-12줄로 표현
검은색 상의인 곤복(服)과 음을 뜻하는 붉은색의
되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영친왕비가 1921
하의인 상(業)에 색색의 구슬을 꿰어 모자의 앞뒤
년 순종을 알현할 때 착용했던 적의(衣) 일습과 진
로 늘어뜨린 형태의 면류관(定)이라는 모자를 착용
주비녀 등의 장신구가 함께 소장되어 있으며, 이 적
한 차림이다. 이 옷은 가장 중요한 의례에 착용하는
의의 꿩문양은 친왕(親王)에 해당하는 9개의 줄로
만큼 곳곳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곤복에는 백성
구성되어 있다. 왕실의 생활실' 중앙에는 적의의 모
을 생각하는 다섯 가지 문양을 양의 의미인 그림으
든 구성을 착용한 모습이 전시되어 있어 그 당시의
로 표현했고, 상은 4개의 문양을 음을 뜻하는 자수
차림을 볼 수 있다. 그 외에 사극에서 대왕대비, 중
로 표현했다. 면류관은 의복에 총 9개의 문양이 있
전 등이 착용한 복식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 소례복
는 것과 같이 앞뒤로 줄이 9개씩 늘어져 있다. 국내
(小禮服)인 당의(唐衣)가 있다. 반가(班家)에서 예
에 현존하는 면복 유물은 매우 극소수로 국립고궁
복으로 당의를 착용한 경우도 있지만, 왕실에서는
박물관에는 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복원품이 전시
봉황,수복(福) 등의 문양을 금박을 찍거나 금과 함
되어 있다.
께 직조해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들 특징을 알고 국
한편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영친왕(英親王,
립고궁박물관에서 복식 유물을 살펴본다면 보다
1897~1970년) 일가 복식 및 장신구류 일괄도 국립
많은 부분이 보이고 느껴질것이다.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왕실의 생활' 전시
국립고궁박물관의 상반기 특별전인
실에 들어서면 이와 관련된 궁중 복식과 장신구를
전시에는 복온공주(溫公主, 1818~1832년)가 혼례
볼 수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영친왕의
때 착용하였던 활옷이 전시됐다. 붉은색 바탕에 모
곤룡포를 볼수 있다. 사극에서 임금이 붉은색 옷에
란, 연꽃 등을 다양한 색으로 화려하게 자수로 장식
금실로 용 문양을 수놓아 장식한 옷을 입고 어좌에
한 이 옷은 왕실 밖으로 나가 새출발하는 공주를 위
앉아 대신들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
한 것으로 정교하고 세련된 궁중 자수의 면모를 보
는데, 곤룡포는 국왕이 집무를 볼 때 착용했던 옷으
여준다. 그리고 또 다른 활옷 한 점은 착장자는 알
로 '익선관 (善)' 이라고 하는 모자와 함께 착용한다.
수 없지만, 창덕궁에서 보관되어 오던 것으로 보존
임금은 붉은색을, 왕세자는 검은색에 가까운 아청
처리를 거치기 전의 조사 과정에서 과거에서 떨어
색 옷을 착용했다.
진 답안지를 심지로 활용한 것이 발견되었다. 전시 에 나온 두 활옷의 자수 도안은 서로 다른 양식으 로, 비교하면서 감상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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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국립고궁박물관은
‘왕실’을 주제로 한 국내 유일의 국립박물관으로 의복부터 장신구까지 다양한 궁중 복식(服飾) 유물을 소장하고 있어 궁중의 의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왕실 의복의 특징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화려하고도 정교한 왕실의 의복 문화를 느껴볼 수 있다. 주소 서울시 종로구 효자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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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02-3701-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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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衣
석주선기념박물관 단국대학교 개교 20주년을 기념해 개관한 석주선기념박물관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고 보급하는데 노력해 왔다. 현재 유물의 특성에 맞는 전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5개 전시 공간 및 첨단 수장고를 갖추고 있다. 박물관 위치: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로152 관람시간: 1일2회 개관(오전10시~12시/오후2시~4시) 문의: 031-8005-2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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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병장수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배냇저고리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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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하면서도 화려한 혼례용 옷, 생을 마칠 때
올바른 전승에 힘쓰는 숨은 일꾼 한국 전통 복식의 아름다움과
입는 수의까지. 전통 복식에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선조들의 생활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묻히기 쉬운 복식 유물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되살려내는 숨은 일꾼, 이명은
학예연구사를 만나 한국 전통옷의 아름다움과 올바른 전승에 대해 들어보았다.
글. 김수은 사진. 김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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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선기념박물관에는 복 식 관련 유물이 1만 2,000 여 점 보관되어 있다.
우리 전통옷과 유물에 대한 깊은 애정
우리나라 전통 복식의 메카인 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박물관(이하 석주선기념박물관)은 한국 복식
1세대 학자인 석주 선 박사가 평생에 걸쳐 모은 복 식 관련 유물 3,365점을 기증해 1981년 개관한 곳 이다. 이곳에는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의 딸 인 덕
온 공주가 혼례 때 입었던 화려한 자태의 원삼을 비롯해 광해군의 비 유씨가 입었던 당의 등 총 1만 2,000여 점의 복식 관련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이 명은 학예연구사는 이곳에서 15여 년 동안 유물복 원과 전시기획 등의 일을 해 온 복식 복원 전문가
이다. “학예연구사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소장
품에 대한 관리와 전시기획, 학술 연구 등을 수행 하는 일을 합니다. 유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좋 은 직업이죠. 20여 년 전 이곳에 첫발을 디 딘 후 지 금까지 오랫동안 일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일을 좋아
하 기 때문이에요. 민속복식 분야의 유물 출토와 복 식 유물 분석 연구, 복원, 소장 유물관리, 전시기획
과 해설 등의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석주선기념 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로 출토 복식을 다루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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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한 곳이다. 1980년대 전국에서 무덤 이전 사례가 발생하면서 국내 유수 박물관에서 가져가지 않은
출토 복식을 석주선 박사가 이어받았다. 이후 석 박
사는 제자들과 함께 유물들을 손수 복원해 계승해 왔다. 석주선기념박물관은 박사의 뜻을 이어 지금
도 매년 출토 복식 특별전과 심도 있는 학술발표를 진행하며 40여 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고 전 드라마의 복식 고증, 현대 한복의 디자인과 직물 패턴, 문화상품 개발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명은 학예연구사는 전통 복 식에 대한 깊은 애정
으로 한길을 걸어온 석주선 박사처럼 우 리 복식 복
원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우리나라 전통 옷의 아 름다움을 전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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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선기념박물관의 복 원품들을 통해 우리나라 500년 의생활의 다채로 움을 엿볼 수 있다 3 특별전에 전 시 중인 활옷
을 개최했다. 이 전시는 국내 최초로 유물의 직물 을 복원해 주목을 받았다. 당시 석주 선 박사는 투
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출토 복식 중 대표적인 3 종
류의 무늬 직물을 사비를 들여 제작했다. 출토된 옷 은 대부 분 직물의 손상이 심해 형태와 색상이 없어 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복식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전시를 기점으로 복
원할 때 시대에 맞는 무늬와 직물 사용하게 되었다.
또 복원 직물의 제작 과정은 한복 옷감 문양 디자인 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유물과 동일한 재 료와 기술을 사용하는 ‘유물 복원’은 유물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현상 복제’와 현재 유물
이 훼손되어 있더라도 복식을 제작했던 초기 상태 로 복원하는 ‘원형 복원’ 방식이 있어요. 2004년에 는 ‘밀창군 이직묘 출토 복식 전’이 열렸는데, 밀창
전통 복식의 과거와 미래를잇는 디딤돌
우리나라 전통 옷을 복원하는 일은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다. 옛 여인들이 종일 옷감을 짜고 한땀 한땀 손바느질을 했듯이 심혈을 기울여야 비로소 완성
된다. 그 때문에 전통 복식에 대 한 깊은 애정과 사 명감, 전문 지식을 갖춘 사람만이 이 일을 할 수 있
다. “현재 전국의 박물관에서는 출토 복식 등 다양
한 복식 유물이 소장·전시되고 있지만, 복식 유물이
장기간 전시되면서 심각 한 손상이 발생하고 있어 요. 유물의 안전한 보존과 계승을 위 해서는 체계적
인 복원 작업이 이뤄져야 합니다. 유물과 유사 하게 제작해 대체할 수 있는 복식 제작도 필요해요. 대체
전시 물은 일반인이 우리 전통 옷의 특성을 쉽게 이
해할 수 있게 하며, 우리 복식이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나가는 디딤돌 역할을 합니다.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는 지난 1997년 ‘조선조 치 마·저고리 특별전’(석주선 박사 1주기 추모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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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묘에서 출토된 조복을 학계 최초로 현 상 복제와 원형 복원품을 제작해 화제가 됐어요.
”이 전시는 장기간 전시되면서 손실된 유물을 현상 복제하고 출토된 옷에서 볼 수 없었던 형태와 색상
등을 유물에 알맞게 적용해 동시대 사람들의 의생 활 패턴을 사실적으로 소개해 관람객의 시선을 사 로잡았다. 2006년에는 석주선 박사 10주기 추모 기
념으로 ‘조선시대 우리 옷의 멋과 유행전’이 개최됐
다. 1차로 16~20세기까지의 유물을 분석하고, 2차 로 문헌과 풍 속화 대조 등을 통해 만든 복원품을
모델에게 직접 입혀 우리 나라 500년 의생활을 다
채롭게 보여주었다. “2013년에 열린 ‘영릉 참봉 한 준민 일가묘 출토 유물전’을 위해 진행했던 복원 작 업이 가장 힘들었어요. 이 전시는 영릉 참 봉 한준
민과 며느리 평양 조씨의 유물 74점을 통해 조선시
대 솜옷과 누비옷의 재봉기법을 직접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특별한 전시였습니다. 2003년경 문중
에서 유물을 직접 수습해 박물관에 기증했는데, 오
활 스토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에게 선보이고
있다. 특별전과 학술대회를 통해 매년 새로운 전통 복식을 소개하고, 또한 그동안 축정된 유물과 연구 를 바탕으로 국가에서 지정한 문화재의 대부분이
석주선기념박물관을 통해 복원복제되어왔다. 한국 복식사를 새롭게 정립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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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한국복식(韓國服 飾)』과 관람객의 이해
를 돕기 위해 제작되는 전시 도록은 한국 복식의 세 계적 흐름을 이해하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그뿐 만 아니라 이들 도록은 전통 한복에 대한 인식을 높이 고, 선조들의 멋과 패션 감각을 엿볼 수 있도록 구 성했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지난 2015년 5월에는 구글 컬처럴 인스티튜트의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
했다. 또한 2017년 구글 아트 앤 컬처 ‘우리는 문화
를 입는다’ 프로젝트에 참여해 우리 전통 복식을 누 구나 편리하게 온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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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선기념박물관은 2015년과 2016년 경기도 박물 관·미 술관 전시 지원 사업 우수기관으로 선정됐으
랜 세월과 토양 등의 영향으로 겉감 인 견직물이 모 두 없어지고 안감인 솜과 면직물만 남아 있었죠. 기 증을 받으면서 문중과 전시를 약속했지만, 안감만
남아 있는 옷을 복원하는 일은 정말로 막막했어요. 몇 달 동안 유물을 보며 분석해 보니 유물에서 솜옷
과 솜누비옷의 재봉기법 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 어요. ”유물 분석 후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는 국내
최초로 5가지 유 형의 조선시대 누비옷 솜두기 기
며, 2018년도 ‘K-museums 우수 사업관’에도 이
4,5
해평윤씨묘 출토 당의 와 그 복원품 6
이명은 학예연구사는 우리 옷의 아름다움을 복원하는 일에 사명감 을갖고있다.
름을 올렸다.『분홍 단령의 비밀』, 『어진에 옷을 입히다』 등 한국 복식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
는 다양한 도서를 발간해 전통 복식 이해의 폭을 넓 히고 있다. “석주선기념박물관의 숨은 일꾼으로 일 하는 모든 순간이 의미 있고 행복합니다. 학예연구 사로 일해 온 전문성을 기반으로 앞으로도 우리 옷
의 대중화를 위해 기여하고 싶어요.” 이명은 학예 연구사를 비롯해 우리 옷의 아름다움을 복원하는
이들의 열정과 석주선기념박물관의 지속적인 노력
법을 확인했다. 이 방법을 사 용해 국가무형문화재
으로 한국 복식사의 계승과 발전이 이어져 나가길
누비장 김해자 보유자와 그 제자들이 누비옷을 복
기대해 본다.
원해 냈다.
2년 전에는 ‘전주 이씨 이헌충(수도군판 5세)과 부 인 안동 김씨묘 출토 유물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
에서는 바지 가닥이 3 개로 이뤄진 ‘세 가닥 바지’와
복원품들이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세 가닥 바지’는 남성 방한용 기능 바지로 1500년 대 전후의
무덤에서 발견되며 전국에 총 9점의 유물만 존재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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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로 희소한 유물이다.
한국복식사 계승과 발전에 기여하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조선시대 복식 유물을 소장하 고 있는 석주선기념박물관은 우리 선조들의 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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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깃든 물길, 생명을 품은 너울
가까운 곳에 있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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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쌀쌀해지니 주변을 더욱 챙기게 되는 연말연시다. 행복은 늘 가까운 곳에 있다는데 왜 사람은 멀리만을 바라보며 사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전국을 돌아다녔던 발걸음으로 이번에는 가까워서 더욱 들여다보지 못했던 한강변을 찾아볼 참이다. 반만년 역사 속에서 한반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곳. 빽소 빼앗기며 여러나라의 흥망성쇠를 수없이 함께 겼어냈던 곳, 그럼에고 너무나 익숙하고 편안한 한강. 길이 잘 조성되어서 산책하듯 거닐기도 좋은 그곳으로 초겨울 한나절 여행을 떠난다. 오늘은 서울의 서쪽 끝, 김포부터 본 후 양화나무, 아차산성을 거쳐 동쪽 끝, 암사동까지 줄곧 다녀볼 참이다. 겨울치고는 날이 화사해서 사람들이 많기를 기대하면서 밖으로 나선다.
writer 신지선 Photograper
김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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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무르익는 소리를 따라
한강이 겹겹이 둘러싸여 풍경좋고 물 좋은 김포시 한강.자연 의 향기로 가득한
이곳에는 야생 조류 생태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쭉 이어져 내려온 한강과 살아있는 자연이 바로 그 주인공. 풀맛나고, 살맛나는 김포한강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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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은 기존 철새 취식지의 생태성
을 보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다. 생태공원의 문을 들어서니 묘하게 생긴 건물이 제일 먼저 시선을 끈다.
이곳이 바로 공원의 심장, 에코센터다. 새 둥지 모양으로
만들어진 건축물로 김포의 역사 및 생태 관람, 먹이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간단하게 전시시설도 둘러보고 조그맣게 조성된 조류생태전시관을 보며 새들에 대한 이해도
높여본다. 이런저런 설명들보다 먼저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싶어 센터 안은 잠깐만 둘러보고 에코센터 철새조망
전망대를 오른다.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것은 물론, 한강의 풍경과 주변 경치가 사방으로 보인다. 시야가
확 트이는 느낌이다. 서울에서 이렇게 시원하게 들판을 조망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공원 면적만 60만 m2.
초겨울에 들어서는 때라 초록빛이 가셔서인지 넓은 들판이 좀 휑하게 느껴진다. 다시 내려와 잘 조성된 산책로를 잠시 걷는다.
대대로 국토의 대동맥 역할을 해온 한강
한강은 아리수, 한수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남한에서 가장
유량이 많은 강이다. 면적만 26,018km로 한반도에서 압록강, 두만강 다음으로 넓고 긴 강이다. 본류는 양평군
양수리에서 시작되어 북서쪽으로 흐르며 왕숙천, 탄천, 중랑천, 안양천, 굴포천 등의 지류를 합치고 임진강과
만나 경기만으로 흘러든다. 한강은 역사적으로도 이 땅의 대동맥 역할을 해냈다. 수많은 물자와 문화가 한강을 거쳐 이 땅에 흘러들었고유역을 중심으로 꽃피고 번성했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일어나면서 한강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수도권의 인구가 증가하자 한강은 생활용수, 관개용수, 공업용수의 수자원이 되었다. 더불어 그 일대는
아름답게 개발되어 서울 시민의 휴식을 책임지는 명소들이 되었다. 오늘은 말끔하게 정비되어버린 한강변이 아니라
자연 상태의 한강을 먼저 만나고 싶어 김포에 위치한 한강야생조류생태공원부터 찾았다.
“
눈이 하얗게 쌓이고 북풍이 휘몰아치니 한 나라 궁정의 승로반 선인장이 얼어 꺾어졌으리, 나귀 타고 강가에서 술 취해 읊으니 가스목 호탕한 기운 천 길 무지개로다.
”
성지가 된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의 한 대목이다. 풀어 쓰자면 양화나루에서 밟는 겨울 눈에
대한 시. 조선 성종 때의 명신인 이승소가 지은 시로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의 절경을 시상으로 느껴볼 수 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앞에 두고 누에 머리를 닮은 봉우리, 잠두봉이 뚝 솟아 있다. 양화나루는 경치도 빼어나지만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지다. 이곳은 고려
때부터 한강의 중요 도선장이었으며 양천, 강화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특히 영조 때는 한강의 수로와 한성
방어의 요충지로 지정되어 군사 100명이 주둔하기도 했다. 그러나 병인양요 때 이곳은 역사의 커다란
변화에 휩싸이게 된다. 1866년 프랑스 극동 함대가 조선 원정을 시도한 끝에 양화진과 서강을 올라왔다가
중국으로 돌아갔고 그해 9월 다시 강화를 침략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조선은 이 사건이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간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 때문에 일어났다
생각하고 프랑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1만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이곳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신자들이 칼날을 받은 곳’이라는 뜻의
절두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잠두봉 정상에 천주교 절두산
순교자기념관과 성당이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호젓한 길을 올라 성당으로 들어가 본다. 평화롭고도
고요한 성당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이곳에서 목숨을 다한 성인들을 위해 잠시 눈을 감아본다. 발길을 돌려
한강변으로 내려온다. 흐르는 한강의 모습은 이곳의 분위기를 닮아선지 평화롭고 고요하다. 잠시 한강변을 따라 걷다가 차를 타고 양화대교를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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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북로를 타고 아차산성으로
강변북로를 타고 구리 쪽으로 가다 보면 사적 제234호 아차산성이 나온다. 한강 하류의 북쪽
강변에 있는 해발 285m의 봉우리 위 산성.
둘레는 1,125m에 이르니까 꽤 크다. 이곳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한강의 상류와 하류에서
올라오는 선박의 움직임을 빨리 포착하기 좋다.
그래서인지 한강 유역을 두고 다투었던 삼국은 그들이 이곳을 차지할 때마다 저마다 필요에
맞게 방어요새로 활용했다. 이처럼 아차산성은 격렬한 항쟁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입구를 지나니 넓은 산책로가 펼쳐진다.
강변을 내려다보는 관광 구역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아차산성. 평안한 세월에 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아차산은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 온달이 전사한 곳이 아단성, 즉
온 달
정상에 올라가 한강을 이리저리 내려다볼
溫達 고구려 평원왕~영양
마구나 쇠스랑 등이 보인다. 아마도 성 안에서
주와의 전투에서 공
왕 때의 장군으로 북
이곳을 지키던 병사들의 생활 물품들이었을
을 세웠으며, 신라에
생활 모습이 눈에 보이듯 그려진다. 흥미롭다.
영토를 회복하기 위
것이다. 유물들을 보니 갑자기 그 당시 성 안의 나지막한 산인 줄 알았는데 한참을 오르니 힘이
든다. 숨을 몰아쉬고는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에 섰다. 정말 한강의 모습이 한눈에 다
보인다. 멀리로 다리들이 보이고 오른편으로는 풍납토성도 보이고 롯데 타워도 보인다. 서둘러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신석기시대 모습을 볼 수 있는 암사동 유적
이번에는 광진교를 거쳐 암사동으로 건너간다. 삼국시대에서 선사시대로 넘어가는 길이다. 1925년 대홍수로 인해 유물포함층이 발견되어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간 사적 제267호 암사동
유적지. 들어서는 길에 걸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 추진’ 플래카드가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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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먼저 움집터로 향해본다. 겨울이라선지
박물관으로 들어서니 신석기시대 대표 유물
참이다. 오르는 길에는 곳곳에 출토유물을
설명하는 설명판들이 서있다. 토기부터 구절판,
전시한 유적박물관, 체험마을로 구성되어 지었다니 선사인의 지혜에 새삼 감탄한다. 작은
온달과 평강공주의 동상이 서있는데, 온달장군의 이채롭다. 산으로 난 길을 굽이굽이 올라가본다.
대움집을 재현해놓은 움집터와 유적을 보관 움집이 따뜻해 보인다. 선사시대에 이런 집을
이곳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아차산 입구에는 용맹한 모습이 설화 속 바보 이미지와 겹치며
공원 같은 암사동 유적지는 선사시대의
빼앗긴 한강 유역의 해 출정하였다가아
단성에서 전사했다.
빗살무늬토기를 볼 수 있다. 불 피우는 것과
토기를 제작해보는 등의 체험시설도 있다. 직접 해보는 것이라선지 어린 아이들의 줄이
제법 길다. 왠지 성가신 마음에 멀찍이 서서 구경만 해본다. 암사동 유적지가 잘 정비된
신석기 유적지라고 해서 이곳에서 신석기 유적만 발견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해다.
대홍수 후 발굴 때는 6개의 자연층위로 된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중에는 백제 토기와
건물자리가 나온 검은모래층, 민토기와 돌도끼 등 청동기시대 유물이 나온 회색모래층,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붉은갈색모래층이 모두 섞여 있었다. 이처럼 암사동에서는 가장 멀리
신석기시대부터 한강 주변에 살아왔던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강은 그런 곳인 것 같다. 무궁무진한
역사가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곳. 한강의 서쪽부터 동쪽까지 반나절. 강을
중심으로 엮어낸 조상들의 삶의 역사를 한눈에 목격한 기분이었다.
자연과 함께 행복을 쌓아가는
생태공원과 아차산성, 암사동 유적 등 역사적인 관광지가 있는 한강, 눈으로 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 역사를 생각하며 느끼는 시간이기에 그 여정이 더욱 뜨겁다.
2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1 한강야생조류 생태공원
4 아차산성
5 암사동 유적
3 조선장
한강 주변 추천 명소
3 1����한강야생조류�생태지역�������병인박해의�현장�������양화나루와�잠두봉�유적�������서울시�무형문화재�제6호�조선장� 2 4
5����한강이�내려다보이는�천연요새��아차산성��������선사시대의�모습을�엿볼�수�있는�암사동�유적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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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衣
— 갈 무 리 하 기 —
신윤복의 그림으로 보는 조선 패션
“ 내가 조선의 패션 리더다 ” 몸에 꼭 맞는 짧은 저고리와 푸른색의 풍성한 치마.
1
치마 밖으로 살짝 내민, 날렵한 모양의 외씨버선을 신은 한쪽 발. 보는 이들의 숨을 멈추게 할 만큼 고혹적인 매력이 넘치는 그녀의 패션. 바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의 주인공이다. 글, 자료. 백남주(미술사학자, 독립큐레이터)
하후상박, 그 시절의 트렌드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틀어 올린 풍성한 얹 은머리와 계란형의 갸름한 얼굴, 반듯하고 환한 이마, 초승달 같은 눈썹에 쌍꺼풀이 없는 새초롬한 눈매와
육쪽마늘 같은 예쁘장한 코 그리고 앵두를 닮은 살짝 다문 입술은 여인의 미모가 얼마나 완벽한지를 알려 준다.
혜원이 그린 이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 정확한 정보가
알려진 것은 없지만 신윤복의 〈미인도〉를 연구한 학자 대부분은 그녀의 신분이 기생이었을 것으로 추
정하고 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저고리 천이 자주색으 로 깃과 고름, 곁마기의 색을 달리하고 옥색의 소매 끝 동을 달아 멋을 부렸다. 그런데 얼핏 보아도 불편할 정 도로 상체에 꽉 끼고 기장은 매우 짧다.
이와는 달리 푸른색의 치마는 속옷을 여러 겹 겹쳐 입 어 매우 풍성하게 부풀어 있다. 실용적이기보다는 멋
내기용 복장인 것이다. 이런 차림새는 ‘하후상박(下厚 上薄, 치마는 풍성하고 저고리는 꽉 조이게 입는다)’ 이라 하여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패션 경향이다.
당시에도 여인들의 옷차림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었
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는 여인들의 복식에 대 해 아래와같은 비판적인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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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물 〈미인도〉, 19세기 초반, 비단에 채색, 114.2cm×45.7cm ⓒ간송미술관
다양한 패션도 잘 묘사되어 있다. 그의 그림에는 사 대부 양반부터 하급 관리까지 다양한 신분의 남성들 이 등장하는데, 그중 최고의멋쟁이는 별감이다. 별감
은 궁궐 내에서 왕과 왕족 가까이 있으면서 잡무를 담 당하던 하급 관직이다. 이들은 최고권력자 주변에서 일하는 자신의 지위를 악용해 양반 못지않은 권세를
누렸으며, 사치를 부리고 조선 후기 한양의 유흥문화 를 주도했다.
별감이 애용했던 패션 아이템은 혜원의 그림 속에
잘 묘사되어 있다. 《혜원전신첩》에 실린 〈야금모
2
행(夜禁冒行)〉, 〈기방난투(妓房亂鬪)〉, 〈주사
옷깃을 좁게 깎은 적삼이나 폭을 팽팽하게 붙인 치
거배(酒肆擧盃)〉에는 붉은색 겉옷을 입고 노란색
마는 의복이 요사스럽다. (…)
초립을 쓴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별감이다. 별
새로 생긴 옷을 시험 삼아 입어 보았더니, 소매에 팔
감은 붉은색 겉옷 안에 푸른색 비단옷과 주황빛 배
을 꿰기가 몹시 어려웠고, 한 번 팔을 구부리면 솔기 가 터졌으며, 심한 경우에는 간신히 입고 나서 조금
있으면 팔에 혈기가 통하지 않아 살이 부풀어 벗기 가 어려웠다. 그래서 소매를 째고 벗기까지 하였으
니, 어찌 그리도 요망스러운 옷일까! 대저 복장에 있 어서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창기(娼妓)들의
아양 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인데 세속 남자들은 그 자태에 매혹되어 그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자 기의 처첩에 권하여 그것을 본받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익히게 한다.
아, 시례(詩禮)가 닦이지 않아 규중 부인이 기생의 복장을 하도다! (…)
- 이덕무, 「사소설」『청장관전서』 이 글의 내용을 보면 기녀들의 패션 스타일이 여염 집 규수는 물론이고 사대부가의 여성 사이에서도 크
게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회 현상은 이 전 시대에는 보기 어려운 문화의 역전 현상이다. 위 에서 아래, 즉 사대부가의 규방에서 천민인 기녀들
자를 겹쳐 입었는데, 대담한 보색 대비의 패션도 무 2. 국보 《혜원전신첩》 중 〈야금모행〉, 19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각 28.2cm×35.6cm ⓒ간송미술관 3. 국보 《혜원전신첩》 중 〈주사거배〉, 19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각 28.2cm×35.6cm ⓒ간송미술관
난히 소화하고 있다. 특히 붉은색 홍포(紅袍)는 별 감만이 입을 수 있었던 옷으로 화려하고 당당한 모 습 덕에 어디에 있든지 그들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별감은 소위 ‘기부(妓夫)’가 되어 기생 의 뒷배를 봐주고 기생집을 관리, 운영하던 실세였 으며 조선 후기 한양 유흥가의 주역이었다.
시대를 뛰어넘어 꾸준히 사랑받는 명작에는 당대를 관통했던 사회의 변화를 읽어내고 해석하는 작가만 의 독창적인시선이 담겨 있다. 혜원 신윤복은 조선시
대 어느 화가보다색과 선을 사용하는 데 탁월했다. 그가 선택한 선명한 천연색과 속도감 강한 날렵한 선 묘(線描) 덕에 자칫하면 조잡하고 유치하게 표현될
수도 있는 다양한 욕망의 민낯도 해학과 풍자라는 묘 수로 포장되어 세련미가 넘치게 되었다. 한양 멋쟁이 의 삶과 욕망을 상징과 기호로 담아낸 혜원이 없었다 면 알지 못했을 조선 뒷골목의 생생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의 공간으로 전달되던 여성문화가 이제는 아래에서 위로 전해지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장안에서 이름
을 날리던 기생들이 있었다. 그들이 조선의 유행을 주도하는 패션 리더이자 ‘셀럽’의 위치에 오른 것이 다.
사회 변화를 읽어내고 해석하는 패셔니스트들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에는 조선의 여성 패션계를 이 끌던 기생 외에도 유행을 선도하던 조선 남성들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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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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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체(加髢), 조선 여성들의 필수 아이템!
가체(加髢)는 그 연원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수식(首飾)이다.
조선 후기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 때 가발을 만들어 머리에 둘렀다”라는 기록이 있는 반면에
『실록』에는 고려 때 몽골에서 넘어온 풍습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하간 우리가 머리에 신경 쓴 것은 정말 오래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글. 강문종(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조선잡사』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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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의 절정, 가체
1502년 1월 14일. 연산군은 신하들에게 어떤 지시를 내렸다. 그는 보염서(補艶署)를 설치해 의류와 메이
크업 그리고 화장품 등을 전담하도록 할 만큼 왕실 여성들의 패션에 집착한 군주였다.
“공주의 혼례에 가체(加㪂) 150개를 써야 할 것 같
소. 그러니 각 고을에서는 반드시 2월 그믐날까지 이 를 바치게 하라!”
- 『연산군일기』 1502년 1월 14일 기록 그는 사랑하는 공주의 혼례식에 사용하기 위해 가체 를 150개나 주문했다. 추상같은 왕명이었으니 그대 로 실행되었을 것이다. 높이 20~30㎝, 뭉게구름 모 2
1. 신윤복 필 《여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2. 순정효황후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3, 4 . 가체는 장식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양의 윤기나는 가체를 올린 여성 150여 명이 혼례식
장에 가득 모여 있는 장면. 쉽게 그 이미지가 떠오르 지 않는다면 18세기에 그려진 〈미인도〉를 비롯한
신윤복의 풍속화 속에서 풍성한 가체를 얹은 여성들 을 떠올려 보면 그 이미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그렇다. 조선 여성들은 화려했다. 뛰어난 염색 기술 을 동원해 명나라에서도 감탄했던 화려한 색감의 비 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매분구(賣粉嫗) 혹은
상설 매장인 분전(粉廛)에서 화장품을 사 하얗고 뽀
얀 얼굴을 만들었다. 그리고 화려한 비녀와 함께 머 리 위에는 풍성한 가체를 얹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가체를 만들 머리카락이 부족 했다. 성리학적 이데올로기 중에 가장 강력한 이념
은 효(孝)였다. 귀를 뚫는 것도, 머리카락을 자르는 3
것도 모두 부모가 물려준 신체를 훼손하는 것이었
고 불효로 인식하는 시대였다. 인조 모발도 없던 조 선시대에 가체를 제작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어떻게
확보했을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스님과
비구니 등 출가하는 남녀의 머리카락이다. 그다음은 바로 죄수들의 머리카락이다. 그 밖에 의외의 상황 에서 머리카락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바로 남성들이
상투를 틀기 시작할 때이다. 상투를 맵시 있게 틀기
위해서는 정수리 주변의 머리카락을 깎아야만 했다. 남성의 헤어스타일 완성을 위해 자른 머리카락이 여 4
성의 헤어스타일 완성을 위해 쓰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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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기술 지녔던 가체장
다양한 사람에게서 확보한 머리카락은 색깔과 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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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질(직모, 곱슬머리 등)이 너무도 다양했고 차이가 심
했다. 이를 균질하도록 하기 위해 화학약품을 만들고, 그 안에 다양하게 수집한 머리카락을 담갔다. 씻고 탈 색한 후 곱게 펴 염색을 준비했다. 검은색으로 균질하 게 칠한 후 짧은 머리카락은 촛농으로 붙였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정밀한 작업이었다. 이렇게 기초 작업
을 마무리하고 가지런하게 빗은 다음, 머리 타래를 만 들고 윤기나는 광택을 입히면 가체 머리가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용도에 맞게 모양을 만들게 되는데 이 지점 에서 가체장의 미감이 드러난다. 아름다운 가체를 제작 했던 이들은 조선시대의 헤어디자이너였던 셈이다.
가체는 그 재료를 구하기도 힘들고, 만들려면 뛰어난 기술도 필요했다. 그런데도 수요는 넘쳐났다. 높이와
크기에 더해 각종 장신구로 아름다움을 과시하게 되 면서 가체는 점점 더 풍성해지고 커졌다. 5. 드라마
스틸컷 ⒸMBC 6. 신윤복 필 《여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웅황(雄黃)으로 만든 판
(版)과 법랑(法琅)으로 만든 비녀·진주 장식 등으로 꾸며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 정도”라고 가체를 설 명했다. 또한 그가 남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에는 당시 어느 부자집의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방으 로 들어오는 바람에 급하게 일어서다가 가체에 눌려 목뼈가 부러져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의 나이는 고 작 13세였다.
이처럼 커지고 화려해진 가체는 장신구를 포함한 가
격이 무려 7만~8만 전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만 전이면 곧 700냥이란 말이다. 18세기 후반 서울에
서 11칸 초가집이 110냥이었다고 하니 가체 하나의 가격이 비쌀 경우 초가집 6~7채에 해당한 셈이다. 실 로 엄청난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사치품이지만 유통은 활발
가체는 주로 체괄전(髢髺廛)에서 판매되었다. 이는
다양한 가체를 구비한 상설 전문 매장이었다. 여쾌(女 儈)로 불렸던 중매쟁이나 수모(首母)들이 직접 들고
다니며 방문 판매를 하기도 하였다. 고가품이라 대여 해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조선시대 혼례를 주관했던
수모는 신부를 위해 머리 타래를 틀고 비녀를 꽃아 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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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모양을 완성하기도 하고,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가 체를 대신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름답게 꾸미고
자 하는 욕망에 더해 집안의 가장들이 이러한 가체머
리 사용을 금지하지 않아 유통이 활발했으며, 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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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체는 사회적 문제 즉, 사치풍조의 원흉으로 지목되 기에 이르렀다.
어느새 가체는 검소한 미풍양속을 해치는 사치의 상 징이 되었다. 결국 영조대에서 규제가 시작되었다. 사
대부가의 사치가 날로 성행하고 부인들이 한 번 가체
를 마련하는 데 몇 백 금을 쓰며, 갈수록 서로 자랑하 며 높고 큰 가체를 숭상하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러한 현상을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했던 영조 는 1756년 1월 16일,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를 대신 사용하라는 영을 내렸다. 그러나 영조의 노력에도 불 구하고 가체의 유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영
7. 『가체신금사목』 1788년 여인들의 가체를 금할 것을 규정한 법제서다. Ⓒ국립민속박물관 8. 보물 정조 어찰첩 중 하권 7~8면. 박준원에게 보낸 편지 로 마지막 부분에 ‘가 체의 금지’에 관한 이 야기가 나온다. Ⓒ국립고궁박물관
조 자신도 본인이 가체금지령을 내린 지 3년이 지난
1759년 정순왕후와 혼례를 치르면서 가체를 제작해 사용했다. 결국 가체를 금지한 후 52년이 지난 1788 년 정조가 “부녀자의 복식은 정치와 무관한 것이라 말
하지 말라!” 하며 그 유명한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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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目)’을 정해 다시 한번 가체금지령을 내리기에 이른 다. 실로 강력한 조치였다.
막을 수 없는 머리 꾸미기의 진화
1788년 정조의 가체금지령 이후 실제로 가체 사용이 완전히 사라졌을까? 글쎄, 다소 줄어든 것으로 보이기
는 한다. 1794년 정조는 가체금지령 시행의 중간 점검 을 한다.
“…… 가체를 금지한 것은 또한 요즘 어떠한가?”
틀고 점점 높게 올렸던 것이다. 보수적인 남성 지식인
“머리를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은 비록 예
지만 정조는 자율적 규제를 선택했다. 그리고 관료들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었다.
전의 것을 답습하지 않으나, 뒷머리의 경우에는 점
점 높고 커지고 있으니 엄하게 법조문을 세워 정해
진 규격을 넘는 것을 금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 『정조실록』 29권, 정조 14년 2월 19일 경오 8번 째 기사
강력한 규제로 분명 과하고 사치스러웠던 가체의 유 행은 어느 정도 잡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머리를 아 름답게 꾸미려는 여성들의 욕망은 멈추지 않았다. 급
격한 헤어스타일 유행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1790년 대 여성들은 더는 풍성한 가체를 고집하지 않았다. 그 대신 뒷머리를 꾸미기 시작했다. 가체와 같은 소품을
사용하는 대신 자신의 뒷머리를 활용해 크게 타래를
들은 이 마저도 눈에 거슬렸던지 규제할 것을 제안했 이 먼저 각자의 집안에서 솔선수범한다면 모든 백성 이 따르게 될 것이라고 하며 이 논의를 마무리했다.
가체는 조선시대 여성의 복식이자 여성 패션과 정치 의 결합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삼국사기』에 따 르면 신라시대부터 여성들은 머리 장식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가체는 우리 역사의 전 시대에 걸쳐 여성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었던
소품의 정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로는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고 정부의 강력한 규제로 통제되기 도 했지만 아름다운 머리 모양을 향한 여성들의 마음 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가체에 대한 다양한 담론은 욕
망을 단일한 규제로만 제어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깨 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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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제21호�승전무는�경남�통영�충무�에서�전승되어�온�북춤으로��임진왜란� 당시에는�장수와�병졸들의�노고를�위로하고�사기를�북돋우기�위해�추게�하였으며��전쟁에서이긴�
후에는�축하의�의미로�추게�하였다��전체가�화려하고�웅장하면서�경쾌한�것이�특징이다�� 승전무는�의상이나�사용되는�도구��춤의�내용등이�궁중무고와�흡사한�춤으로��우아한�춤사위와� 가락�그리고�치밀한�짜임새는�예술적�가치가�높고�전통성을�담고�있는�우수한�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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