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을 볼 때 Flipbook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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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RESAS HEADHUNTERS CHILE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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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Transcript

머릿속이 소음으로 가득한 채로 살아 본 모든 분에게 나에게 첫 이야기들을 들려준 데이비드 존스를 기리며

WHEN I SEE BLUE First published in Great Britain in 2022 by Hodder & Stoughton Text copyright © Lily Bailey, 2022 Children’s OCI assessment (page 150 ~152) © Professor Paul Salkovskis The moral right of the author has been asserted. All characters and events in this publication, other than those clearly in the public domain, are fictitious and any resemblance to real persons, living or dead, is purely coincidental.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3 by Hanbit Media Inc.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HACHETTE CHILDREN’S BOOKS through EYA Co., Ltd 이 책은 EYA Co., Ltd를 통해 HACHETTE CHILDREN’S BOOKS와의 독점계약으로 한빛미디어㈜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릴리 베일리 지음 천미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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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힐타운 중학교는 어딜 봐도 학교 같지 않았다. “다 왔네. 저 빨 간색 문만 지나가면 돼.” 하는 엄마 말을 듣고서야 학교라는 걸 알았다. ◆

전에 다니던 학교는 빅토리아 시대 *에 지어져서 온통 벽돌 건 물인 데다 뾰족탑도 있었고, 창문도 긴 아치형이었다. 심지어 그 때는 남녀가 같은 문을 쓸 수 없던 시대여서 출입문도 따로 였 다. 그에 비하면 이 학교는 한 동짜리 아파트 같았다. 아이들이 떼를 지어 빨간색 문 쪽으로 우르르 걸어갔다. 다들 왁자지껄 수다 삼매경이었다. * 1837년부터 1901년까지 빅토리아 여왕이 다스리던 시대로, 영국 역사상 가장 번영했 다. 이 시대 영국은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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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넌지시 말했다. “아들! 너하고 친구가 될 애들일지도 모르잖아. 가서 말 좀 걸 어 봐.” 그 순간 나는 피 칠갑을 하고 바닷속에 들어가 상어들과 헤엄 을 쳐 보라는 말을 듣기라도 한 얼굴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카일 형 말대로 엄마가 진짜 제정신이 맞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너나없이 반짝거리는 열쇠고리가 달린 가방을 멨지만 내 가 방에는 열쇠고리가 하나도 없다. 내 가방은 파란색 타디스 모양 배낭이다(유일하게 괜찮은 파란색). 타디스TARDIS는 ‘시간과 공간 의 상대적인 차원time

and relative dimensions in space’의

줄임말로 닥

터가 시공을 뚫고 이동할 때 타고 다니는 우주선이다. 닥터는 내 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티브이 드라마 시리즈인 「닥터 후」 의 주인공이다. 평범한 인간처럼 생겼지만 사실 다른 행성에서 온 타임로드 종족 외계인인데, 심장이 두 개고 수백 년을 산다. 닥터는 타디스를 타고 다니며 은하계 곳곳의 문제를 해결한다. 괴물을 물리치고, 전쟁을 막고, 완벽한 타이밍에 세상을 구한다. 닥터가 타디스를 장식한 걸 알면 질색할 게 뻔하다. 그래서 난 타디스 가방에 아무것도 달지 않고 깔끔하게 메고 다닌다. “넌 잘할 거야. 가, 어서.” 엄마의 말에 생각이 끊겼다. 발로 땅을 네 번 쳤다. 4는 나한테 특별한 숫자이자 나를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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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게 지켜 주는 숫자다. 우리 식구는 네 명이고 나는 8월생이 다. 8월생이라서 나쁜 점은 9월에 시작하는 새 학년마다 내가 가 장 어린 편이라는 거다. 그래서 죄다 나를 꼬맹이 취급한다. 대신 8월생이라서 완전 좋은 점은 8월은 여덟 번째 달이고, 내 생일은 8월 2일이라는 사실이다. 8(월)을 2(일)로 나누면 다시 4가 된다. 이것만 봐도 나한테 4가 특별한 숫자라는 게 확실하다. 4를 떠올리면 숫자 왼쪽에 생긴 삼각형 안에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당기고 앉은 내가 보인다. 4가 만들어 낸 비스듬한 왼쪽 면 은 머리 위로 내려와 아늑한 지붕이 되어 준다. 언제부터 4가 나의 숫자가 되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아주 옛날부터 알았던 것 같달까. 네발로 기어다니던 때가 지금도 기 억난다. 엄마 아빠는 자주 나를 번쩍 들어서 안고 다녔다. 아마도 엉금엉금 기어가는 날 기다리느니 안고 가는 쪽이 쉬웠던 것 같 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울면서 떼를 썼는데, 우리 가족의 안전을 지 키기 위해서는 내가 꼭 네발로 기어야 한다는 걸 두 분이 알 리가 없었다. 결국 엄마 아빠는 나를 안는 걸 포기했다. 내가 울고불고 발광 을 해서였을 거다. 아니면 내 몸이 너무 커져서 그랬나. 네 번씩 하는 것 중에 가장 어려운 건 걷기다. 네 걸음씩 세면 서 걷는데 보폭도 똑같은 게 좋다. 가끔은 보폭이 같았었나 긴가 민가 싶을 때도 있고, 혹은 그냥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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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생긴다. 그럴 땐 시작했던 지점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걸어 야 한다. 도로 옆을 걸을 땐 자동차 바퀴가 네 개라서 좋다. 하지만 자 전거나 오토바이, 아니면 바퀴가 여섯 개 달린 대형 화물 트럭을 보면 자동차 네 대를 더 세어야지 마음이 놓인다. 그래도 개운하 지가 않으면 다시 4를 곱해 열여섯 대를 세고, 그래도 소용이 없 으면 16에 4를 곱해 예순네 대를 세고,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면 64에 또 4를 곱해 다시 이백쉰여섯 대를 센다. 때때로 전에 살던 에식스에서는 자동차 이백쉰여섯 대를 찾 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런던으로 이사 온 건 잘한 일인 것 같다. 물론 전학을 가야 하고 뭐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도 모르는 것처 럼 무서운 일투성이라는 게 문제긴 하지만. 엄마가 날 안아 주고 가려고 팔을 뻗었다. 다른 애들이 보면 어린애 취급을 할까 봐 엄마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정문을 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냥 마법의 말만 해 주고 가면 안 돼요?”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커피와 티를 마셔야지요.” 엄마가 속삭여 준 마법의 말은 기역에서 히읗까지 자음 14개 ◆

가 모두 들어간 팬그램* 이다. 이런 문장은 세상의 좋은 점을 빠

* 영어로는 알파벳 26글자, 한글에서는 모든 자음이나 모음이 포함된 문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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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없이 담고 있어서, 소리 내어 말하면 행운을 불러온다. 네 번에 맞춰 달라는 내 부탁에 엄마는 똑같은 말을 세 번 더 해 주었다. 그런 다음 내 어깨를 꽉 쥐고 말했다. “어서 가, 베니. 사랑해. 넌 잘할 거야.” 내 이름은 벤자민이지만 우리 가족은 베니라고 부른다. 하지 만 나는 벤이라고 불러 주는 게 좋다. 빨간색 문으로 향하며 생 각했다. 빨간색은 분노의 색이니까 이제부터는 학교로 들어갈 때마다 나 때문에 엄마 아빠가 또 싸우는 건 아닌지 걱정할 일만 남았다고. 오늘이 새 학년 첫날이다 보니, 학교 벽에는 방향을 알려 주는 화살표가 그려진 종이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엄마한테 8A반 이라고 들어서 8A라고 적힌 종이를 따라 4층(좋은 징조)으로 올 라갔다. 교실로 들어가려는데, 교실이 네모난 모양이 아니라 육 각형(나쁜 징조)이었다. 교실 앞에서 종이 출석부를 든 남자 선 생님이 8A반 담임 몬터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아무 데나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아!” 지정석이 없다는 게 좋은 일이라는 듯 선생님이 활짝 웃었다. 인기 없는 학생한테는 사실상 대재앙이다. 앞쪽 창가에 빈자리 두 개가 보여서 재빨리 그쪽으로 움직였 다. 다른 아이들은 둘씩 짝을 지어 앉아 다리를 흔들면서 여름 방학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나는 책상에 눈을 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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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채 책상 네 귀퉁이를 눈으로 셌다. 이 학교에서는 투명 인간 이 되기로 마음을 정했다. 에식스에서는 너무 튀었다. 여기서 투 명 인간이 되려면 나를 새로 만들어야만 한다. 일종의 닥터처럼. 닥터는 우리랑 달리 죽지 않는다. 죽음에 한없이 가까워지면 다 른 몸으로 재생되는데, 새로운 닥터는 좋아하는 음식도 달라지 고, 재생 직전의 닥터보다 조금 더 바보 같아지기도 더 괴팍해지 기도 한다. 나는 타임로드가 아니라서 재생은 불가능하지만 비슷한 시도 를 해 볼 수는 있다. 내가 만든 규칙은 이렇다. 몸으로 무언가를 두드리거나 걷는 행동을 반복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라도 머릿 속으로나 눈으로만 한다. 아무한테도 말을 걸지 않고 수업 중에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정말 운이 좋다면, 내가 있다는 걸 아무 도 모를 수 있다. 몬터규 선생님이 짝짝 손뼉을 치며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출석을 부르는 선생님을 따라 모두 몇 명인지를 셌다. 다 해서 서른셋. 4로 나뉘지 않는 수다(지극히 나쁜 징조). 이어서 선생님 은 우리 모두를 환영한다며 새롭게 생긴 방과 후 동아리에다 핼 러윈 디스코의 날까지 이번 학기에 기대해도 좋을 일들이 많다 는 소식을 전했다. 선생님은 말을 계속 이었다. “우리 반에 전학생 세 명이 왔어요. 여러분, 작년에 처음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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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을 때 기억하죠? 아니면 모르는 곳에 처음 갔을 때를 떠올려 봅시다. 인사를 건네고 친절을 베푸는 데는 단 1초면 된답니다. 자, 그럼 새로 온 친구들, 괜찮다면 서로 알아 갈 수 있도록 자리 에서 일어나 이름을 말해 줄래요?” 교실을 둘러보니 여자애 둘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둘은 지아와 레이철이라고 짧게 이름을 말한 뒤 다시 자리에 앉 았다. 반 아이들이 두리번거리며 세 번째 전학생을 찾는 게 느껴 졌지만, 나는 괜찮으면 일어나라고 했던 선생님 말씀에 감사하 며 내 책상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어서 몬터규 선생님이 수학, 영어, 과학은 자신이 직접 가르 치고, 지리, 불어, 종교, 역사, 체육과 연극은 담당 선생님이 따로 있다고 말했다. “1교시는 수학입니다. 오늘 대수학 배운다고 너무 좋아하지는 말고요!”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근처에서 두세 자리 쯤 떨어진 곳에 앉은, 교칙에 완전 어긋나 보이는 끈 달린 가죽 부츠를 신은 여자애는 내가 아는 욕 중에서 가장 심한 욕을 중얼 거렸다. 나는 대수학이 좋지만 굳이 티 낼 마음은 없었다. 죽고 싶어 안달 난 게 아니고서야. 에식스에 있을 때는 교과서에 나온 문제는 이미 다 풀어서 수 학 선생님이 나한테만 따로 대수학 문제지를 주곤 하셨다.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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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무 생각 없이 문제를 풀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별종이 아니다’라는 주장에는 썩 도움이 되지 않았던 듯싶다. 몬터규 선생님이 진짜 사과와 오렌지로 예를 들었을 때는 다 들 대충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런데 선생님이 칠판으로 이동해 사과를 X, 오렌지를 Y로 바꾸어 설명하기 시작하자, 카일 형이 잘하는 말처럼 다들 ‘정신줄 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선생님이 방정식을 설명하며 X를 찾으라고 했다. 두 번째 줄에 앉은 주근 깨투성이의 빨간 머리 남자애가 칠판 위의 X를 손가락으로 가리 키며 말했다. “거기 있잖아요, 선생님.” 다들 킬킬거리며 웃었다. 선생님은 연습 삼아 몇 문제를 더 가르쳐 준 뒤 각자 풀어 보 라며 문제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뒷면은 아직 배우지 않 은 내용이라 지금은 풀지 못할 거라고 했다. 나는 뒷면도 쉽게 풀 수 있었지만, 지금 난 투명 인간이어야 하니까 어떤 식으로든 튀면 안 된다. 그래서 앞면을 다 풀고 뒷면은 머릿속으로만 풀기 로 했다. 선생님이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의 문제지를 확인하다 가 빨간 머리 남자애한테 왜 문제를 풀지 않냐고 물었다. 남자애가 대답했다. “현실 세계에서는 대수학이 필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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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현실 세계’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면 중등 교육 자격 ◆

검정 시험GCSEs 점수가 필요하다면서, 네 말에 모두 동의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선생님 말에 다들 “우우우!” 하며 야유를 보 냈고, 그중엔 “브래애애애들리를 화아아형에 처하라!” 하고 소리 를 지르는 아이까지 있었다. 브래들리는 몬터규 선생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 뒷면까지 암산을 끝내고 교실 모서리를 세기 시작했다. 나는 모서리가 정확히 네 개인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방에 있어야 안심이 된다. 그래야 계속 눈을 굴리며 모서리를 셀 수가 있는 데, 안타깝게도 이 교실은 정사각형도 직사각형도 아닌 육각형 이었다. 모서리 여섯 개를 두 번 세면 12고, 거기에 내 책상 모서 리 네 개를 더하면 16이 된다. 16은 4의 제곱이니 그럭저럭 해결 이 됐다. 눈을 돌리고 돌리기를 107번을 했을 때, 몬터규 선생님이 다 가와 내 문제지를 확인했다.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와, 앞면을 다 풀었네. 끝까지 다 푼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그러고는 내가 쓴 답을 죽 훑어보았다.

* 잉글랜드, 웨일스 및 일부 다른 국가들에서 보통 16세가 된 학생들이 치는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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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다 정답이네! 전에 풀어 본 적 있어?” 선생님은 뛸 듯이 기쁜 얼굴이었다. 결국 눈에 띄고 말았다는 사실에 속이 상했다. 하지만 교실을 둘러보니 막상 우리 쪽을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다들 큰 소리로 떠드느라 선생님이 나한테 수학 천재상을 준다 해도 모를 정도였다. “조금이요.” 내가 조용히 답했다. 선생님은 나더러 뒷면도 풀어 보라면서 내 옆자리에 앉아 푸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 며 아는 걸 모르는 척하는 것도 과연 나쁜 거짓말일까, 하고 생 각했다.

점심시간은 12시 반이었고, 학교 식당은 1층에 있었다. 엄청 나게 큰 식당은 한쪽 벽이 빨간색이었고 나머지 세 군데는 하얀 색이었다. 플라스틱 느낌이 나는 파란색 바닥에는 광물 내부처 럼 반짝이는 보라색 반점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긴 합판 식탁 은 모두 여든여섯 개였고, 식당 안은 학생들로 시끌벅적했다. 뒤쪽 식탁 중 하나에서 카일 형을 발견했는데, 한눈에 봐도 인 기가 많은 남녀 학생들 틈에 앉아 있었다. 형은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은 여학생한테 휴대 전화로 무언가를 보여 주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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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지는 몰라도 여학생은 그걸 보며 깔깔거렸다. 순간 뭐랄까…… 나로선 충격 그 자체였다. 전학 온 지 이제 겨우 반나절밖에 안 됐는데 벌써 새 친구들한테 둘러싸인 형이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놀랄 일이 아니었다. 형은 ‘적응력’ 하나는 최강이니까. 엄마는 형이 진공 상태에서도 친구 를 사귈 사람이라고 했다. 반대로 나는 친구 만들기 모임에 나가 서도 친구를 못 사귈 사람이다. 형은 나를 모르는 척하는 데도 최강이다. 오늘 아침 형은 엄마 와 나더러 먼저 나가라고, 자기는 10분 뒤에 따로 나와 학교까지 혼자 가겠다고 우겼다. 그러고는 나한테 학교에서 절대, 무슨 일 이 있어도 결단코 자기한테 접근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그래 서 나는 고개를 돌리고 형을 못 본 척했다. 식당 안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점심 주문을 하려면, 줄을 섰다 가 차례가 돌아왔을 때 배식 아줌마한테 고함에 가깝게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나는 맨 뒤에 줄을 섰다. 식판이 빨간색이라 가져가기가 싫었다. 빨간색은 피의 색이라 분노를 뜻하기도 하고, 해를 입힌다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내가 빨간색 물건을 사용하면 사랑하는 누군가한테 끔찍한 사고가 날 수도 있고, 까딱하면 그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나는 그냥 배식 아줌마가 주는 접시만 들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배식대로 가자 아줌마는 건강과 안전을 이유로 들더니 식판은 필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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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나는 적응을 위한 나만의 규칙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 고 배식대 앞을 나와 식판을 챙겨서 다시 줄 맨 끝에 섰다. 그나마 식당이 직사각형이라 다행이었다. 머릿속으로 직사각 형이라는 낱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지만, 곧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고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귀에까지 울렸다. 손이 축 축해지기 시작했다. 남의 눈에 띌까 봐 걱정이 됐다. 슬며시 아 래를 내려다보았다. 빨간색 플라스틱 식판은 내 손가락과 손바 닥에서 배어난 땀으로 얼룩투성이였다. ‘직사각형, 직사각형, 직사각형, 직사각형.’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뭐 줄까?” 누군가 나한테 물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줄 맨 앞에 다다라 아까 그 배식 아줌마 앞에 다시 서 있었다. ◆

“소시지 하나, 으깬 감자, 콩, 요크셔푸딩 * 하나요.” “크게 말해 줄래?”

“소시지 하나, 으깬 감자, 콩, 요크셔푸딩 하나!” “으깬 감자와 요크셔푸딩은 둘 중 하나만이야.” 젠장. 식판에 세 가지만 올리기는 싫은데. 다시 내 규칙을 떠 올렸다. 완전하게 하려면 네 가지 음식이 필요하지만, 그걸 대신

* 밀가루에 우유와 달걀을 넣어 만든 반죽을 부풀어 오를 때까지 구운 영국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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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방법을 재빨리 생각해 냈다.

“그럼 소시지 두 개, 콩과 으깬 감자요.” 아줌마는 고개를 까딱하고 음식을 퍼서 내 접시에 올렸다. 소 시지 하나는 끝이 으깬 감자와 맞닿은 데다 콩 몇 개는 사실상 으깬 감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소시지를 세 개나 줘서 이제 내 접시에는 다섯 가지 음식이 놓여 있다는 사실 이었다. 에식스 학교에서는 배식해 주는 분들이 무조건 네 가지 만 받고 음식끼리 서로 닿으면 안 된다는 내 규칙을 다 알고 있 었다. 첫 급식 시간에 엄마가 편지를 써서 나만의 방식이 있다고 미리 설명해 준 덕분이었다. 이번에는 배식 아줌마가 소스를 한 국자 떠서 내 접시 위에 와르르 부으려고 했다.

“안 돼요!” 내가 소리쳤다. 배식 아줌마는 한쪽 눈을 치뜨고 잠시 동작을 멈추더니 그대로 접시를 건넸다. 접시를 받아 식판에 올렸다. 식당 뒤편 오른쪽 모서리에 놓인 긴 식탁 끝부분에 비어 있 는 네 자리가 보였다. 그 자리로 가려면 카일 형 앞을 지나야 했 다. 아무리 똥멍청이 형이라 해도 지금은 제발 공황 상태인 나를 알아채고, 이 음식을 어쩌면 좋을지 나 좀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 이 간절했다. 형을 계속 쳐다보면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알 아챌 테고 그래서 형이 제 발로 온다면, 내가 형한테 접근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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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부디부디 나 좀 봐 주길 바라며 형을 뚫 어져라 쳐다보았다. 결국 형이 알아채긴 했지만, 형은 나를 빤히 보며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 미묘해서 정말 머리를 움직이 기는 한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형은 아까 그 여 학생한테 무슨 말을 건넸는지, 여학생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하는 수 없이 식판을 움켜쥐고 네 자리가 빈 식탁을 향해 계속 걸었다. 나는 벽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접시를 내려다보았 다. 핏빛 식판에는 다섯 가지 음식이 올려진 접시로도 모자라, 접 시 한쪽에는 국자에서 떨어진 소스 두 방울까지 묻어 있었다. 콩을 한 개씩 세어 보면 어떨까. 콩을 하나하나 세어서 더한 뒤, 으깬 감자를 하나로, 소시지를 세 개로, 소스 방울을 두 개로 쳐서 다 합치면, 접시에 있는 음식이 4의 배수가 될 확률은 4분 의 1이다. 밑져야 본전이다. 먼저 나는 음식들이 서로 닿지 않게 따로따로 떼어 냈다. 그런 다음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콩은 하나씩 세기가 너무 힘들었다. 어떤 콩을 세고 어떤 콩을 안 셌는지 자꾸 헷갈렸다. 심지어 콩들은 서로 떼어 놓아도 결국 굴러가서 다시 한 덩어리가 됐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 만약 내가 이걸 먹었다간 엄마랑 산책을 나간 범블이 차에 치이고 말 거다. 피를 흘리며 미동도 없이 누운 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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