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순국 (2023.4) 한국독립운동과 샌프란시스코 (p 42 ~ p 47) (필자: 홍선표 박사,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Flipbook PDF

월간순국 (2023.4) 한국독립운동과 샌프란시스코 (p 42 ~ p 47) (필자: 홍선표 박사,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5 downloads 110 Views 96MB Size

Story Transcript

대 한 민 국 의 얼, 독 립 정 신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순국 특별 초대석

2023년 4월호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관장

2023

4

아름다운 사람들 통권 제387호

이달의 순국선열  |  김동삼 선생 · 송병조 선생 향기나는  삶  이야기  |  이호용 한양대학교 정책과학대학 학장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  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난 독립유공자들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 기행  |  만주 · 연해주 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②

값 8,500원 9 771599 906004

ISSN 1599-9068

Vol. 387

03

대구시 두류공원 이상화 동상과 시비

국유단 누리집

12

식지않는 열정으로 든든한 동반자가 되겠습니다 태신미디어는 30년 전통의 풍부한 경험과 최신 설비를 바탕으로 편집 디자인은 물론 제작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식지않는 열정과 지속적인 파트너 쉽으로 귀사의 가치와 성과를 더욱 높이기 위한 든든한 동반자가 되겠습니다.

작업의뢰

편집 디자인

교정 및 수정

인쇄

납품

l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로 242 l Tel.02.3662.8200 l [email protected] l www.taeshinmedia.com

이 도서는 국가보훈처가 국민들에게 나라사랑의 정신을 확산하기 위해 무상으로 보급하는 도서입니다. 국가보훈처장

월간

을 웹진(e-book)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www.kyobobook.co.kr(교보문고)

INTRO    순국의 창 애국시 · 어록비 순례

상화(尙火) 이상화 시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개벽(開闢)』1926년 6월호

이상화 시비(독립기념관 경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새겨져 있다.

애국 시 〮 어록비 순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 저항시인

이상화(李相和) 시인 ● ●

1901년 4월 5일 ~ 1943년 4월 25일 건국훈장 애족장

호는 상화(尙火).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15년 서울 중앙학교에 입학하였 다. 재학 중인 1918년에 저 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 래」를 발표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19년 3 · 1 운 동이 일어나자 3월 8일 대구 서문(西門) 밖 시장의 장날을 이용하여 대구공립고등보통 학교에 재학 중이던 백기만 (白基萬) 등과 함께 학생 독 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계성중학교 학생들과의 연락책으

사진 〮 전라남도 광양 매화마을의 봄(한국관광공사 제공)

로 활약하면서 연합시위를 전개하였다. 서문 장날에 모인 1천 여 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주도적 역할 을 담당하였다. 1922년 문예지 『백조』의 동인으로 「말세의 희탄(欷嘆)」, 「단 조(單調)」, 「가을의 풍경」,「나의 침실로」, 「이중의 사망」 등 을 발표했다. 이듬해 일본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고 1924년 귀국하여 『개벽(開闢)』을 중심으로 활발하 게 작품을 발표하였다. 1926년 유명한 저항시 「빼앗긴 들에 도 봄은 오는가」를 『개벽』 6월호에 발표했다. 1927년 의열단 원 이종암의 군자금 모금 활동에 연루되어 경찰에 검거되었다. 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군 고위 장교로 복무중인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 조국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 문제 등 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 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초를 겪은 뒤 석방되었다. 이후 대구 교남학교 교원으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다. 그러나 수 차례 옥살이로 얻은 위병으로 43세 나이로 별세했다.

애국시 · 어록비 순례 - 상화(尙火) 이상화 시비 

 5

Contents



월간 『순국』에 게재된 글들의 내용은 발행처의 공식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아울러 게재된 글을 전재코자 할 때는 발행처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2023년 4월호 (통권 제387호)

Intro l 순국의 창

4

애국 시 · 어록비 순례 · 상화 이상화 시인

Column l 작은 소리 큰 울림

8

편집위원 컬럼 ·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김중위(월간 『순국』 편집 고문)

순국 특별 초대석

10

한국독립운

Special Theme

동은 국내는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물론, 중국 · 일 본 · 러시아 · 미 주 · 유럽지역 등 세계 곳 곳에서 광범 위하게 전개 되었다. 이에 대표적 국제도시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주 요 거점으로 알려진 베이징 · 상하이, 도쿄 · 블라디보스토 크 ·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활약한 주요 인물과 단체, 사 건 등을 살펴보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이들 도시들은 재 외 한인사회와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 을 수행하였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관장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20

Theme ➊ 한국독립운동과 베이징, 상하이 손염홍(건국대 교수)

27

Theme ➋ 한국독립운동과 도쿄 윤소영(국가보훈처 연구원)

35

Theme ➌ 한국독립운동과 블라디보스토크 주미희(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42

Theme ➍ 한국독립운동과 샌프란시스코 홍선표(나라역사연구소 소장)



순국 People | 아름다운사람들

48 56 64 68 76 78

이달의 순국선열 · 김동삼 선생 · 송병조 선생



이윤옥(한일어울림문화연구소장)

향기나는 삶 이야기 · 이호용 한양대학교 정책과학대학 학장 특별 인터뷰 · 김영조 순국선열유족회 사무총장 4월의 독립운동가 · 이희경 · 나용균 · 황기환 지사 이달의 6·25 전쟁영웅 · 대한민국 해군 PT 편대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핏덩이 안고 한국광복군으로 뛴 “유순희”

대한민국의 얼, 독립정신

순국 Focus | 역사의 시선으로

82

순국스크랩 · 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난 독립유공자들



김학규(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88

순국시론 · 동산 류인식의 삶과 교육구국운동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92

한번 더 생각하는 역사 · 신채호와 그람시를 연결한 첫 시도



김학준(단국대 석좌교수)

96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②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102 3월의 전설(90회) · 함경북도 성진의 만세시위(1)

이정은(3 · 1운동기념사업회장)

순국 Inside | 길 따라 얼 따라

106 순국 역사기행 · 만주 · 연해주 독립운동, 그 현장을 가다 ②

이원규(소설가)

111 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 대구 근대문화골목 116 자랑스러운 우리 것들 · 북간도 명동촌 막새기와

김시덕(을지대학교 교수)

122 우리문화 사랑방 · 우리 전통차, 차에 관한 올바른 상식

김영조(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27 순국선열, 지하에서 울리는 소리 ⓭ · 이시영 지사

이오장(한국문인협회 이사, 시인)

순국 Network | 함께 해요, 나라사랑

128 순국선열 Photo News · ‘도산 안창호선생 서거 85주기 추념식’ 외 132 문화로 만나는 세상 · 4월에 주목되는 전시 외 표지설명 · 대구시 두류공원 이상화 동상과 시비 대구광역시 달서구 두류공원 인물동산에는 민족시인 이상화 동상과 시비 가 세워져 있다. 이 시비에는 유명한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일 부 내용이 새겨져 있다. 동상과 시비는 1995년 8월 15일 이상화를 기리기 위하여 한국예술인총연합회(한국예총) 대구시지회와 KBS 대구방송총국 이 광복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것이다. 대구에는 이곳 외에도 달성공원에 이상화 시비가 있고, 수성공원 안의 상화동산에도 이상화 흉상 과 시비가 세워져 있다. 또 달서구에 ‘상화로’ 길도 있다. ■ 

03

값 8,500원

9 771599 906004

ISSN 1599-9068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순국 특별 초대석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관장

2023

4

아름다운 사람들 통권 제387호

이달의 순국선열 | 김동삼 선생·송병조 선생 향기나는 삶 이야기 | 이호용 한양대학교 정책과학대학 학장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 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난 독립유공자들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 기행 | 만주·연해주 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②

Vol. 387

제자(題字) 순국 : 훈민정음 해례본 집자  순국 : 일중 김충현

SPECIAL THEME

2023년 4월호

■ 

대 한 민 국 의 얼, 독 립 정 신

대구시 두류공원 이상화 동상과 시비

Column    편집위원 컬럼 작은 소리 큰 울림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양심있는 일본인들도 적지 않아 정부가 과거 일제 만행 관계 자료 수집 등에 적극 나서야 글ㅣ김중위(월간 『순국』 편집 고문)

인류 역사에서 볼 때,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

감하면서도 겁쟁이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이

문(1517)」,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인권선언(1789)

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에 대한 남들의 평가에 대

제2차 세계대전(아시아태평양전쟁)을 통해 만난

해서는 민감하면서도 남들이 보지 않는 데에서는

일본을 미국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피차간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의 전쟁양식이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 본

“용서할 수 있을 듯한 어떤 행위에 대해서는 맹렬

토에까지 진격해야 하는지 천황의 궁성을 폭파해

히 비난하고 위법으로 보이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

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도 명확하게 할 수 없

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감아버리는 태도에 대해 끝

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미국정부에서는 일본민족

없는 의문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나 많은 다른

은 어떤 민족인가를 알기 위해 1944년 6월, 미국

동양인과는 달리 놀랄만큼 솔직하게 자기자신을

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에게

고스란히 그대로 드러내어 기록해두는 강한 충동

연구를 의뢰하였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책이 이제

을 지니고 있는 종족이라고 설명해주고 있다(김윤

는 고전이 되어버린 『국화와 칼 - 일본문화의 틀』

식·오인석 역, 을유문화사).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Patterns of Japanese Culture)이다.

8   

“국화와 칼”을 함께 지니고 있는 일본을 이같이 이해하면서 과거 일본의 아베정권이 벌였던 정치

이 책에서 베네딕트 여사는 일본인들이 갖는 사

행태를 보면 사뭇 흥미진진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고의 모순구조가 날줄(經)과 씨줄(緯)로 엮어져 있

같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그의 발언들은 모두가

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

일본인들이 그동안 기록해 놓은 증거들로 인해 거

본인들은 최고로 공격적이면서도 평화적이며, 군

짓으로 판명되고 있기에 말이다.

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

얼마 전 필자는 수필가 정명숙 선생으로부터 일

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뛰어나며, 유순한

본의 베스트 셀러 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

듯하면서도 사납고, 성실하면서도 불성실하고, 용

之, 1930~1975)가 1962년 한국을 주제로 한 작품

  2023년  4월

을 문제삼아 맹비난하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됩 니다. 나는 일본과 한국이 새로운 우정으로 맺어지 기 위해서는 우선 지은 죄를 충분히 사죄하고 새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성의 자료로서 이상의 사람들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 다. 작품 발표는 르포르타쥬, 소설 두 개의 형식으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한국(조선) · 한국인(조선인)을 소재로 한 작품 「족보」 · 「이조잔영」(일본 이와나미 현대문고). 오른 쪽은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그의 작품집(김영식 번역), 『경성 이여, 안녕 - 일본 작가가 본 식민지 조선의 풍경』(리가서재, 2021). 「이조잔영」, 「족보」등 9편의 소설 모음집이다. 가지 야마는 서울 출생으로 1945년 8월 일본 패망 직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기업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이 높았고, 다작으로 유명했다.

로 『문예춘추(文藝春秋)』에 게재할 예정입니다(하 략). 1962년 가지야마 도시유키 배상” 가지야마의 편지를 소개하는 이유는 세가지다. 하나는 구 아베정권처럼 어떤 변명으로 역사를 왜

을 쓰기 위해 『사상계』 장준하 사장에게 보내온 서

곡시키더라도 영원히 역사를 지울 수는 없다는 점

신을 보여주기에 읽어본 적이 있다. 그 내용은 이

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두 번째는 가지야마처럼 양

러하였다.

심이 살아 있는 일본인은 의외로 많다는 점을 지적

“장준하 선생! 제가 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자 료입니다.

하고 싶어서다. 세 번째로는 일본사람들이 자신들 을 위해서 기록해 놓은 것이라 하더라도 이를 낱

① 창씨개명정책 때문에 자살한 설진영 가족이

낱이 끌어 모아 우리의 자료로 삼자는 것이다. 다

나 그 지인들. ② 3 · 1운동시 일본유학생으로 독립

시 말하면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시대의 악행을 하

운동을 계속한 사람(최팔룡같은 사람). ③ 3 · 1운동

나도 남김없이 주워 모아 집대성해 놓자는 얘기다.

때 제암리 사건으로 학살된 걸 목격한 자나 그 연

학자 개인에게만 맡겨 놓을 일이 아니다. 정부가

구자. ④ 강제동원으로 징병훈련소에 간사람, 돌

나서야 한다.

아 온 사람, 도망자등. ⑤ 해방 후 한국에 귀화한 일 본인 부인들과의 만남이나 좌담 희망. ⑥ 김광식과 같은 한국작가와의 만남. ⑦ 전쟁중 일본인 중학교 에서 공부하고 현재도 활약하고 있는 30대의 저 널리스트. 이런 자료들을 제가 원합니다. 조선을 식민지로 했던 시대에 저지른 죄상을 파헤쳐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과거의 죄를 모른 체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지금 한국의 이승만 라인

필자  김중위 경북 봉화 출생.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대구대학교 에서 명예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상계』 편집장, 4선 국회의원, 초대 환 경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정치와 반정치』, 『눈총도 총이다』, 『노 래로 듣는 한국근대사』 등 다수가 있다.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국제 PEN클 럽 고문, 한국시조협회 고문 등과 함께 월간 『헌정』 편집인, 월간 『순국』 편집 고문,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회장 등을 맡으며 칼럼과 수필을 쓰고 있다.

편집의원 컬럼 •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9

순국 특별 초대석    만나고 싶었습니다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관장

10    

  2023년  4월

만나고 싶었습니다ㅣ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관장

개관 1주년, 이제 비로소 기틀 잡아

“헌법가치에 충실한 임시정부 역사와 민주공화 이념 국내외에 널리 선양할 것” 널리 알려진 대한민국임시정부 전문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지난

김희곤(金喜坤) 관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전문가로 인정되고 있다. 그가 관장에 취임하자 학계에서는 할 만한 인물이 되었다고 매우 반기는 분위기였다. 사실 그는 연구 와 강의, 그리고 사회봉사라는 교수의 본분을 그 어느 누구보다 도 충실히 실천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한발 더 나아 가 연구성과를 한국사회의 현실에 반영하고 실천한 실무형 학

2022년 3월 1일 개관했으니, 개관한 지 1년이 지 났다. 또 김희곤 관장이 취임한 지 1주년이 된다. 지난 해 3·1절에 서울 서대문구 옛 서대문구의회 자리에 공식 개관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3 · 1운동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의 독립운동 및 임시정부 활동과 관련한 유물, 사진, 영상 등을 전시하는 곳이다.

자, 또는 연구와 행정실무를 결합한 과거의 사대부(士大夫), 혹

김관장은 경북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

은 ‘학자형 관료’로 평가해도 좋을 정도로 유능한 행정가의 면

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안동대학

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제안하고 추

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

진하여 실현했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 관까지 발전시켜 관장으로 큰 활약을 했기 떄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개관 1주년에 즈음하여 무척 분주 한 김관장께 잠깐만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3월 13일(월요일) 오전, 꽃샘추위가 찾아온 영하의 날씨가 의외로 쌀쌀하게 다가

운동사연구소장,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편찬위 원장, 안동독립운동기념관 및 경상북도독립운동 기념관장,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 원 등을 역임했다. 작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 부기념관 초대 관장에 임명되었다. 독립기념관 제 5회 학술상(2009년), 의암대상 학술부문(2015년)

온다. 그러나 기념관 안에 들어서자 무언가 뜨거운 열기가 느

을 수상했다.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

껴졌다. 월요일은 휴관일인데도 전시 시설 점검과 보수, 회의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이육사』,『안동 내앞마

업무로 바쁜 직원들을 보면서 신생기관의 절박함과 긴장감을

을 -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잊혀진 사회주의 운

실감할 수 있었다. 먼저 좀 성급한 감이 있지만, 개관 1년의 성과와 향후 과제를 평가, 정리한다면 어떨지 물었다. 또 새로 출범한 기관의 기관 장으로서 여러 사업이나 학술 연구 추진, 그리고 관리 · 운영에

동가 이준태』,『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 등 독립운 동사 분야에 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간했다. 현재 『순국』 편집자문도 맡고 있다. 인터뷰ㅣ장세윤 월간 『순국』편집주간 글·사진ㅣ편집부

만나고 싶었습니다 •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관장 

  11

순국 특별 초대석    만나고 싶었습니다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관장

성과를 요구하지요. 그렇더라도 우리 기념관 같은 국가기관은 차분하게 씨 를 뿌리고 밭을 가는 일에 매달리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김관장은 신설기관으로서 어려운 점도 많다고 호소한다. 우선 의외로 ➊





임시정부 관련 전문 연구인력이 많 지 않다고 한다. 직원들은 대부분 신

➊  김희곤 관장의 임시정부 관련 저서.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2015)  ➋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2004) ➌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1995)

규 채용한 젊은 연구자나 신진 실무행 정 인력들이지만, 방대한 규모의 전시

어려움은 없는지 궁금했다.

관을 운영, 관리하고 상설전시와 기획전시, 시민강

“개관한 지 겨우 1년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좌 운영이나 교육프로그램 운영, 자료의 수집과 관

하나, 기본적 틀을 잡고 여러 사업의 기본 방향을 정

리 · 분석 등 여러 업무를 감당하기에는 아직 경험도

하는 등 이제 걸음마단계입니다. 벌써 성과를 요구

부족하고 전문성을 더 쌓아야한다고 말한다. 직원들

하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까요?”

다수가 첫 직장이어서 전문성을 더 다지는 한편으로

듣고보니 좀 머쓱해진다. 올해 비로소 1월부터

구성원들의 효율적 배치와 조화가 급선무라고 말하

회계연도가 시작되니 본격적 사업은 올해부터가

는 김관장.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크게 걱정이 없는

아닌가 생각되었다.

듯한, 노련한 김관장의 얼굴에는 무언가 자신감이

“올해 우선 정보화사업을 서둘러서 홈페이지 구

배어있는 듯 했다.

축, 사이버기념관 오픈, 특히 휴대폰으로 전시해설을 들을 수 있는 앱을 개발하는 등 온라인부문을 강화

헌법가치에 충실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구현

했습니다. 그리고 소장자료와 전시물 관련 아카이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비전’으로 ①의미와

(Archives)구축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은

가치, 균형 있는 전시 추진, ②대한민국임시정부사

단기간으로는 불가능하고, 단계별로 나누어 중장기

연구 선도 및 대중화 등을 내세우고 있다. 매우 타당

사업으로 추진코자 합니다. 당장 사업성과를 거두려

하며 설득력있는 원대한 구상을 담고 있는 것이 아

하기 보다는 국가기관이 할 수 있는 사업, 즉 중장기

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첫번째는 좀 생소하게 느껴

적 학술 · 교육사업을 추진하여 기반을 구축하는 쪽

졌다. 이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부

으로 나아가려고 해요. 학계에서는 기념관이 임시정

탁했다.

부 관련 연구 · 교육 등을 선도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먼저 대한민국 국가사의 정맥을 확립하려는 것입

언론과 대중은 당장 보이는 꽃이나 열매처럼 가시적

니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왕, 즉 군주에서 백성, 민

12    

  2023년  4월

임시정부기념관 원경(2022년 4월)

2022년 4월 개관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움

(民)으로. 세계사적 보편성, 혹은 세계적인 보편적 법

다. 이러한 인식과 주장을 어떻게 보는지, 추후 어떻

칙을 우리도 거쳤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하

게 대응할지 질문했다.

지는 않았죠. 처절한 항일 투쟁을 펼치며 우여곡절

“기본적으로 그러한 입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끝에 독립하기에 이르렀지요. 그 내용과 과정을 전

그러나 자기 나름의 관점에서 의견을 주장할 수 있

시를 통해 우리 국민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고, 이견이 존재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학자나 학술단

“다음으로, 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의회. 즉 임시의

체라면 여러 가지 의견을 학문적 차원에서 주장할

정원도 설치되어 민주주의를 실현했습니다. 이후 독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에 대한 제 생각은 이미 출판

립된 국가로 정착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세계적으

한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지식산업사,

로 볼 때도 드문 사례입니다. 임시정부의 활동 등 그

2015)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국가기관

역사는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한 내용을

인 임시정부기념관은 국가의 최고가치가 담긴 헌법

보여주자는 것이지요.”

정신에 충실해야 합니다. 1948년 제헌헌법 전문(前

김관장은 홈페이지 인사말에서 대한민국이 임시

文)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

정부 시기의 대한민국에서 시작되고, 국가 이름이나

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연호, 헌법과 태극기를 비롯한 국가 상징물을 고스

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란히 이어온 사실을 밝히고,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

당시 이승만 제헌국회 의장의 요구로 담긴 것이지

가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것임을 밝혔다.

요. 현행 헌법의 전문에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

그런데 일본 우익은 물론, 국내 일부 인사들도

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

1948년 8월 건국설을 주장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념을 계승하고”라고 하여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의 성립과 활동을 폄하하는 경우가 있다. 또 학계 일

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개인 연구자가 아

각에서는 ‘임정법통론’에 비판적 입장을 보이기도 한

닌 국가기관의 책임을 맡은 저로서는 헌법정신으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관장 

  13

순국 특별 초대석    만나고 싶었습니다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관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 경로 전시판넬

박승길의 봉오동전투 지도

명시된 내용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릴 의무가 있다 고 믿습니다.”

4쪽인데, 김구 주석의 사진이 앞에 실려있고 한국어 는 물론 중국어 · 영어로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전시관을 둘러보니 임시정부기념관만 소장하고 있는 원본 자료도 상당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1920

역시 김관장의 논리는 명확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년 6월 봉오동전투에 참전했던 신민단의 박승길이

의 전시와 연구, 시민교육이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

쓴 봉오동전투 관련 기록이나 지도 등도 유일본이

된다.

아닌가 한다.

임시정부기념관은 이제 갓 출발한 상황이지만, 1 년 사이에 적지 않은 관련 자료를 수집, 전시하고 있

새로운 자료 발굴과 전시, 국내외 협력 네트워크

는 것으로 알고 있다. 김관장께 임시정부기념관에서

구축할 것

자랑할 만한 전시물이나 유물, 자료가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을지 물었다.

김 관장은 이미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편찬위 원장’을 맡아 2011년 말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대

“많은 자료가 있지만,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내신

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51권을 완간하는 데 큰 역

박은식(朴殷植) 선생의 『한국통사(韓國痛史)』 원본을

할을 수행했다. 이에 관련 자료의 발굴 · 수집을 위해

꼽을 수 있지요. 원래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1914년

어떤 계획을 구상하고 있는지 물었다.

에 발행된 책인데,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자료라

“임시정부기념관은 후발기관이기 때문에 먼저 다

서 자랑할 만합니다. 기증자료입니다. 또 임시정부

른 기관이 수집 · 소장하고 있는 자료의 목록을 파악

가 중국 임시수도 충칭(重慶)에서 활동할 때인 1943

할 필요가 있지요. 이에 따라 국내 수집자료의 목록

년, 귀국 전에 발행한 애국가를 들 수 있습니다. 모두

화작업을 추진했습니다. 올해는 중국 등 현지 조사

14    

  2023년  4월

작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현지 연구자를 찾아 수집

에 업무가 집중되어 어려움이 많습니다. 연구 인력

작업 용역을 맡기려고 합니다.”

은 턱없이 적고, 교육 수요는 엄청나게 많은데 연구

“특히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광복군 인면

사 한명이 전담하고 있으니 정말 쓰러질 지경입니

(印緬-인도 · 버마)전구공작대 활동에 대한 영국 문서

다. 앞으로 조직 편제도 연구 · 교육 · 자료 담당 부서를

를 발굴했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SOE(특별전쟁집행

분리하여 증설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부) 관할이었죠. 이에 대해서는 우리 한국측 자료만

김관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신설기관으로 왜 어려

이 있었는데, 영국측 자료를 확인하게 되고, 게다가

움이 없겠는가? 하지만 과거 무에서 유를 창조한 김

영국군 장교의 일지도 찾게 되어 새로운 연구세계가

관장이 아니던가. 이런 문제점도 슬기롭게 극복할

열린 셈입니다. 지금 번역작업중인데, 가을 특별전시

것으로 믿어졌다.

에 소개하고 연말쯤에 자료집을 내려고 합니다. 특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은 이곳 말고도 중국 상

히 올 가을에 런던에서 국제학술회의를 열고, 영국

해, 항주, 중경 등에 있고, 관련 시설도 상해 부근의

학자로 하여금 인면전구공작대와 영국의 관계를 발

해염 등 여러 곳에 있다. 또 국내에도 독립기념관, 서

표하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를 갖고 런던

울 효창공원 부근의 백범김구기념관, 심지어 전남

의 전쟁박물관 전시에 관련 내용을 포함시켜달라고

함평 등에도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들 관

요구할 생각입니다.”

련 시설과 서울 임시정부기념관과의 효율적 연계와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독립운동은 세계적 범위 로 전개되었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러한 우리 선열

관리, 전시와 학술연구 방안 등 시너지효과 도모방 안을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다.

들의 인식과 활동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임시정부기념관이 서울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현재 임시정부기념관은 운영지원과 · 전시운영과 · 연

국내외 관련기관의 허브(중심)역할을 할 수 있다고

구교육과 3개 부서로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향후 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든

가로 필요한 기능이나 더 필요한 부서 신설이 필요한

가, 학술단체들의 학술회의나 발표장소로 본 기념관

지, 아니면 추후 조직개편이나 증설이 필요한 지 궁금

시설을 무료로 대여해주는 등의 방법이 있겠지요.

했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많이 있어요.”

“아쉽게도 시민교육을 위한 강의실이나 서고(書

역시 안동대 교수, 안동독립운동기념관과 경북독

庫)가 없어 공간 활용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금은

립기념관장의 풍부한 경험과 관록에서 나오는 아우

1층에 있는 대강당을 작게 나누어 강의실로 활용하

라가 대단했다. 막힘없는 설명이 이어진다.

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서고를 시급히 확충할 필

“서울에 있는 도산기념관이나 심산기념관, 천안의

요가 있습니다. 소장자료 가운데는 도서 종류가 꽤

독립기념관 등 여러 기념관 등과도 연계할 예정입니

있는데, 수장고 시설에 책 종류를 보관, 활용할 만한

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함평의 임시정부기념

공간이 없는거죠. 또 조직과 관련해서는 연구교육과

관도 중요하죠. 주요 지역을 순회하는 ‘찾아가는 전

만나고 싶었습니다 •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관장 

  15

순국 특별 초대석    만나고 싶었습니다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관장

이동전시, 특별기획전 등을 통해 임시정부 업적 알릴 것 김관장은 상설전시 외에도 특별기 획전시를 1년에 두세 차례 개최할 예 정이라고 밝혔다. 올해 특별기획전시 는 어떤 내용과 형식인지 궁금해졌 다. 그런 점에서 올해 2월 하순부터 3 월 초순까지 개최한 제104주년 3 · 1 절 기념행사는 매우 유익한 기획전시 및 체험행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전시관 내부와 관람객의 모습

104주년 3 · 1절 기념행사 포스터

이에 특별한 사업이나 학술연구 사 시’로 어느 정

업, 학술회의, 행사(이벤트) 등을 구상하고 있는지 질

도 해결 가능

문했다.

하다고 봅니

“최근 열었던 「우리는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기

다. 지방, 지역

획전시는 3 · 1절 기념행사에 즈음하여 틈새기획으로

별로 맞춤형

개최한 겁니다. 올해는 임시정부 가족들의 생활사

학습지 개발

관련 기획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역사

도 준비하고

를 담은 ‘이동형 기억상자’를 공간에 맞춰 캐비넷 A

있습니다. 하

형 · B형 등으로 구분하고, 복수로 제작하여 주요 지

지만 중국에

역별로 맞춤형 이동전시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여러

있는 여러 관

지역 · 지방에 제대로 된 전시공간이 드문 편입니다.

련 기관들은

따라서 공간에 맞춰서, 올해에는 수도권, 영남과 호

과거와 달리

남, 충청권역 등으로 나누어, 각각 두 군데씩 모두 8

우리가 직접

개 기관을 정해 이동전시를 열게 됩니다.”

손댈 수가 없어요. 전시에 필요한 자금이나 인력을

“1년에 특별기획전시를 두 차례 엽니다. 상반기

중국정부 스스로가 해결하면서, 오히려 우리가 거드

에 임시정부 가족들의 삶을 다룬 전시, 그리고 하반

는 것을 싫어할 정도거든요. 그래도 그 기관들과 협

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기 외교 활동을 다루면서 인

력관계를 구축하면서 자료와 유적 조사, 연구사업을

면전구공작대를 포함합니다. 내년 상반기에는 임시

펴나가야 하겠지요.”

정부 요인과 가족의 회고록 전시가 좋지 않을까 생 각도 하고 있습니다. 김구의 『백범일지』나 김준엽의

16    

  2023년  4월

『장정』처럼 널리 알려진 것도 있지만, 김문택, 김효 숙, 오희선 지사 등 생소한 회고록도 많거든요.” 독립문 부근에는 독립관(순국선열 추모공간), 서대 문형무소역사관 등 한국근현대사 관련 주요 시설과 유적이 자리잡고 있다. 김관장은 이들 시설과 함께 임시정부기념관이 ‘나라사랑 벨트’계획을 실천하고 있다고 밝힌다. 현재 독립관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임시정부기념관이 관람과 교육프로그램을 함께 운 영하기 시작했고, 중고생들의 수학여행과도 연계하 여 운영하고 있다 한다. 그 결과 지난 3 · 1절 때는 무 려 4천여 명의 관람객이 기념관을 찾아와 성황을 이 루었다고 한다. 추후 독립관은 확장 신축공사를 거 쳐 새로 문을 열 예정이다. 약 3년 뒤에 새 추모관이 완성된다면 독립문과 함께 이 3개 시설은 더 충분한 시너지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연구 · 교육 · 자료 3개 부서 확립 증설과 인력 확충 시급

1층 상징홀에서 포즈를 취한 김희곤 관장

최근 국회에서 국가보훈처를 국가보훈부로 승격 시키는 법률안이 통과되었다. 이제 국가보훈부가 출

김관장은 이날 오후 충남 천안시 목천읍에서 열리

범할 것이다. 그렇다면 임시정부기념관이 어떤 영향

는 이동녕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 83주기 추모식에

을 받을지?

참석해야 한다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김관장은 확실하게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앞에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가운데 임시정부기념관을 나오

말한대로 한 개과로 묶어져 있는 연구, 교육, 자료 영

면서 추위에도 불구하고 새싹이 피기 시작하는 나무

역이 세 개 과로 확충되기를 기대한다면서, 최소한

와 개나리를 보았다. 국립대한민국임정부기념관 역

연구와 교육을 분리해서 운영할 수만 있다면 초대

시 이제 활짝 피어날 것이다. 우리 역사의 무게는 결

관장으로서 기초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코 가볍지 않다. 그러한 역사를 우리는 더욱 빛나게

밝혔다.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관장 

  17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나라를 잃었으나, 조국광복 무대는 전 세계로” 한국독립운동은 국내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라, 중국 · 일본 · 러시아 · 미주 · 유럽지역 등 세계 곳곳 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대표적 국제도시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알려진 대표적 국제도시 베이징 · 상하이, 도쿄 · 블라디보스토크 ·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활약한 주요 인물 과 단체, 사건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 해외 각지에서 활동한 한인들은 어려움을 무릅쓰면서도 민주공화국과 평등 · 정의로운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특히 이들 도시들은 재외 한인사회와 해외 독립 운동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오늘날 국제화, 세계화의 큰 흐름속에서 우리는 폭넓은 안목과 연대, 우호의 시선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 인류의 공존과 평화, 공동번영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이다. 우리 선열, 독립운동가들 은 이미 100여년 전에 세계적 안목과 국제 연대 속에서 전 세계 각지를 무대로 조국의 독립과 새 로운 민족국가 건설을 향한 이상을 불태웠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 립운동의 세계적 전개’를 특집주제로 정하고 주요 국제도시에서 전개된 주요 독립운동의 흐름을 짚어보았다. Theme 1. 한국독립운동과 베이징, 상하이 · 손염홍 Theme 2. 한국독립운동과 도쿄 · 윤소영 Theme 3. 한국독립운동과 블라디보스토크 · 주미희 Theme 4. 한국독립운동과 샌프란시스코 · 홍선표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베이징, 상하이

정치 · 문화 중심지 베이징과 국제화된 대도시 상하이

1910~1920년대 중국 관내 지역 한국 독립운동의 거점 글ㅣ손염홍(건국대 교수)

20    

  2023년  4월

01

한국독립운동의 기반 조성 일제하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베이징과 상하이가 한국 독립운동의 공간이 된 것은 1910년을 전후

의 공간은 산해관(山海關)을 경

한 시기였다. 베이징의 한국 독립운동은 신민회가 조성환(曺成煥)을 파

계로 관내 지역과 ‘만주’로 불리

견하면서 비롯됐다. 베이징은 북쪽의 러시아 연해주, 중국 동북 지역과

던 관외 지역으로 구분한다. 정

남쪽의 상하이(上海) 등지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독립운동의 기착지 혹

치·문화의 중심지 베이징(北京)과 국제화된 대도시 상하이(上海)는 1910~1920년대 중국 관내 지역 한국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은 연락처가 되었다.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고무되 었다. 신규식(申圭植)은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에서 조성환을 만나 중국 혁명의 중심지인 난징(南京)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황싱(黃興)·쑨원(孫文) 을 비롯한 중국 혁명인사들과 접촉해 한중연대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신규식은 한국 독립운동 대표 단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박은식, 신 채호, 홍명희, 문일평 등과 함께 1912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 관내 지 역 최초의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했다. 동제사 는 본부를 상하이에 두고 베이징 등 중국 지역과 연해주, 유럽과 미국, 일본 등지에 지사를 설치했다. 동제사는 상하이 한인들의 친목과 상호 부조를 표방하고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과 유기적인 관계망을 형성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상하이, 베이징의 독립운동가들은 연해주· 만주 등지의 지도급 인물 들과 연합하여 상하이 영 국 조계지에서 ‘신한혁명당’ 을 결성했다. 신한혁명당은 위안스카이(袁世凱) 정권의 지원을 얻고자 본부를 베이 징에 두었다. 신한혁명당은 고종을 당수로 추대하고 중 국과 ‘중한의방조약(中韓誼 邦條約)’을 맺어 독립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으나 성

신규식(1879~1922 )

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신

조성환(1875~1948)

한혁명당을 통해 각지의 독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베이징, 상하이  

  21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대동단결선언」(독립기념관 소장)

립운동 역량이 재정비되어 독립전쟁을 결행했다는

1919년 1월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고,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3 · 1 운동이 발생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어서 박은식과 신규식 등은 1915년 상하이 프 랑스 조계지에 ‘대동보국단’을 조직해 국권을 회복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베이징의

새로운 방도를 모색했다. 그리고 1917년 2월 러시아

‘반임정’운동

혁명의 영향으로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이 무르익

국내에서 3 · 1운동이 일어나자 각지에 활동하는

자, 12월 상하이에 있는 독립운동가 신규식, 박은식,

독립운동가 대표자들이 상하이에 모여 4월 11일 프

신채호, 조소앙 등 14명은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

랑스 조계지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를 열었

여 국민주권론을 표방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했

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

다. ‘대동단결선언’은 3 · 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

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는 임시

부가 수립될 수 있는 이론적 기틀이 되었다.

헌장 10개조를 제정·공포한 뒤, 국무총리를 수반으

그 뒤 1918년 11월 상하이에서 여운형이 주도하

로 하는 6부의 국무원을 구성한다는 합의가 이뤄졌

는 ‘신한청년당’이 결성되었다. 신한청년당은 미국

다. 이어 4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

등 구미 국가를 상대로 외교적 활동을 전개하고자

고 9월 한성정부의 법통을 인정하고 정부의 위치는

22    

  2023년  4월

상하이에 두는 통합임시정부가 출범 하였다. 베이징에도 3 · 1운동 이후 독립운동 가와 청년 학생들이 증가하면서 여러 단체가 만들어졌다. 1919년 3월 하순 ‘신대한동맹회’가 조직되어 임시정부 를 지원하면서 중국과의 외교적 접촉 을 시도했다. 그리고 4월경 베이징과 톈진의 청년·학생 70여 명은 ‘대한독

1921년 4월 북경군사통일회의 개최지

립청년단(또는 학생단)’을 조직하고 신 채호를 단장으로 추대했다.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다양한 활동을 펼쳤는데 특

집할 것을 요구했다.

히 외교에 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활동 노선은 무 장투쟁을 주장한 인사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게다가

국민대표회의와 민족유일당운동

1919년의 파리강화회의와 1921년 태평양회의를 상

상하이의 임정에서는 이승만이 상하이에 온 뒤 정

대로 한 외교 활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부의 내분이 더욱 악화되자, 박은식 · 김창숙 · 원세훈

그런 가운데 임시정부 내부에서는 독립운동의 노선,

등 14명은 1921년 2월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제창하

출신 지역을 둘러싼 지도자 및 각 정파 간의 갈등 및

고 나섰다. 베이징을 이어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도

권력투쟁이 심화되었다.

5월 이승만의 퇴진과 임시정부 개조를 요구했다. 결

이런 상황에서 상하이 임정에 불만을 가진 박용만,

국 1922년 5월 베이징과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이

신채호, 신숙 등 무장투쟁론자들은 베이징에 집결하

연합하여 국민대표회의주비회의 소집을 선언하고

였다. 이들은 각 지역에 흩어졌던 군사단체를 통일

나섰다. 안창호도 회의 개최에 동의했다. 그러나 김

하고자 하여 1921년 4월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였

구와 이시영 등은 국민대표회의에 반대하고 임시정

다. 이 회의를 참가하기 위해 국내외의 단체 대표자

부 유지를 주장하였다.

들이 베이징에 모였고, 베이징은 관내 지역 무장 항 일투쟁의 중심지로 급부상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월 각지 대표 130여 명이 상하이에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그러나 베이징의 군사통일회의는 군사단체 통일

독립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로 5개월 정도 계속

문제뿐만 아니라 이승만을 성토하고 임정 및 임시의

되었다. 그러나 대회 참석자들은 점차 창조파와 개

정원의 해산을 요구하고 나섰다. 아울러 새로운 독

조파로 나뉘었다. 베이징에서 파견된 신숙, 강구우,

립운동 지도기관을 세우기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소

박건병 등은 창조파의 입장에 서서 활동하였다.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베이징, 상하이  

  23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장건상(1883~1974)

김성숙(1898~1969)의 중산대 졸업사진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돌아간 뒤 1920년대 후반

장지락(1905~1938). 1931년 체포됨.

신사상의 수용과 청년 유학생들의 민족운동

에 들어 독립운동단체들을 하나의 ‘대혁명당’으로 통

1920년대에 들어 상하이와 베이징의 독립운동가

합하기 위한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 운

들은 사회주의·아나키즘 등 신사조를 수용하여 다

동이 일찍 나타난 곳은 베이징이었다. 1926년 그곳

양한 형태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이동휘 등이 연

에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가 창립된 것이다. 북

해주에서 상하이로 와 임시정부 각원으로 부임하면

경촉성회는 상하이 임정의 안창호와 베이징 창조파

서 사회주의가 중국 관내 지역에서 확산되기 시작하

의 지도자 원세훈이 주도하여 결성한 것이다. 1927

였고 1921년 이동휘를 중심으로 고려공산당(상하

년에 들어 상하이 · 광둥(廣東) · 우한(武漢) · 난징에서도

이파)이 결성되었다. 베이징의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연이어 유일당촉성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각지 촉

주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연결되어 활동했

성회 대표는 그해 11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

고, 그 책임자는 장건상이었다. 장건상은 러시아 이

촉성회 연합회를 개최했으며, ‘이당치국’의 유일독립

르쿠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창립

당주비회를 결성하기로 했다. 그러나 1928년 들어

대회에 대표로 참석한 뒤 베이징을 중심으로 톈진

유일독립당주비회의 추진은 정체 상태에 놓였다가

등 화베이(華北) 일대에 선전 활동에 몰두했다.

1929년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는 해체되었다.

한편, 베이징의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인 아나

이후 중국 관내에서의 민족유일당운동은 중단되고

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을 독립운동의 수

말았다.

단과 방법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 선구자인 신 채호는 리스청(李石曾) 등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교

24    

  2023년  4월

류하면서 아나키즘 지식을 갖추었다. 1921년 1월부 터 신채호, 김창숙 등은 『천고(天鼓)』를 발간하면서 아나키즘적인 폭력투쟁 방략을 독립운동의 수단으 로 삼았다. 신채호의 강연을 듣고 감명받은 유자명 은 아나키즘 관련 저작을 읽고 아나키스트 이론가가 되었다. 한인 유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신사상을 수용하고 민족운동에 뛰어든 것은 베이징 지역 한인 독립운동 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대표적 인물은 승려 출신 의 김성숙을 들 수 있다. 그는 1923년 10월 불교유학 생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황야』를 발행했으며, 1925 년 북경고려유학생회를 결성하여 장지락(김산) 등 사 회주의 성향의 유학생들을 이끌었다. 베이징지역의 사회주의 혁명가와 유학생들이 연합하여 ‘창일당’을 결성하고, 1925년 1월 기관지 『혁명』을 발간했다. 아나키즘 사상에 경도한 한인 학생들도 적지 않았 다. 아나키즘 이론가로 유명한 이을규와 이정규 형제 는 베이징대학에 재학하면서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등 중국인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이회 영도 아나키즘의 자유연합론에 공감하고 아나키즘

1920년 3월 경 폭탄구입차 상하이에 간 의열단원들. 오른쪽부터 김원봉 · 강세우 · 곽재기 · 김기득 · 이성우, 앉은이는 조 력자 정이소, 우하단은 이듬해 입단하는 김익상.

운동에 투신했다. 1924년 4월 이회영 · 이을규 · 이정 규 · 정화암 · 백정기 · 유자명 등 베이징의 한인 아나키

『탈환(奪還)』을 발행했다. 그리고 이들은 1930년 4

스트들은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월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고 『남화통신(南華

『정의공보』를 발행했다. 그리고 유기석 · 심용해를 비

通迅)』을 발간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9 · 18 사변

롯한 일부 아나키즘 성향의 한인 유학생들은 중국 학

직후의 1931년 11월 중국인 아나키스트와 연합하

생들과 함께 ‘흑기연맹’과 ‘고려청년사’ 등 단체를 조

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행동단체로 ‘흑색공

직하고 『동방잡지』와 『고려청년』을 간행하였다.

포단’을 조직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요리점 육삼

1920년대 후반에는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상하이

정(六三亭)에서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

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1928년 3월 상하이에 ‘재중

吉明)와 일본군사령부 간부들을 일거에 폭살할 것을

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육삼정 사건). 이처럼 1930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베이징, 상하이  

  25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년대 중국 내 한인 아나키즘운동은 항일의열투쟁으

월 병인의용대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이유필 · 나

로 특징지어진다.

창헌 등의 주도하에 일제의 밀정과 친일 분자를 처 단하는 활동을 했다. 병인의용대가 상하이 일본총

의열투쟁의 전개 암살과 파괴를 통한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단체인

영사관을 폭파하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소기의 성 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의열단은 1920년 가을쯤 근거지를 베이징으로 옮겼

이어서 1931년 김구를 중심으로 상하이 등지에

다. 베이징에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 다수가 의

서 일제의 주요 인물을 암살 · 처단하여 일제의 침

열단에 가입하거나 관련된 활동을 펼쳤다. 대표적인

략 야욕을 꺾을 것을 목적으로 ‘한인애국단’이 결

의거는 1920년 9월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

성되었다. 이봉창의 도쿄 의거, 윤봉길의 상하이

그해 11월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 1921년

의거 등이 한인애국단의 대표적인 활동이었다. 한

9월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청사 폭탄 의거, 1922년 2

인애국단의 활약으로 중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월 상하이 황푸탄에서의 김익상·오성륜 등의 일본

정부를 비롯해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지원하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암살 시도, 1923

게 되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

년 1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의거 등이다. 이렇

을 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근거지인 상하이를

듯 1921~1922년 2년 동안 의열단의 활약은 일제에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1931년 ‘9 · 18사변(일명 만

충격을 던져줬다.

주사변)’ 이후 중국에서 일제 침략 세력이 확산되

1923년 1월 단장 김원봉은 신채호로부터 「조선혁 명선언」을 받고선 아나키즘적인 운동 이념과 노선을

면서 베이징·상하이와 한국 독립운동의 관계는 점 차 멀어졌다.

천명했다. 그 뒤 김원봉은 활동 무대를 상하이로 옮 겼지만 사회주의사상의 확산에 따라 단원 사이에 이 념 분쟁이 일어나 활동은 침체 상태에 빠졌다. 중국 에서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자 1925년 가을경 본부를 광저우(廣州)로 옮겼다. 1920년대 중후반에 베이징에는 새롭게 ‘다물단(多 勿團)’이 출현했다. 신채호가 이 단체의 선언서를 작 성해 주었고 단원들은 유자명, 이회영, 김창숙 등의 지도를 받고 밀정들을 제거했다. 대표적으로 1925 년 3월 베이징의 독립운동가 사이에 숨어 있던 고급 밀정 김달하의 처단을 들 수 있다. 상하이에는 암살과 파괴를 목적으로 1926년 1

26    

  2023년  4월

필자  손염홍 중국 길림성 장춘시 출생. 중국 연변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국민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박사(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홍익대학교 교양학 부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상허교양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편 · 저 · 역서로 『근대 북경의 한인사회와 민족운동』(역사공간, 2010), 『운암 김성숙 의 생애와 사상』(공저, 2013), 『중국신문 안중근의거 기사집』(편저, 2010), 『상하 이 지역 일본군 위안소』(역서, 2019) 등이 있다.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한국독립운동과 도쿄

‘적의 심장부’에서 한국독립운동 활발히 전개돼

2 · 8독립운동과 양근환 ·  김지섭 · 이봉창 의거 등 명성

02

글ㅣ윤소영(국가보훈처 연구원)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도쿄 

  27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근대 도시 도쿄의 탄생 도쿄는 1868년 메이지유신 후 탄생했다. 1868년 7월 17일 메이지 신

조선기독교청년회관과 히비야공

정부는 조서(詔書)를 통해 종래의 에도(江戶)를 도쿄(東京)라 개칭한다고

원의 2 · 8독립운동, 제국호텔과 여

선포했다. 1869년 3월에는 그동안 정치적 은둔 상태에서 막부의 쇼군

운형의 독립 연설 있었던 곳. 일제

으로부터 통제를 받던 일왕(천황)이 거처를 도쿄로 옮겼다. 이로써 일왕

강점기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은 신정부의 구심점임을 대내외에 각인시켰으며, 1889년 공포된 일본 제국헌법 제1조는 ‘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고 명문화 됨으로써 일왕은 바야흐로 일본제국주의의 정점에 선 자가 되었다. 한 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왕은 바로 한국침략의 원흉이었으며, 일왕이 살 고 있는 도쿄는 적의 심장부였다. 일본에서의 독립운동은 주로 재일유학생과 그 출신자에 의해 이루어 졌다. 하지만 일왕과 중앙의 정치가를 정면에서 조준한 의열투쟁을 결 행하기 위해 만난을 무릅쓰고 중국에서 도쿄로 잠입하여 활동을 벌인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과감하게도 도쿄의 중심부에서 결행되었 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성공 여부를 따지지 않는 목숨을 건 거사였다. 이 글에서는 1920~30년대 초 도쿄에서 결행된 독립운동의 공간을 따라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1930년 도쿄 니주바시(二重橋)와 경시청 부근 지도

28    

  2023년  4월

청년들은 ‘의를 보고 행하지 않음 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의열투 쟁에 투신했다. 그 지향하는 목적 지는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 는 것, 즉 여운형의 제국호텔 연설 에서 나타났듯이 “한국이 건설할 신국가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이상 이었다.

일왕의 도쿄에 거주하면 서 도쿄 시가는 일왕이 사는 궁성을 중심으로 1880년대 후반부터 서구식 벽돌조 관 청 건물이 조성되기 시작했 다. 또한 서구열강과의 교류 가 많아진 상황에서 번듯한 서양풍 대형호텔이 필요하 다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도쿄 궁성 석교

馨) 외무대신의 제안에 따라 국가적 사업에 준하여 제국호텔이 건축되었다. 이 호

이다. 이곳은 1924년 김지섭 의거의 현장으로 한국

텔은 1889년에 착공되어 1890년에 준공했고, 그 후

인에게 알려진 곳이다.

에도 증축이 몇 차례 이루어졌다. 제국호텔은 고지마

도쿄의 도시다운 경관은 1914년에 도쿄의 관문인

치구(麹町區) 우치야마시타초(內山下町, 현재 우치사

도쿄 역사(驛舍)가 준공된 후 도쿄역을 중심으로 번

이와이초 內幸町)에 있었는데, 그 옆의 광대한 들판은

화가가 발달하면서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도쿄역은

1903년에 일본 최초의 서양식 정원으로 알려진 히비

도쿄스테이션호텔과 연결된 건물로, 외관상 장방형

야(日比谷)공원이 되었다. 히비야공원 너머에 궁성이

의 3층 건물로서도 너른 공간을 차지한 데다가 르네

위치했다.

상스식 붉은색 벽돌 건축이라는 화려한 모습으로 일

일왕이 사는 궁성은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성역

약 제국 수도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도쿄역에서 궁성

이었다. 궁성의 외원(外苑) 해자 위에 설치된 문이 사

을 바라본 위치를 기준으로 북동 방향에는 에도시대

쿠라다몬(櫻田門)이며 이를 통과하여 걸어가면 왼편

에 막부의 어용시장이 있던 간다(神田) 구역이 있다.

에 니주바시(二重橋)로 알려진 석교가 나온다. 이곳에

이 곳에는 세이소쿠(正則) 일어학교, 니혼(日本)대학,

설치된 문이 궁성의 정문으로 니시노마루 오테문(西

센슈(專修)대학, 메이지(明治)대학, 일본기독교청년회

の丸大手門)이다. 석교라는 명칭은 낯설 것이다. 원

관 등이 있어 학원가를 형성했다.

래 석교를 지나 궁성 안쪽으로 진입하면 이층다리가 있는데, 그 이름이 니주바시였다. 그러다가 메이지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과 히비야공원의 2 · 8독립운동

대에 궁성을 개보수하면서 이층 다리를 철거하고 철

자연히 조선의 유학생들이 모여든 곳도 간다였

교로 개축하게 되어 현재는 이층 목조 다리의 옛 모

다. 특히 호리도메바시(堀留橋) 근처에 조선기독교

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일반인

청년회관(神田區 西小川町 2-5)이 1914년에 완공된

들은 궁성 바깥의 석교를 니주바시로 통칭하게 된 것

후, 도쿄에 오는 한인의 80% 이상이 이곳에서 처음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도쿄 

  29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1914년에 지어진 도쿄역사

일본어를 배우고, 각종 정보를 얻었다. 또한 이 곳

된 것이다.

에서는 각종 강연회와 웅변대회가 개최되어 식민지

건축 설계는 선교사이자 기독교계 건축가인 윌

청년들의 든든한 ‘비빌 언덕’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리엄 보리스(William Merrell Vories, 일본명 히도

그런데 어떻게 도쿄의 한복판에 조선인만의 이

츠야나기 메레루(一柳米來留), 1880-1964)이다. 그

런 건물이 지어질 수 있었을까? 거기에는 1906년 8

는 1911년 도쿄에 중국 YMCA회관을 설계했으며,

월에 서울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일본 조직으로 도쿄

고베(神戶)여학원, 간사이(關西)학원, 도쿄의 일본

조선기독교청년회가 설립된 것이 큰 기반으로 작용

YMCA 회관 등 주로 기독교계 건물을 건축 설계했

했다. 처음에는 간다구(神田區) 미토시로초(美土代

다. 한국에도 146개의 건축 작품을 남겼다. 조선기

町)에 있는 일본기독교청년회관의 한 공간을 빌어

독교청년회관은 콜로니얼 양식의 2층 목조건물이

운영하다가 미국 뉴욕세계기독교청년회의 성금 등

며, 건물 입구 현관에는 한옥 기와를 차용하여 한국

총 3만원의 기금을 조성하여 간다구 니시오가와초

적 정서를 드러내도록 설계했다. 잘 알려진대로 이

(西小川町)2정목 5번지에 신축 건물을 마련하게

곳이 바로 1919년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왼쪽)과 W.M.Voreis가 설계한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입면도(오사카예술대학 건축학과 야마가타 마사아키(山形政 昭) 교수 제공)

30    

  2023년  4월

동이 펼쳐진 역사적 현장이 되었다. 도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도항 하는 유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 시였다. 일례로 1910년대 500~600 명 정도였던 재일한인유학생은 1918년 말 769명이 되는데, 그 중 642명이 도쿄 유학생일 정도였다. 이 들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기 가 1919년 전후이다. 일본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큰

현재 도쿄의 재일본한국YMCA회관

토대는 1919년 2 · 8독립운동이다. 1919년 2월 8일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도쿄의

과 서춘에게 금고 1년, 백관수, 김도연, 김철수, 윤창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했다. 오전 10시

석에게 금고 9개월, 송계백, 이종근, 김상덕에게 금고

에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일

7개월 15일을 선고했다. 이광수는 후속 활동을 위해

본 정부 대신 및 귀족원과 중의원, 주일 각국 외교공

거사 전에 중국 상해로 망명했고, 최근우는 거사 후

관, 조선총독부, 언론사에 발송하고 오후 2시에 200

도피했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여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유학생대회를

가세했다.

개최했다. 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기초했으며, 백관

2 · 8독립운동의 현장인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아

수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

쉽게도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전소해버렸다. 1929

독했다. 3시 50분경 간다경찰서에서 출동하여 주동

년 사루가쿠초(袁樂町)에 회관을 신축했고, 그 후 다

학생들은 모두 검거되었다.

시 재건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남은 학생들은 항쟁을 지 속했다. 2월 9일, 조선총독부에서 관할하는 기숙사에

제국호텔과 여운형의 독립 연설

서 80여명이 동맹 퇴사를 단행했다. 또한 2월 12일

2 · 8독립운동이 도쿄유학생들에게 큰 울림을 던

에는 히비야공원에서 제2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재

진 가운데 1919년 11월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

일유학생들은 국내 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속속 귀국

던 여운형이 일본정부의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했다.

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때 귀

이 계획은 상해에 거주하던 일본인 목사 후지타 규

국한 학생 수는 360여명에 달했다. 2 · 8독립운동의

코(藤田九皐)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여운형은 임

주동학생은 출판법 제26조 위반으로 도쿄지방재판

정 요인들의 우려와 만류를 뿌리치고 고심 끝에 2 · 8

소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6월 10일 재판부는 최팔용

독립운동의 주역인 최근우, 또 와세다대학을 졸업하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도쿄 

  31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고 일찍이 상해로 망명하여 실질적 2 · 8독립운동의

쾌한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배후였던 장덕수, 승려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상완을 수행원으로 대동했다. 11월 14일 상해에서 춘일환

1920년 도쿄의 유학생들

(春日丸) 여객선으로 출발하여 모지(門司)를 경유하

이러한 여운은 당시 최근우에게도 예외는 아니었

여 도쿄에 도착했다. 일제 측은 사실 여운형을 회유

던 것 같다. 도쿄에서 상해로 돌아간 최근우는 1920

하여 독립운동을 철회하고 자치론으로 돌아서도록

년 1월 9일 도쿄기독교청년회관 내 김재훈(金載勳)

할 작정이었다. 여운형 일행은 제국호텔에 머무르며

에게 “가련한 자제에게 고치적(苦恥的) 재산을 남겨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연설 당일인 11월 27일 그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자자손손 영구 완전한 경복(慶

취재하기 위해 제국호텔의 로비는 기자들로 북적거

福)을 이끌어내고자 한다면 최근(最近)의 일인(一人)

렸다. 이 때 여운형의 연설 내용을 독립신문은 상세

까지, 최후(最後)의 일각(一刻)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

히 보도했다. “우리가 건설하는 국가는 인민이 주인

사를 흔쾌히 발표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연하장을

되는 국가, 인민이 다스리는 국가, 인민을 위하는 국

우송했다.

가인 민주공화국이니 이는 대한민족의 절대요구일

마치 연하장의 글을 실천이라도 하려는 듯이

뿐더러 세계대세의 요구라(「呂氏一行言動」,『독립신

1920년 3 · 1운동 제1주년을 맞이하여 도쿄 유학생

문』1919.12.25)”고 여운형은 열변을 토했다.

들은 “어떤 압박과 어떤 제재를 받더라도 당일 만세

이 자리에 있던 최근우는 “그때 다나카(田中) 육군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고 조선기독교청

대신이 “당신네들 독립 만세란 개 한 마리가 짖으면

년회관에서 집회를 가졌다. 오후 2시경 히비야공원

여러 마리의 개들이 따라 짖는 격이다.”라고 비아냥

내 음악당 부근으로 이동하여 약 200명의 학생들이

대자 여운형은 “당신은 새벽에 닭이 우는 것을 모르

모여 만세를 외쳤다. 이에 출동한 히비야 경찰서에

느냐”고 일갈하여 다나카를 실색(失色)케 했었다”고

서 53명의 학생들을 체포했다. 그 중에는 이선행(李

전했다. 이 날 제국호텔에서의 여운형 연설은 일본

善行), 이양전(李良傳), 이찬향(李贊鄕), 전유덕(田有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는 1시간 20분에 걸

德), 현덕신(玄德信), 박승호(朴承浩), 황신덕(黃信德)

쳐서 도도한 목소리로 조선 독립운동의 필연성에 대

등의 여학생들도 끼어 있었다. 또한 같은 해 4월에

해 설파한 것이다. 일본은 여운형을 회유하고자 했

영친왕 이은(李垠) 결혼식에서 의열투쟁을 벌여 체포

지만 결과는 역효과였다. 하라 다카시(原敬) 총리는

된 서상한도 이 때 구속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로 인해 제국의회에서 큰 비난을 당했다.

당시 메이지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 학생이던 서

현재의 제국호텔에서는 여운형의 자취를 찾을 수

상한은 영친왕과 일본 황실의 딸 나시모토노미야 마

는 없지만, 메이지 일본이 자존심을 걸고 건축한 제

사코의 결혼식이 1920년 4월 28일에 영친왕의 도쿄

국호텔에서,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의 이상을 설

저택인 도리이자카 어용저(御用邸)에서 열린다는 소

파하던 여운형의 모습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통

식을 듣고 폭탄 의거를 계획했다. 결국 사전에 발각

32    

  2023년  4월

되어 1920년 7월 비공개재판에서 서상한은 폭발물

도쿄스테이션호

취급규칙위반으로 징역 4년, 폭탄 제조를 도와준 일

텔 3층 70호실에

본 학생 우에무라와 이마이는 벌금 20원형에 처해졌

투숙한 사실을

다. 1920년 9월 2일에는 미국의원단 일행이 조선을

알아냈다. 16일,

거쳐 도쿄를 방문했을 때, 동우회 총무인 홍승로 등

양근환은 민원식

이 한국 국기와 한국독립당청년기를 들고 의원단의

의 바뀐 숙소 호

자동차에 달려들어 체포된 사건이 일어났다. 2 · 8독

실을 찾아 헤매

립운동 후 일제 측이 파악한 일본 내 요시찰인 212

다가 9시 30분경

명 중 151명이 도쿄에 거주하고 있을 정도로 도쿄유

3층 14호실을 찾

학생들의 배일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드높았다.

아가 참정권운동

민원식을 처단한 양근환(1894~1950)

의 부당함을 논

도쿄스테이션호텔과 양근환 의거

박하고 준비한 단도로 민원식을 여러 차례 찌르고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국적(國賊)으

도주했다. 민원식은 과다출혈로 병원에 호송된 직후

로 「칠가살」(『독립신문』1920.2.5)중의 한 명으로 지

사망했다. 양근환은 도주 후 나가사키에서 상해로

목되던 민원식이 도쿄를 방문하여 자치운동을 벌인

가려다가 일경에 붙잡혀 도쿄로 호송되었다. 1921

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년 6월 30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 판결을

민원식의 아내 엄채덕은 엄비의 오빠 엄준원의 딸 이었다. 민원식은 조선은 ‘일본의 조선’이 되어야 한

받고 1922년 5월 4일 공소심(控訴審)에서 징역 12년 형이 확정되어 복역했다.

다고 부르짖으며 1920년 국민협회를 조직하고, 조

그는 재판정에서 민원식의 참정권운동이 조선인

선인 참정권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국내 3천 명

의 치욕이며 조선의 독립을 저해한다고 생각하여 민

이 서명한 참정권 청원서를 갖고 일본제국의회에 참

원식을 죽여 친일 조선인에게 경종을 울리려 했다고

정권 청원서를 제출하겠다고 국민협회 대표자 5명

하였다. 그는 형 양진환에게 보낸 편지에서 “견의불

과 함께 1921년 2월 9일 도쿄에 도착했다.

위(見義不爲)는 무용(無勇)이라(의를 보고도 행하지

황해도 연백 출신인 양근환은 천도교인으로 1916 년 일본에 건너가 노동을 하면서 일본대학 전문부

않음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고 하여 자신의 기개를 드러냈다.

정치과에 입학했다. 1921년 2월 상순부터 민원식이 도쿄에 와서 참정권운동을 할 것이라는 소식이 연일

일왕의 궁성과 김지섭, 이봉창 의거

신문에 보도되고 있었다. 양근환은 2월 10일자 『중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무고한 조선인 수천

앙신문』에서 민원식이 도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

명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울분을 느낀 김

한 후 2월 14일에 박명련(박순천)을 통해 민원식이

지섭은 1924년 1월 상해에서 극적으로 도쿄에 잠입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도쿄 

  33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지인 『상해한문(上 海韓聞)』은 「이봉 창의사의 쾌거」라 는 ‘왜황(倭皇)과 5 천만 괴뢰를 전율 하게 한 쾌거’라고 보도하고 이봉창 의사의 약력을 게 재했다. 1월 10일 한국독립당은 선

이봉창 의사 사형판결을 전하는 호외(『오사카아사히신문』 1932.9.30)

언문을 발표하여

하여 궁성 앞 석교에서 폭탄을 투척했다. 비록 폭탄

제2, 제3의 이봉창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일제에

이 터지지 않아 미수로 체포되었지만, 이 사건은 일

경종을 울렸다. 중국의 각 신문에서는 “한국은 망하

왕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일제에 충격

지 않았다”, 또는 “장하도다. 한인” 등으로 이봉창의

을 주었다.

의거를 앞다투어 게재하였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후 궁성 석교 정문의 바깥문

일제강점기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청년들은 ‘의

에 해당하는 사쿠라다몬(櫻田門) 근처에는 이봉창 의

를 보고 행하지 않음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의열

사가 군중 속에 서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오전 11

투쟁에 투신했다. 그리고 그 지향하는 목적지는 일제

시 44분, 이봉창 의사는 육군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

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는 것, 즉 여운형의 제국호텔

후 궁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쿠라다몬 경시청 앞 모

연설에서 나타났듯이 “한국이 건설할 신국가는 민주

퉁이를 지나는 일왕이 탄 마차 행렬 중, 두번째에 폭

공화국”이라는 이상이었다.

탄을 던졌다. 이 마차에는 궁내대신이 타고 있었다. 마차의 일부가 부서지고 근위기병 승마 2필이 경상 을 입었다. 일왕은 첫 번째 마차에 타고 있어서 화를 면하고 궁성문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이봉창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9월 16일과 30일에 특별재판에 회부되어 대역죄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놀랍게도 불 과 열흘만인 10월 10일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이봉창 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건 직후인 1월 9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

34    

  2023년  4월

필자  윤소영 일본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대학원에서 인문과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에 서 강의했으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직했다. 현재 국가보훈처 연구원으로 국가보훈 업무에 힘을 보태고 있다. 전공분야는 근대한일 관계사와 일본지역 독립운동사이다.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한국독립운동과 블라디보스토크

재러 한인사회와 국외 독립운동의 중요한 중심지

권업회 · 대한광복군정부 ·  대한국민의회 등 많은 인물 · 단체 맹활약

03

글ㅣ주미희(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블라디보스토크 

  35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한국근대사에서 러시아는 두만강을 사이에 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블라디보스크는 구한말 이후

이웃나라였다. 동북아시아의 끝자락 러시아 연해주의 중심은 유럽풍의

1910년대에 걸쳐 한국 독립을 가

이국적인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어로 “동

져올 근거지로서 위상을 가졌으

방을 지배하다”를 뜻하며, 해삼위(海參威)로 불렸다. 블라디보스토크가

며, ‘원동의 서울’이라 불리기도 했

속해 있는 연해주는 예로부터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의 흥망성쇠 역사가

다. 또한 재러 한인사회와 국외 독 립운동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블 라디보스토크는 1922년 러시아 내전이 종결되기까지 반일·반제국 주의의 기치아래 뜨거운 한인 독

있는 한민족의 고토(故土)로서 한인들이 뿌리 깊은 역사적 연고 의식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강동(江東)’이라고 해서 ‘서강(西江)’ 북간도와 구별 하기도 했다. 한인들은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 시베리아 지역을 ‘원동(遠 東)’이라고 했다.

립운동의 역사가 펼쳐졌던 공간이

한인 사회의 형성과 블라디보스토크

었다.

1860년대 이래 생계를 위해 이주해 간 함경도 농민들과 영세 농민들 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연해주 일대에 한인 마을들을 개척하였다. 블라 디보스토크에 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73년 군항(軍港)이 건 설되면서부터였다. 1893년 블라디보스토크시는 한인 거주지로서 한인 촌 1구를 설정해 주었다. 이곳이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Koreskaya slabodka), 즉 한인촌이라 불렸던 한인 최초의 마을 개척리였다. 개척 리는 을사늑약 이후 국치를 전후해 신채호, 장지연, 이강, 홍범도, 유인 석 등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운집한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는 계동학교 등의 한인학교와 『해 조신문』, 『대동공보』 등 한인 언론 기관이 위치해 있었다. 1911년 개척리에 콜레라가 창 궐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3월 29 일 위생실행위원회 결의를 거쳐 개척리를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 라는 ‘한인촌 이전에 관한 고시’를 발표하였다. 개척리의 한인들은 신개척리로 옮겨갔다.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톡의 개척리 거리

36    

  2023년  4월

이 신개척리(新開拓里)를 ‘새로운

한인 마을’ 이라는 의미로 노바야 카레이스카야 슬

가 있다. 1908년

라보드카(Novaya Koreyskaya Slavodka), 즉 신한

말 이후 연해주

촌(新韓村)으로 불렀다. 1914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의병의 지도자들

여행했던 이광수는 『그의 자서전』에서 신한촌을 “해

은 독자적인 항

삼위 시가(市街)를 지나가서 바윗등에 굴 붙듯이 등

일전의 비효율성

성이에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는” 마을로 회상하

을 공감하고 통

기도 하였다.

합군단을 추진하

블라디보스토크는 1910년대 서간도와 더불어 망

였다.

명한 한인 민족운동가들이 활동한 중요한 국외 독립

유인석, 이상설,

운동 근거지였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독립

이범윤 등이 중심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906년이었다. 망국(亡國) 직

이 되어 1910년 6

전 의병들이 집결하여 벌인 구국항일전은 국외 민족

월 21일 블라디보

독립운동의 연원이 되고 있다. 연해주 의병은 한인

스토크 아무르만

사회의 중심인물로 신망이 두터웠던 최재형이 을사

의 맞은 편 암밤비(Ambambi)의 자피거우(Zapigou)

늑약 이후인 1906년 이범윤과 함께 항일의 기치를

에서 연해주의 의병 계열인사 150명이 집결하여 유

표방하면서 두드려졌다. 1908년 최재형은 이위종,

인석을 도총재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

안중근, 이범윤 등과 함께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

였다. 항일 의병부대들은 국내로 진공하여 국내의

였다. 동의회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지회(支會)를 설립

의병부대들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결전을 치르고자

했으며, 교육에 의한 구국 정신의 함양과 실력 양성,

하였다. 홍범도, 이진룡, 우병열, 이남기 등의 의병장

단체 조직에 의한 동포의 일심(一心)을 방침으로 삼

들을 비롯하여 안창호, 이종호, 이갑 등이 참여하였

았다. 취지서는 “철환을 피치말고 붉은 피로 독립기

다. 그렇지만 1910년 8월 일제의 강압적인 ‘한일병

를 크게 쓰고 동심동력”하여 독립을 위한 무장 항쟁

탄’으로 국내진공작전은 좌절되었다.

십삼도의군 도총재 유인석(초상화, 한 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을 촉구하고 있다. 1908년 여름에 동의회의 의병부대는 전제익, 우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 전후 많은 단체 결성돼

덕순, 엄인섭, 안중근 등이 지휘하는 부대를 조직하

1910년 8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문 『달레카

고 국내진공유격전을 전개했으나, 병력이 우세한

야 오크라이나(Dalekaia Okraina)』 에 한일강제병

일본군에 밀려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러시아 당국

합을 알리는 비통한 기사가 실렸다. 블라디보스토크

의 탄압으로 인해 동의회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한인촌 개척리 한민학교에 한인 200여 명이 집결하

1905년 이후 연해주에서 활동하였던 항일 의병세력

여 ‘적의 죄상을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

을 결집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벌였다는 점에서 의의

(聲彼之罪 明我之寃)’라는 뜻의 성명회(聲明會)를 조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블라디보스토크 

  37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둘러싸고 일본과 1907년 제1차 협약, 1910년 제2차 협약을 체결하여 외교적으로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1904년 러일전쟁패배 후 반일감정을 갖고 있던 다 수의 러시아인들은 한국독립운동에 우호적이었다. 1911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러 시아 연흑룡주(沿黑龍州) 총독부의 공식 승인을 받 아 합법적인 한인 자치기구인 권업회(勸業會)가 창립 되었다. 러시아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집결한 망명한 한인 민족운동가들이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동휘, 이 성명회 취지서(독립기념관 제공)

동녕, 이상설, 김립, 이종호, 정재면, 홍범도, 오주혁, 윤해, 감하구 등을 비롯하여 러시아 국적을 가진 최

직하였다.

재형, 감학만, 홍병일, 김와실리 등이 참여하였다. 권

“대한의 국민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

업회는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한 러시아 당국의 정책

세하고 성취” 하고자 하였다. 성명회 선언서에는 각

을 존중하고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표면적으

지 한인 지도자 8,624명이 서명하였으며, 세계 만국

로는 실업과 교육의 권장과 증진을 표방하였다. 그

에 ‘한일병합 무효’ 선언서를 전달하였다. 한국과 수

러나 실제로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목표로 한 정치단

교를 맺은 구미열강에게 러시아, 프랑스어로 번역되

체였다.

어 발송되었다. 성명회는 각국의 신문사 등 유력한

권업회의 중앙본부는 신한촌에 두었으며 하바롭

언론기관에도 병합 무효를 선언하는 한인의 결의문

스크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지회와 분사무소(分事務

을 보내서 보도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

所)를 두었다. 권업회는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한인

나 성명회는 일본의 항의를 받은 러시아에 의해 강

자치기관의 지위를 부여받아 한인들의 국적 취득 대

제로 해산 당했다. 주요 참여 인사였던 이범윤, 김좌

행, 러시아어 교육, 인구조사 등 행정 기능을 담당하

두, 이남기 등 7명은 ‘항일운동의 괴수들’이라 하여

였다. 1911년 초에 연흑룡주 총독으로 부임한 곤닷

이르쿠츠크로 추방되었다. 한국병합 기사를 게재한

찌(Nikolay Lvovich Gondatti)는 권업회를 적극 후

한글신문 『대동공보』도 폐간되었다.

원하였다. 권업회의 명예회장이었던 곤닷찌는 1912

1910년대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세력 범위를 확

년 2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3천여 명

장해 나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한인

이 운집한 환영식에서 한인들의 사회·교육·문화적

독립운동가들이 지방 당국자들의 보호와 후원을 받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한국을 사

으며 현지의 일제에 반대하는 혁명 세력들과 적극

랑하지 않는 한국인은 러시아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적인 연대 활동을 모색하였다. 러시아는 만주문제를

것이다”라고 하여 한인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38    

  2023년  4월

권업회는 1910년대 대표적인 항일민족 언론지

의 한인지도자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권업회 교육 사업의 목적

들은 추방명령

은 민족주의 교육을 통한 조국독립의 인재를 육성하

을 받았다. 같

는데 있었다. 권업회가 설립한 신한촌의 한민학교는

은 해 9월 초에

애국가, 대한혼(大韓魂), 국기가(國旗歌), 한반도가(韓

는 재정궁핍 등

半島歌) 등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노래만

여러 가지 난관

을 불렀으며,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민족주의 교육

을 극복하고 발

의 중추기관으로 성장하였다. 항일 민족의식을 함양

행되던 『권업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권업회는 제1차 세계대전

신문』도 폐간

의 발발로 강제해산되기 전인 1914년 여름까지 한

되었다.

인들이 거주한 13개 지역에 지방조직을 설립하였으 며, 회원은 8,579명으로 명실공히 재러 한인들의 대 표 기관이었다.

이상설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주도한 이동휘. 후일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러시아 사회주의혁명 한인 사회에 큰 영향 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은 한인 독립

1914년은 러일전쟁 10주년의 해였다. 블라디보스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17년 6월 시베리아

토크에서 이동휘, 이상설, 이종호, 정재관 등은 연합

와 러시아 원동지역의 한인대표 96명은 연해주 니콜

대회를 개최하고 비밀무장 항일단체인 ‘대한광복군

스크-우수리스크(Nikolisk-Ussurisk)에서 전로한족

정부’를 조직하였다. 제2차 러일전쟁이 발발할 것이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귀화 한인들, 즉 원

라 예상하고 러시아와 연합하여 일본과 독립전쟁을

호인들은 러시아 내에서의 권리 확보와 자치 확대를

벌일 계획을 추진하였다. 초대 정도령(正都領)은 이상

위하여 고려족중앙총회를 결성하였다. 우스리스크

설, 책임서기는 계봉우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상설

에서는 고려족중앙총회의 기관지로 『청구신보』를,

이 사임하여 2대 정도령 이동휘를 중심으로 활동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신한촌민회의 기관지격으로

였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비밀리에 독립군을 편성하

『한인신보』를 창간하였다. 조완구, 박은식, 윤해, 남

고 연해주와 북간도에 3개 군구(軍區)를 설치하였다.

공선 등이 주필로 활약하였다.

북간도 왕청현 라자구(羅子溝)에 장교 양성학교인

이 총회는 1918년 1월 초 하바롭스크에서 비입적

사관학교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非入籍) 한인과 귀화 한인을 불문하고 한인의 민족

발발하자 1914년 8월 1일 러시아 당국이 계엄령을

단체로서 전로한족중앙총회로 확대되었다. 전로한

선포하면서 독립전쟁의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족중앙총회의 이목을 크게 집중시킨 것은 파리강화

1914년 초 최재형 등 한인들이 준비해 온 ‘한인 러시

회의에 파견할 대표를 선발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한

아 50주년 기념식’ 행사도 무산되었으며, 권업회 등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파리강화회

한인 단체들이 해산되었다. 이동휘를 비롯한 36명

의가 개최되자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윤해, 고창일을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블라디보스토크 

  39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➊ ➊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 ➋  우수리스크에 있는 전로한족중앙총회 건물

파리강화대표회의의 대표로 파견하였다. 전로한족

받는데 성공하였다.

중앙총회는 한인사회의 자치를 신장시키는 한편, 제 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조선독립방략을 집중 논의

국내 3 · 1운동 호응, 이후 ‘4월 참변’으로 독립운동

하면서 ‘전 민족적인 임시적 중앙기관’의 위상을 표

큰 타격

방한 대한국민의회로 확대·발전되었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 신

대한국민의회는 의장 문창범, 부의장 김철훈, 서기

한촌의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11개국 영사관

오창환, 선전(宣戰)부장 이동휘, 외교부장 최재형, 재

과 6개 러시아 관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독

무부장에는 한명세를 선임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립만세운동을 벌였다. 46세 이상 74세까지의 남녀

재러 한인 대표기구로서 뿐만 아니라 서북간도와 일

노인으로 구성된 노인단(老人團)은 1919년 3 · 1운동

부 국내에까지 영향을 주었던 독립운동의 중추기관

이후 동지규합과 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신한촌에서

으로 활동하였다.

조직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같은 시기 일부 한인 민족운동가들은 사회주의 이

‘대한국민 노인단 대표 김치보 외 20명’ 명의의 한국

념을 수용하였다. 1918년 5월 이동휘, 깁립, 유동열,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다. 단원들을 국내로 파견하

이인섭, 이한영, 김알렉산드라, 박애 등이 한국 최초

여 서울 보신각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

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이들

며, 의혈 투쟁을 전개하였다. 65세의 강우규는 9월

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옹호와 협조가 조선독립 달

남대문 역에서 새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

성의 길이라 생각하였다.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

탄을 던졌다. 조선총독 처단은 실패하였지만, 일제

크 신한촌에서 대표자회의를 열어 박진순, 박애, 이

수뇌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강우규는 1920

한영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

년 11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40    

  2023년  4월





➌  신한촌의 1920년 3월 1일 3 · 1운동 1주년 기념행사 ➍  4월참변 때 희생된 최재형

1918년 4월 일본은 시베리아 일본 거류민을 보호

토크의 대한국민의회, 한인사회당, 노인단 등의 주요

한다는 구실로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하였다. 일본군

간부들은 러시아혁명 세력의 영향권인 흑룡주와 만

은 1919년 말 러시아 혁명 세력이 득세하면서 위기

주 혹은 농촌 지역으로 도피해서 재기를 모색했다.

에 직면했다. 이에 러시아혁명군의 무장을 해제하

한말 이후 1910년대에 걸쳐 한국 독립을 가져올

면서 한인들 역시 일본군의 주공격 대상이 되었다.

근거지로서 위상을 가졌으며, ‘원동의 서울’이라 불

1920년 4월 신한촌을 기습하여 한민학교 등 주요 건

리기도 했던 블라디보스토크는 재러 한인사회와 국

물을 불태우고 한인들의 집들을 전소시켰다. 당시

외 독립운동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전일, 채성하 등 다수의 한인 지도자들이 체포되었

는 1922년 일본군이 철수하고 러시아 내전이 종결

다. 중국 상해의 『독립신문』은 일본군이 아녀자와 아

되기까지 반일· 반제국주의의 기치아래 뜨거운 한인

이들까지 무자비하게 체포하는 등 블라디보스토크

독립운동의 역사가 펼쳐졌던 공간이었다.

에서 체포된 한인이 380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니 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는 일본 헌병대가 보명 1소 대의 지원을 받아 가택을 수사해 76명을 체포했다. 이 가운데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4명이 4월 7일 일본군에 의해 처형당했다. 1920년 4월 4일~5 일 밤, 일본군이 연해주 일대에서 러시아혁명세력과 한인들을 대상으로 체포, 구금, 학살을 자행한 ‘4월 참변’으로 인해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 일 대 한인 독립운동의 기반이 파괴되었다. 블라디보스

필자  주미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고 있 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 구 분야는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사이다. 「이용의 민족운동 연 구」, 「최재형 연구의 현황과 향후 과제」 등의 연구 논문이 있다.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블라디보스토크 

  41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한국독립운동과 샌프란시스코

미국 본토 입국의 첫 관문으로 1938년까지 독립운동 거점 도시

공립협회 · 대한인국민회 ·  흥사단 활동, 장인환·전명운 스티븐스 처단의거 일어나 글ㅣ홍선표(나라역사연구소 소장)

42    

  2023년  4월

04

미국 본토 입국의 첫 관문 한국인의 미국 입국의 관문은 먼저 하와이를 첫 번째로 떠올리게 한

대한인국민회는 민족주의의 이념으

다. 대한제국이 공식 이민을 시행하기로 하면서 하와이가 한국인의 첫

로 미주 한인사회의 안녕과 자치 그

번째 이민지로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와이의 이민이 한국인

리고 조국 독립을 최고의 목표로 삼

의 미국 입국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하와이는 미국의 준주(準州)

았다. 그 조직은 샌프란시스코에 본

로서 하와이인들에게 미국 시민의 권한을 주었지만, 미국 본토와는 엄 연히 구별된 곳이었다. 하와이가 완전히 미국의 주로 편입된 때가 알래 스카와 함께 1959년임을 생각할 때 그 전까지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을 비롯한 미국 비시민권자들은 여전히 하와이 이민당국의 허가를 받고 미국 본토로 입국해야 했다.

부를 둔 중앙총회 산하에 북미 · 하와 이 · 멕시코 · 시베리아 · 만주 등 5개 지 역에 지방총회를 두었으며, 그 밑에 116개소의 지방회를 두었다. 1915 년경까지 해외 한인 독립운동의 중추 적인 기관으로 활동했다. 미국 본토

1945년 이전 한국인 이민자나 유학생, 그리고 방문자들이 해상(海上)

입국의 관문인 샌프란시스코는 해방

으로 미국에 입국하기 위한 첫 관문은 미국 서부의 경우 샌프란시스코

이전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 첫 발을

이고 동부의 경우 뉴욕이다. 이들은 샌프란시스코의 천사도에서, 뉴욕

대딛는 곳으로 마음 설레는 향수를

의 엘리스섬에서 각각 사전 검열을 받고 입국했다. 두 지역 가운데 한국 인들의 주된 입국의 통로는 단연 샌프란시스코였다. 한국인들의 경우 대부분 태평양을 건너 올 수밖에 없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미국 서부로 의 입국이 동부 쪽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불러일으키는 도시였다. 1938년 로 스앤젤레스로 거점을 옮길 때까지 한 국독립운동의 요람으로 오랫동안 기 억될 도시이다.

한국인들은 언제부터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미국에 들어왔는가.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다음 1883년(고종 21 년) 9월 2일 전권대신 민영익을 중심으로 한 11 명(8명: 한국인, 3명: 미국인, 중국인, 일본인)의 보빙사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보빙사는 샌프란시스코의 팰리스호텔에서 1주일간 머물 다 미국 동부로 떠났는데, 최초의 한국인들이 자 대표단이 샌프란시스코에 첫 발을 내디뎠다 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미국 이민국 통계에 따르면 1894년 김신도 등 4명, 1895년 박에스더 등 5명, 1896년 김 태준 등 9명을 비롯해 1909년까지 총 218명 의 한국인들이 매년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미국

1883년 푸트 미국공사 조선 부임의 답례로 미국에 파견된 외교사절단 보빙사 일행.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샌프란시스코 

  43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에 입국한 것으로 나온다. 이들 초기 입국자들 대부

란시스코는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아주 심했다. 미

분은 중국(홍콩, 상하이)이나 일본(고베, 나고야, 요

국 본토에 동양인들, 특히 중국인 노동자들이 증가

코하마)을 경유해 들어온 인삼장사들이었고 일부는

하자 미국 백인들은 중국인들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유학생들이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1860년대 중엽부터 미국 이민을 시작한 중국인들은

부터는 이같은 미국 입국자들은 급격히 줄어드는데,

1870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총인구의 십분의 일을

그것은 일본이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한 후 한국인들

구성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주는 1882년 중국인배

의 도미를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척법을 제정하고 매 10년마다 재개정하여 중국인들

미국측 입국 통계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1885

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수많은 차별 조

년 6월 12일 갑신정변에 실패한 서재필, 서광범, 박

항으로 중국인들을 배척했다. 1905년에는 샌프란

영효, 변수, 이규완, 정난교, 임은명의 7명이 망명자

시스코와 오클랜드에서 ‘일본인과 한국인 반대동맹’

신분으로 샌프란시스코 도착했다. 이들 가운데 서재

을 조직해 한국인들을 노골적으로 차별 대우했다.

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1년 정도 생활하다 홀렌백

1913년에는 캘리포니아 외국인토지법을 만들어 동

의 도움으로 미국 동부의 윌크스베리로 떠났다.

양인들은 땅과 집을 소유할 수 없고 땅 임대도 3년을

1903년 1월 하와이로 이민 간 한국인들은 1905년

넘지 못하게 했다. 1924년에는 동양인배척법을 제

부터 미국 본토로 입국하기 시작했다. 1905년 2월부

정해 동양인의 시민권과 소유권의 금지를 강제했다.

터 미국의 대북부철도회사와 북태평양철도회사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면서부터 하와이 한국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단체

인들은 하와이보다 더 나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공개적으로 자행된 동양인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조건을 듣고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의 샌프란시스

차별 대우 속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아가던 한국인

코로 입국했다. 그리하여 1905년 400여 명, 1906년

들의 생활은 비참하고 무질서했다. 이를 보다 못한

450여 명, 1907년 150명이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입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1903년 9월 23일 동

국했다. 하지만 1907년부터 미국 입국자의 수는 급

지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초로 상항(桑港)한

격히 줄었고 이후 극히 적은 수만이 미국 본토로 이

인친목회란 단체를 결성했다. 1902년 10월 14일 유

동하였다. 이것은 미국 정부가 행정명령 제589호를

학을 목적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신혼의 안창

발동하여 한국인과 일본인의 본토 이주를 금지한 때

호가 자신을 위한 학업보다 한인들의 생활과 정신을

문이고, 1907년 미 · 일 간에 소위 신사협정을 맺어 한

개선하여 단합을 모색하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하고

국과 일본에서 이민 오는 것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단체를 결성한 것이다. 그런 후 안창호는 한인들에

한국인 이민자들은 미국 본토의 첫 관문인 샌프란

게 질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리

시스코에 무사히 도착했더라도 샌프란시스코란 도

버사이드로 옮겨 그 곳 오렌지농장에서 한인들과 함

시에서 안정적으로 거주하기란 쉽지 않았다. 샌프

께 노동하며 1905년 4월 5일 공립협회(총회장 안창

44    

  2023년  4월

호)를 창설했다. 리버사이드에서 창설한 공립협회는 1905년 1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총회관 개 소식을 거행하여 샌 프란시스코를 중심 으로 한 활동을 펼쳤 다. 공립협회는 1905





➊  1912년 LA부근 오렌지농장에서 일하는 안창호 ➋  안창호와 공립협회 동지들(1906년. 앞줄 왼쪽부터 송석준, 이강, 안창호, 뒷줄 임준기, 정재관, 안창

호선생기념사업회 제공).

년 11월 20일 샌프란시스코의 938 퍼시픽 스트리트

합한 뒤 국민회와 통합운동을 추진해 1910년 2월

(Pacific Street)에서 기관지 『공립신보』를 창간하여

10일 대한인국민회를 탄생시켰다. 이로써 미주 지역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운동을 선도하였다.

의 민족운동은 미국 본토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하

공립협회는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 대 지진이 발생하여 공립협회총회관이 소실되어 인근

와이에는 호놀룰루를 중심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 했다.

의 오클랜드로 옮겨야 했다. 그러다 1907년 5월 다

대한인국민회는 민족주의의 이념을 가지고 미주

시 샌프란시코로 돌아와 부케넌, 오스틴, 새크라멘토

한인사회의 안녕과 자치 그리고 조국 독립을 최고

의 스트리트에서 임시 회관을 열었다가 1908년 8월

의 목표로 삼았다. 그 조직은 샌프란시스코에 본부

938 페리 스트리트에 집을 얻어 정착했다.

를 둔 중앙총회 산하에 북미 · 하와이 · 멕시코 · 시베리

1906년 1월 샌프란시스코에는 파사데나에서 설

아 · 만주 등 5개 지역에 지방총회를 두었으며, 그 밑

립한 대동교육회가 대동보국회로 개명해 활동하기

에 116개소의 지방회를 두어 제1차 세계대전이 진

시작했다. 대동보국회는 1907년 10월 3일 기관지

행 중인 1915년경까지 해외 한인 독립운동의 중추

『대동공보』를 창간하고 『공립신보』와 함께 샌프란시

적인 기관으로 활동했다.

스코에서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

1909년 2월 1일 공립협회는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방총회는 1914년 캘리포니아주 당국으로부터 법인

통합운동을 성사시켜 미주 한인 최초로 통합단체인

관허를 얻어 정부적 기능도 갖추어 한인들의 생명과

국민회를 탄생시키고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 바꾼

재산 및 권익을 보호하고 증진하는데 앞장섰다. 이

뒤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재미 한인의 민족독

에 따라 재미 한인들은 자신의 안전과 권익을 위해

립운동을 선도했다. 국민회 설립을 방관하던 대동보

스스로 대한인국민회 회원이 되었고 국민의무금이

국회는 1909년 8월 시애틀에 있는 동맹신흥회와 병

란 이름으로 회비를 납부하였다. 그러나 대한인국민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샌프란시스코 

  45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의 1368 W 제퍼슨스트리트에 신축한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낙성식을 거행하여 오랜 세월의 샌프시스코 시대를 마감했다.

상항한인감리교회와 흥사단 기독교 신앙을 가진 샌프란시스코의 한국인들은 중앙총회 제1회 대표원 의회에 참가한 안창호(왼쪽 세번째)를 비 롯한 대한인국민회 대표원들(1913년, 한국학 중앙연구원 제공).

1903년부터 개인 집에서 가정 예배를 통해 신앙생 활을 꾸리다 1905년 7월 미국 북감리교회의 도움을 받아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상항한인감리교회 를 시작했다. 상항한인감리교회는 샌프란시코 한인 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위한 영적 공동체였지만, 여 기에 머물지 않고 민족운동의 요람이자 고향의 향수 를 달래주는 마음의 안식처였고, 청년운동과 국어학 교 설립을 통해 한인 청년들과 2세들에게 민족의식 을 고취하는 요람으로 활동했다. 미국이 일본과 태

1916년 흥사단 연례대회 장면. 앞줄 가운데 안창호, 오른쪽이 안 창호 부인 이혜련 여사이다. 건물 중앙에 흥사단의 영어 약자인 YKA(Young Korean Academy)와 그 오른쪽에 한문으로 ‘興士 團’이 새겨져 있었다.

평양전쟁을 개시한 1942년부터는 미군에 참전한 재 미 한인 2세 청년들을 위한 안전과 미국의 전쟁 승리 를 기원하고 돕는 중심지로 활동했다. 상항한인감리교회는 미국인 교회를 빌리거나 대

회는 1921년 3월 22일 하와이지방총회가 자체를 해

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관에서 예배를 보다 1930

소하여 대한인교민단으로 바꾸어 본회에서 떨어져

년 6월 1일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 가까운

나가자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인국민회

1123 파웰스트리트에 교회를 신축했다. 당시 교인

북미지방총회는 1923년 1월 헌장을 개정해 중앙총

들은 100여 명에 불과했는데 이런 가운데 상항한인

회제도를 폐지하고 ‘대한인국민회총회’란 이름으로

감리교회가 교회 건물을 신축할 수 있었던 것은 미

바꾸었다.

국 남감리교 선교부의 지원 외 오클랜드를 비롯한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던 대한인국민회총회는 1936년 7월 4~5일 개최한 특별대의회에서 재미 한

캘리포니아 각처 한인들의 자발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들의 인구 중 삼분의 일 이상이 모여 있는 로스앤

민족운동 단체 외 샌프란시스코에는 안창호가 중

젤레스로 본부를 옮기로 하고 총회관을 신축하기로

심이 되어 1913년 5월 13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결정했다. 그 결과 1938년 4월 17일 로스앤젤레스

총회관에서 흥사단이 창립되었다. 흥사단은 단원들

46    

  2023년  4월

의 인격과 신의를 고양하는 수양단체로 활동하였고 단원들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의 일선에 나섰다. 흥사단은 1915년 단소를 로스앤젤 레스로 옮기면서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민족독립운동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것 중 가장 오래 기억될 ➌

한국독립운동은 1908년 3월 23일 월요일 페리부두 에서 거행된 장인환·전명운(1884~1947)의 스티븐 스 처단의거이다. 이 일로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➌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 의거 보도 기사(샌프란

시스코 크로니클, 1908.3.24) ➍  스티븐스 처단 의거의 주역 장인환(오른쪽)과 전명운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상항한인공동회를 결성하 고 두 의사의 재판을 돕는데 앞장섰다. 전 미주 한인

장으로 한 해외한족대표단을 구성했고 대한민국 임

들은 온 힘을 다해 의연금으로 지원하였고, 심지어

시정부는 이승만을 단장으로 한 임시정부대표단을

일본과 국내에서까지 의연금을 보냈다. 장인환·전명

구성해 서로 독자활동을 펼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운의거는 샌프란시스코란 지역적 의거로 끝나지 않

못했다. 오히려 이승만은 얄타밀약설을 제기하여 스

고 전 미주 한인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힘의 결집

스로 국제정치활동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실은 국민회를 탄생시켰다.

미국 본토 입국의 관문인 샌프란시스코는 해방

샌프란시스코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와

이전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 첫 발을 대딛는 곳으로

자체의 이름을 바꾼 대한인국민회총회를 중심으로

가장 마음 설레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도시이자,

한인 동포들의 권익을 보호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1938년 로스앤젤레스로 거점을 옮길 때까지 한국독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

립운동의 요람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도시이다.

와 파리강화회의 한인 대표 파견활동, 국내 3 · 1운동 발발 소식을 들은 직후에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를 향해 선전활동을 개시했는데, 독립의연, 21례금, 애국금 등의 명목으로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필자  홍선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왔다. 해방 직전인 1945년 4월 미국의 주도로 열린 샌프

한양대학교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란시스코회의(1945.4.25.~6.26)는 재미 한인들에게

학교 연구교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을 역임했다.

가장 주목 받은 국제대회였다. 그러나 한인 대표 파

현재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대한민국 공군 역사자 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공·저서로 『서재필 개화 독립 민주의 삶』, 『자

견을 둘러싸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한시대를 단

주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재미한인의 꿈과 도전』, 『대한민국 국방사』(공 저), 『Koreans in Central Europe』(공저), 『3 · 1운동과 국제사회』 (공저) 등이 있다.

Special theme

 • 한국독립운동과 샌프란시스코 

  47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 건국훈장 대통령장 김동삼(金東三) 선생

독립운동 단결 · 통합과 만주 독립운동 주도한

핵심공적

‘만주벌의 호랑이’ 글  편집부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안동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남만주 경학사, 신흥학교 등 에서 활동했다. 백서농장을 운영하며 독립전쟁을 준비했 으며, 서로군정서 참모장, 한 족회 간부, 국민대표회의 의 장, 통의부 총장, 정의부 군사 위원장, 혁신의회 간부 등으 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

주요약력

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

●  1878년  6월 23일  경상북도 안동군 출생

보리라.” 그가 남긴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화장하여

●  1914년  남만주 서간도 백서농장 장주

한강에 뿌렸다.

●  1923년  1월 18일  국민대표회의 의장 피선 ●  1923년  8월  대한통의부 총장 ●  1924년  정의부 참모장, 군사위원장 ●  1931년  10월 12일  중국 하얼빈에서 체포됨 ●  1937년  4월 13일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순국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川前洞,

도한 것이 협동학교(協東學校) 설립이었다.

내앞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

1907년 3월 류인식 · 김후병(金厚秉) · 하중환

이며, 본명은 긍식(肯植)이고, 종식(宗植)이라

(河中煥) 등과 함께 내앞마을에 3년제 중등

는 이름도 썼다. 호는 일송(一松)이고, 김동삼

과정인 협동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에 앞장

은 만주로 망명한 뒤 사용한 이름이다. 집안

섰다. 내앞마을 의성 김씨 종손 김병식(金秉

학문을 이어받고,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植)이 교장을, 김동삼이 교사를 거쳐 교감을

에게 유학을 배웠다.

맡았다. 협동학교는 영남 사회가 변하는 교두보

48    

안동 협동학교 설립, 교사로 교육 · 계몽운동 주도

이자, 새로운 깃발이었다. 당시 『대한매일신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상경했던

보』나 『황성신문』은 협동학교 설립과 발전

류인식(柳寅植)이 신문물을 접하고 돌아와

상을 보도하고 격려하였다. 유림의 압력과

계몽운동을 시작했지만 유림의 반발로 목

예천의병의 공격으로 교사들이 폭살당하는

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1907년 3월 다시 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협동학교는 젊은 신지

  2023년  4월

식인을 육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이들이 경북 지역 곳곳으로 계몽운동을 확산해 나 갔다. 서울에서 발행된 신문에서 격려 글을 게재하였고, 신민회(新民會)에서 교사를 파 견하였던 사실은 이 학교에 쏠린 기대감을 잘 보여주었다. 협동학교 경영 일선에 나서는 한편, 비밀 결사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신민회와 긴밀한 관계 를 맺고 협동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서상일

김동삼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

과 안희제 등을 중심으로 한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경상도 일원의 계몽운동가들과 연

사들과 이회영 일가를 비롯한 신민회 회원들

대하여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이 사실은 서

이 힘을 합쳐 벌인 사업이었다.

울과 대구, 그리고 안동을 잇는 큰 틀에서 활 약한 사실과 계몽운동 노선 가운데서도 진

남만주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개척과

취적이고 강성을 지닌 비밀결사체에 가담하

독립운동 헌신

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 ‘동삼성(東三

김동삼은 1910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1

省)’에서 따서 김동삼, 동생은 김동만(金東滿)

월 사이에 김대락 · 이상룡 등 안동의 주요인

으로 바꾸었다. 1914년에 백서농장(白西農

물들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출발하였

庄)을 건립하고, 장주(庄主)가 되었다. 신흥학

고, 뒤이어 망명객이 줄을 이었다. 안동에서

교 1~4회 졸업생들과 분교의 노동야학 졸업

추풍령까지 걸어가고, 거기에서 기차를 이용

생 등 385명을 인솔하고, 퉁화현(通化縣) 팔

하여 신의주로 이동하였다. 걸어서 압록강을

리초(八里哨) 깊은 산속에 들어가 둔전형 군

건넌 뒤, 만주에서는 수레로 이동하는 멀고

대를 창설한 것이다.

험한 망명길이었다.

1919년 3월 초 지린(吉林)에서 민족대표

1911년 1월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류허현

39명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

(柳河縣) 삼원보(三源浦)에 도착하여 신흥학

었는데, 이상룡과 더불어 서명에 참여하였다.

교를 설립하고, 경학사(耕學社) 결성에 참가

이들 39명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인물을

하는 등, 초대 사장 이상룡을 도와 독립운동

비롯하여 국외로 망명한 독립운동의 지도자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이는 안동 출신 인

급 인물들이었다.

이달의 순국선열 • 김동삼 선생 

  49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이 선언 발표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4 월 10일부터 이튿날까지 열린 회의에 참석한 2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를 수립하는 데 참가하였다. 이후 국무총리 를 비롯하여 각부 총장 인선까지 마친 다음 활동 본거지인 서간도로 되돌아갔다. 한족회는 부민단의 류허 · 퉁화 · 싱징현(興京 顯) 대표들이 1919년 4월 삼원보에서 결성하 였다. 김동삼은 서무사장(庶務司長)을 맡았다.

마포형무소 수감시 김동삼

1920년 여름부터 일본군 침략이 간헐적으

1923년 1월부터 5월 15일 사이 중국 상하이

로 자행될 때,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서 사

에서 열렸다. 국내외 지역대표와 단체대표

령관 지청천과 함께 300여 명의 서로군정서

400명 정도가 집결했는데, 의결권을 가진 대

독립군을 북간도로 이동시켰다. 7월 29일에

표가 130명을 넘을 만큼 규모가 컸다. 1921

는 부대를 안투현(安圖縣) 삼인방(三仁坊)에

년 이후 침체 현상을 보이던 독립운동에 활

주둔시키는 한편, 8월에는 왕칭현(汪靑縣) 서

력을 불어넣고 임시정부 쇄신 방안을 찾던

대파(西大坡)의 북로군정서를 방문하여 작전

이 회의에 서로군정서와 남만주 대표로 참석

을 논의하기도 했다.

하여 1월 18일에 의장에 선출되었다. 의장에

1922년 6월 한인 사회와 독립군 통합을 도

선출된 사실은 독립운동계에서 차지한 위상

모하기 위해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주도

을 확인해 주었다. 안창호와 윤해(尹海)가 부

하여 합의를 도출했으니, 그 결실이 통군부

의장이었다.

(統軍府)였다. 이후 8월 30일 전만한족통일회

1923년 5월 말부터 국민대표회의는 크게

(全滿韓族統一會)가 결성되고, 이 무렵 통군부

창조파와 개조파의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는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는

결국 6월에 들어 창조파가 가을에 새로운 정

통군부 교육부장을 거쳐 통의부 총장을 맡았

부를 수립한다는 목표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다. 청산리대첩 이후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

떠나버리는 바람에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

을 거친 다음, 만주 지역 군사 세력을 통합하

고 말았다.

려 했던 노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만주로 돌아온 1923년 가을, 만주 지역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는 작업이 급선

국민대표회의 의장 맡아 통합운동 앞장서 1921년 이후 준비되어온 국민대표회의가

50    

  2023년  4월

무로 대두되었다. 상하이에서 돌아오자마자 통합 작업에 매달렸다. 1924년 7월 10일과

10월 18일 10개 단체대표를 모아 전만통일 회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열었고, 의 장에 선임되었으며, 11월 24일 정의부(正義 府)를 탄생시켰다. 정의부에서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이후 국내외에 걸쳐 전개된 민족 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힘을 기울였 다. 이는 독립군 단체 위에 하나의 지도 정 당을 만들자는 것이고, 정부를 정당 중심으

안동 내앞마을 김동삼 생가

로 운영하자는 것이기도 했다. 그럴 경우 이

역에 국민부(國民府)가 출범함으로써, 민족유

념상 분화된 좌우 세력을 통합하는 운동이란

일당 계획은 무산되고, 1929년 5월 민족유일

의미를 가졌다. 1926년 10월 안창호와 원세

당재만책진회도 해체되었다. 이어서 1930년

훈이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7월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자 고문을 맡았다.

조직한 뒤에 상하이와 난징, 우한과 광저우

늘 통합운동의 핵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로 확산되어 갔고, 국내에서는 신간회가 조

김동삼은 결국 1931년 일본군의 만주침공

직되는 분위기에서 만주 지역에서도 민족유

직후 일본 영사관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일당운동이 진행되었다.

같은 안동 출신이자 사돈인 이원일(李源一),

1928년 5월 정의부를 대표하여 삼부통합

경북 영양군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인 남자현

회의를 개최하여,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南慈賢)과 항일공작을 추진하려고 하얼빈에

대통합을 모색했으나 실패하였다. 조직 결성

잠입했다가 붙잡힌 것이다. 하얼빈 주재 일

방법을 둘러싸고 이견이 표출되자, 새로운

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으며

통합 방법을 찾아 나섰다. 1928년 7월 삼부

고생하다가 국내로 압송되었다.

통일회의가 결렬되기 직전 정의부를 이탈하 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평 양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서울 마포형무소로 옮겨졌다가 만 59세가 되던 1937년 4월 13

만주 독립운동 전개하다 하얼빈에서 잡혀

일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평소 그를 존경하

옥중에서 순국

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자신이 머물

1929년에는 좌우 합작을 도모하기 위해 민

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장례를 치렀

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고, 중앙집행

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

위원장에 뽑혔다. 그러나 1929년 4월 같은 지

서하였다.

이달의 순국선열 • 김동삼 선생 

  51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 건국훈장 독립장 송병조(宋秉祚) 선생

한국독립당 · 한국국민당 활동

임시의정원 의장 두차례 역임한 ‘임시정부의 파수꾼’

글  편집부

“기미운동(己未運動)이 일어나 독립을 선언하고 … … 국내 동포의 의지(意旨)에 합응하여 자못 거국일치로써 성립하니 의정원이오 이 정부인데, 이 최고기관을 위하 여 많은 동지가 분투도 하고 많은 지사가 적에게 희생 도 되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기관이 금일에 이르러서 는 형세가 전과 달라진 데 대하여 유감천만이외다. 오 직 처음의 뜻을 굳게 잡아 더욱 분투할 따름이외다.”

핵심공적

평북 용천에서 3 · 1만세 시 위운동을 주도하고, 상하 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 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안 창호 등과 함께 한국독립 당을 결성하고, 김구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 여 임시정부를 옹호하였 다. 6년여 동안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주요약력 ●  1877년  12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 출생 ●  1919년  3월  평북 용천 만세 시위운동 주도 ●  1934년  1월~1939년 10월  임시의정원 의장 ●  1937년  8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 주도 ●  1941년  10월 15일  임시의정원 의장 재취임 ●  1942년  2월 25일  중국 충칭에서 순국

- 임시의정원 28회 정기회의 개원식 식사(式辭)에서(1935. 10. 19) -

서른여덟살에 목사가 되어 평북 용천 3 · 1운동 주도

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

1877년 12월 평북 용천군 양하면 중흥동

운동에 나섰다. 그해 10월 2일 대한국민총회

에서 태어났다. 호는 신암(新岩)이고 이명은

평의원에 선출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

영석(永錫)이다. 어려서 사숙(私塾)에서 한학

동을 선전하고 독립운동 자금 모집 등을 추

을 공부했고 한때 상업에 종사하다가 평양신

진하였다. 대한국민총회는 1919년 8월 평양

학교에 입학하면서 민족의식이 크게 성장하

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대한국민회의 본부로

였다. 평양신학교 입학시기는 정확하지 않은

서 각지에 조직된 지부인 향촌회, 군부회(郡

데, 1910년경으로 추정되며 1914년 졸업 이

府會)를 통할하였다.

후 목사가 되어 고향 인근 지역에서 선교활 동을 펼쳤다.

52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용천에

  2023년  4월

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활동 근거지를 중국 안둥(安東)으로 옮겼다. 1919

년 10월 20일 안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적십자 총회에서 회장 안창호(安昌浩)에 이

재무부 참사에 임명되어 국내에서 임시정

어 감사에 선임되는 등 상하이 교민의 친목

부로 전달되는 독립운동자금을 관리하였다.

과 권익 보호에도 앞장섰다.

1920년 4월에는 임시공채관리국 공채모집위

1921년 들어 내부 개혁의 실패와 알력으

원에 임명되어 평북 신의주와 고향인 용천군

로 영향력이 크게 약화된 임시정부의 개혁을

을 담당하며 임시정부의 재정 확충에 힘썼다.

위해 국민대표회 소집론을 제기하며 이에 적

이어 5월에는 임시정부의 지방선전부 선

극 나섰다. 5월 안창호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

전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국내와 상하이(上海)

소집을 촉구하는 연설회를 열었고 이어 이탁

간 선전대원의 접촉 연계와 선전물 홍보 활

(李鐸), 차리석, 남형우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

동을 담당하였다. 이륭양행을 운영하던 영국

기성회의 조직위원에 선출되어 국민대표회

인 쇼(George Lewis Shaw)의 도움으로 안둥

소집 준비에 나섰다.

에서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는데, 1920

국민대표회는 우여곡절 끝에 1923년 1월

년 7월 경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곤란을

부터 6월까지 상하이에서 열렸다. 신한청년

겪게 되었고 상하이로 피신하였다.

단 대표로 참여하여 안창호, 윤해, 신숙 등과 함께 부의장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고, 과거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 상하이로 이동하여 신한청년당 당원이 되 었는데, 정확한 가입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문제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곧 바로 사직하였다. 한편 1924년 5월에는 흥사단에 입단 원서

1921년 3월에는 손정도, 이원익(李元益), 김 병조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 敎陳情會)를 조직하여 국내외 각 교회에 한국 의 실정을 알리고 독립 지원을 호소하는 진 정서를 보냈다. 같은 해 4월에는 한중 양 국민의 친선과 대 일 공동항쟁을 목적으로 하는 한중호조사(韓 中互助社)를 설립하여 윤기섭(尹琦燮), 김홍서 (金弘敍), 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활동하였 다. 또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 기독교인이 설립한 삼일당교회를 지휘하고, 대한교민단 의사원에 당선되었다. 그해 12월에 열린 대

송병조 흥사단 입단 청원서(1934.5.2)

이달의 순국선열 • 송병조 선생 

  53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한국독립당 제1차 중앙집맹위원 전체촬영(1934년). 앞줄 왼쪽부터 김붕준 · 지청천 · 송병조 · 조완 구 · 이시영 · 김구 · 유동열 · 조소앙 · 차리석

를 제출하였고, 그해 11월 15일 안창호의 문 답에 통과하여 흥사단 단우가 되어 원동위원 부를 이끌어갔다.

통일동맹을 결성했다. 1933년 3월에 열린 임시의정원에서 국무 위원에 선임되어 재무장을 맡았고, 6월에는 국무위원회 주석에 선임되어 임시정부를 이

“이당치국, 당을 세워 나라를 다스린다”

끌어갔다. 한편 같은 해 4월에는 대한교민단

 안창호 등과 한국독립당 결성

이 정무위원회로 조직을 개편하면서 정무위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거 직후 임시정

원장에 임명되어 윤봉길의거 이후 임시정부

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저장성(折江省) 항

는 물론 한국독립당, 대한교민단 그리고 흥

저우(杭州)에 임시판공처를 정하고 옮겼다.

사단을 이끌며 1인 3, 4역의 역할을 맡았다.

이때 한국독립당 이사장으로 선임되어 당을

그러나 1934년 이후 통일동맹이 임시정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부의 폐지를 주장하며 단일당인 민족혁명당

기울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계기로

건설을 추진함에 따라 한국독립당의 조소앙,

중국내의 반일기운이 높아지면서 관내 항일

김두봉 등이 단일당 참가를 결정하자, 이에

단체의 전선통일이 필요했다. 이에 그해 11

임시정부 폐지를 반대하던 조완구, 차리석등

월 이유필, 김두봉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

과 함께 단일당 참여를 반대하며 한국독립

로 조선혁명당 · 한국혁명당 · 의열단 · 한국광복

당을 탈당하고 임시정부 사수를 고수하였다.

동지회의 대표들과 협의하여 한국대일전선

54    

  2023년  4월

어려운 시기에 임시정부 지키는 파수 꾼 역할 맡아 민족혁명당의 결성과 함께 임시정부 국무위원 7명 가운데 5명이 사임하면서 임시정부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나 마찬 가지였다. 이에 차리석 등과 함께 임시 정부 재건에 노력하였다. 한국독립당 광 둥지부장 김붕준 등과 연락하는 한편 이 시영, 조완구 등을 매개로 이동녕을 통 해 김구와 제휴하여 1935년 10월 임시 의정원 회의를 열고 김구, 이동녕, 이시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에 참석한 송병조(1940년 9월, 두번째줄 왼쪽 두번째)

영, 조완구를 새로 국무위원으로 선출했 다. 또 이동녕을 국무회의 주석으로 하 는 임시정부를 재건하고 재무장에 선임 되었다. 같은 해 11월 말에는 김구와 함께 민 족혁명당에 대응하여 임시정부의 여당 으로 한국국민당을 결성하고 이사장 김 구에 이어 이동녕 등과 함께 이사에 선 임되었다. 1937년 8월에는 난징에서 한국광복

임시정부장으로 치러진 송병조 장례식(충칭)

운동자 단체연합회를 결성하여 중국 관내 민

국광복군 창설에 기여했고, 9월 23일 국무

족전선의 우파를 통일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회의에서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임명되었다.

러나 일제가 난징을 침략하면서 임시정부는

1941년 10월에는 김붕준이 임시의정원 의장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정착하기까지 항저

에서 탄핵되면서 다시 의장에 선출되어 활동

우를 떠나 자싱(嘉興)에서 전장(鎭江), 창사(長

하다가 1942년 2월 25일 상오 10시 충칭 시

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棊江) 등 지로 고난의 대장정을 이어갔다.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긴 뒤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외교 교섭을 통해 한

내 토교(土橋)에서 향년 67세로 신병으로 서 거했다. 이튿날 상오 11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을 추서하였다.



이달의 순국선열 • 송병조 선생 

  55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향기나는 삶 이야기

한양대학교 정책과학대학 이호용 학장

희생도와 공헌도에 따른 국가보훈 원칙 중요

“승격 국가보훈부에 독립유공 관련 부서 설치해야” 글 · 사진  편집부

지난 2월 27일(월요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가보훈처를 국가보훈부로 격상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창설 62년만에 국가보훈처와 관련 단체, 유족 등의 오랜 염원이었던 국가보훈부 승격이 실현되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이후 국무회의 의결 및 대통령 재가를 거쳐 3월 초에 공포되었는데, 약 3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6월 초 국가보훈부가 공식 출범한다고 한다.

56    

  2023년  4월

지난 2월 27일(월요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가보훈

는데, 이 분야에서 9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2006

처를 국가보훈부로 격상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년 한국공안행정학회의 학술장려상, 국립강릉대 · 단

통과되어, 창설 62년만에 국가보훈처와 관련 단체,

국대 · 한양대에서 Best Teaching Award를 수상했다.

유족 등의 오랜 염원이었던 국가보훈부 승격이 실현

2009년부터 2011년까지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위원

되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이후 국무회의 의결 및

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2016년부터 2019년까지 국

대통령 재가를 거쳐 3월 초에 공포되었는데, 약 3개

민권익위원회 비상임위원을 지냈다. 법무부 · 국무조

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6월 초 국가보훈부가 공식 출

정실의 규제심의위원, 사법시험위원, 행정고시위원,

범한다고 한다.

변호사시험위원 등을 역임했다. 학회활동으로는 한

이에 행정법과 사회보장법의 최고 전문가중의 한 분인 이호용 한양대학교 정책과학대학장을 만나 의

국행정법학회 부회장, 한국공법학회부회장, 한국지 방자치법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견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3월 17일(금) 오후 한 양대 정책과학대 학장실에서 이학장을 만났다.

행정법 · 사회보장법의 중진 학자

이호용 학장은 한양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같은

이학장은 강의와 연구, 학교 보직(학장), 사회 봉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보건사

등 여러 업무로 공사다망한데도 귀중한 시간을 내주

회연구원 주임연구원, 법무부 법무자문위원회 전문

었다. 최근 국가보훈 정책과 순국선열에 대한 예우와

위원, 강릉원주대 법학과 · 단국대 법대 교수를 거쳐

보상 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들어 보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정책과학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

날카로운 법학자를 떠올린 면담자의 예상과는 달

주요 저서로는 『행정법입문』, 『법정책학이란 무엇인

리 따뜻한 미소로 맞이하는 이학장. 먼저 한양대학교

가 - 이론과 실제』(공저), 『사회보장 행정법의 구조

정책과학대학에 대해 소개해 주시라고 부탁했다. 보

적 특성』, 『산업기술보호법』이 있다. 2021년 아산재

통 사회과학대학이나 경영대학, 인문대학, 공과대학

단 연구지원을 받아 발간한 『디 지털헬스케어의 법적 쟁점과 과 제』는 2022년 세종학술우수도 서에 선정되었 다. 주로 행정법 과 사회보장법 을 연구하고 있

이학장의 국가보훈 관련 주요 논문과 보고서. 저서

『행정법입문』(삼영사, 2018)

향기나는 삶 이야기 • 한양대학교 정책과학대학 이호용 학장 

  57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향기나는 삶 이야기

등의 대학 학제에는 익숙한데, 왠지 ‘정책과학대학’은 생소한 느낌이 들 었기 떄문이다. 한양대학교에서 정책과학대학을 설립한 목적이 무엇인 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호용 학장은 의외로 쉽게 설명했다. “한양대 정책과학대학은 정책학과와 행정학과로 구성되며, 정책학 과는 국내에서 잘 볼 수 없는 특이한 학과입니다. 정책학과는 최고 정 책결정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최고 정책결정자가 되기 위해 서는 하나의 전공을 공부해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인문사회계의 주요한 전공, 예컨대, 철학(Philosophy), 정치 · 행정학(Politics), 경제학 학장실 교육목표 액자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학장

“보훈부로의 승격과 함께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보훈체계가 군 인을 중심으로 되어 있고, 다른 보 훈대상자들과 독립유공자들은 상황 과 입장이 매우 다르니, 독립유공자

(Economics), 법학(Law)을 모두 공부하는 융합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학과입니다. 이를 ‘PPEL 교육’이라 하는데요, PPEL은 영국 옥스퍼드대 학의 교육프로그램인 PPE에 L(Law)을 더한 것입니다. L을 덧붙인 것은 법이 정책을 설정하는 중요한 기준이자 근거이고, 법학은 사회과학 최 고의 학문분야라는 점과 더불어 한양대 정책학과가 50년 전통을 가진 한양대 법대의 후신이라는 점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과거 법대가 지금은 로스쿨로 바뀌었지요,” 한양대 정책대학은 국가 공공부문의 파워 엘리트 양성과 융복합 전문

보훈을 위해 별도의 행정 단위, 청

성을 갖춘 실용 엘리트의 양성을 장기비전으로 설정하고, 정책학과 · 행

(廳)이나 국(局) 단위로 독립유공 보

정학과 정시합격자 전원에게 4년 전액 장학금 등 파격적 혜택을 제공하

훈을 담당하는 조직을 두기를 제안

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졸업생들의 성과는 괄목하다고 한다. 하

합니다. 독립유공자 단체들이 이런 입법청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만 이학장은 매우 겸손하고 소탈하게 말하는듯 했다. 이학장은 벌써 16년 전인 2007년도에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 정책적 문제점과 개선방안 : 독립유공자 보훈체계의 개선을 중심으로」 (『한양법학』 21호)라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리고 2009년부터 2011년까지 2년동안 국가보훈처의 국가보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 도 했다. 그런데 원래 법학을 전공했고, 주로 행정법, 사회보장법 분야의 전문가로 알고 있는데, 왜 독립유공자 예우나 국가보훈 업무에 관심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제 전공은 행정법이며, 그 중에서도 세부영역으로 한정한다면 사회 보장행정법과 법정책학을 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행정법은 헌법의

58    

  2023년  4월

➋ ➊

➊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인사하는 이학장(2021.2, 한양대 제공) ➋  2019년도 정책과학대 학생들의 멘토 결연식에 참석한 이학장(2019.11, 앞줄 가운데)

구체화법으로써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 보장의 실행

대학의 이교수를 찾아간 것으로 알고 있다. 부친께서

과 국가 통치구조의 구체적인 발현 내용을 규정하

일제강점기에 일본 홋카이도탄광에 끌려가신 적이

는 법이지요. 또 구체적으로는 국민의 권리를 가장

있지만, 오랫동안 직접 독립유공자 문제에 대해서는

잘 보장하기 위한 국가 구조의 구성과 이를 구현하

관심을 갖지 못했다고 소박하게 말하는 이학장. 법학

기 위한 정책의 근거가 되는 개별법을 연구하는 것

도로서 이 논문 발표 전에 국회에서 최용규 의원이

도 행정법학의 주요 분야입니다. 또한 법정책학은

2007년에 주최한 국회의원 세미나 “보훈체계의 개

이론법학을 넘어 실생활에 쓰이는 실용적인 법학,

선방안 : 독립유공자 예우 문제를 중심으로”에서 「독

특히 정책과 관련된 법제도를 설계하는 것을 주로

립운동유공자 예우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주제를 발

하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독립유공자 예우와 지원

표하기도 했다.

에 관한 법제도를 연구하는 것도 저의 주요한 연구 영역입니다.”



독립유공자의 국가적 예우 개선 방안을 연구

“독립유공자의 예우와 지원에 관한 연구는 강릉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분들은 제대로된 예우

재직시절 조세현 선생님(당시 순국선열유족회 부회

와 보상을 해야한다고 보는데, 아직까지는 많은 국민

장)이 강릉으로 저를 찾아와 「독립유공자의 국가적

들이 이에 대해서 실감을 하지 못하는 듯하다. 정부,

예우 증진을 위한 법제 개선 연구 – 특히 순국선열에

특히 국가보훈처와 관련 기관, 단체 등에서는 마땅히

대한 예우에 관하여」의 연구를 의뢰하신 것이 직접

노력해야 하겠지만, 일반 국민들도 순국선열이나 국

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유공자에 대한 인식과 예우를 개선해야 하지 않을

이 때 이미 이학장의 명성이 알려진 듯 했다. 이 떄 문에 조세현 부회장이 서울에서 먼거리에 있는 강릉

까 생각해본다. 이에 대해 이학장의 의견을 구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에 대한 예우와 보상은 이

향기나는 삶 이야기 • 한양대학교 정책과학대학 이호용 학장 

  59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향기나는 삶 이야기

분들에 대한 존경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일반시민

“이런 인식을 심어주는 교육이나 홍보가 필요할 텐

들에게 보훈대상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

데, 요즘 시대에는 매체를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

면 그분들 도와줘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고 봅니다. 예컨대 독립유공자나 독립운동을 그리

「도와 주어야 한다」가 아니라, “자랑스럽습니다”,“존

는 감동 깊은 영화(주인공은 최고의 배우이어야 하

경합니다” 라는 말이 먼저 나와야 하는데 말이지요.

고, 감독도 마찬가지이어야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봅

그것은 그간 언론이나 국가에서 보훈대상자들에 대

니다만)를 만든다거나, 게임이 청소년들에게 매우 중

한 취업상 우대 등과 같은 특례 위주로 노출시켰기

요한 놀이거리 혹은 그것을 넘어 문화를 형성하고 있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으므로,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전투게임을 만드는

“언젠가 미국에서 생활하는 지인이 미국 군인인

것도 좋은 아이디어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최고의

자신의 손녀와 식당에 갔을 때 식당 종업원이 경의

게임사에서 제작해야 효과가 있을 것이라 봅니다. 다

(honor)를 표해서 자랑스러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

만 게임같은 것은 인기를 끌면 세계적 파급효과가 있

은 바 있습니다. 국가유공자는 경의를 받은 대상이

기 때문에 내용면에서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어야 하고, 그 집안은 명문가로서 칭송되는 분위기가

부분은 최소화되어야 하겠지요.”

중요하다고 봅니다. 국가유공자에게 이런 영예를 준

“독립관과 같은 독립 역사관들은 단지 눈으로 보

다면 물질적으로 다소 부족하게 살더라도 자랑스럽

고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이 즐길 수 있

지 않을까요?”

는 놀이 프로그램이 더해져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

어쩌면 독립유공자,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열악한 현실이 일반 국민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이들을 은연

게 독립, 독립유공자에 대한 인식이 흡수될 수 있도 록 하는 방식도 중요하겠습니다.”

중에 “도와줘야 할 사람”으로 고정관념을 심었을 지

역시 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교육자라서 그런지 자

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현재의 국

라나는 젊은 세대,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과 인식 개

가보훈 시스템과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인식이나 행

선이 필수적이라 강조하는 이학장. 법학계의 중진학

태에도 일부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이지만, 생각만큼은 젊지 않나 생각되었다.

최근 점차 개선되고 있지만, 종래는 국가보훈 정책이 6 · 25전쟁 관련 및 군인 중심의 보훈체계로 이루어진 경향이 있었다고 보기 떄문이다. 이에 따라 독립유공 자의 처우는 상당히 열악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와 보상을 높이는 방 안이나, 국민들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이학장은 몇가지 방안 을 제시했다.

60    

희생도와 공헌도에 따른 국가보훈 필요 이학장은 앞의 2007년도 논문에서 독립유공자에 대한 국가적 예우 관련 제도의 정비 필요성과 현행 독립유공자 보훈보상체계의 현황과 문제점을 지적 하고, 개선방안을 정리한 적이 있다. 특히 ‘희생도와 공헌도에 따른 보훈 원칙’을 강조 했는데, 이는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으로 판단된

  2023년  4월

➍ ➌

➌  서대문독립공원 내 순국선열추념탑 ➍  교정의 학생들

다. 이학장은 군인 중심의 보훈 체계 개선과 생존자

여유도 부족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편, 군

중심 보훈 체계와 독립유공자의 특성에 따른 차별화

인 중심의 전쟁유공자가 국가유공자 중에서 차지하

도모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비현실적 보훈

는 비중이 가장 컸던 점을 보면 다수에 의해 의사가

혜택의 현실화’가 필요하다고 정리하기도 했다. 매우

결정되는 민주주의의 속성상 이런 현상은 이해가 됩

적절한 분석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니다.”

방향이 실현될 수 있는 여건조성이 필요한데, 결국

3년만의 대면 강의로 활기가 도는 대학 캠퍼스와

이는 거의 국가보훈처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가 생

교실에 가득찬 학생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느덧

각되었다.

개나리와 산수유, 매화도 개화하여 밝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처럼 복잡한 문제를 정부의 한 부처에만

이학장의 설명은 계속된다.

맡겨놓기 보다는 정부와 민간, 관련 학계와 관련단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문민정부가 시작되었을

체, 시민사회 공동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가

때와, 그 뒤 시기에는 독립유공자 예우를 국가적 과

한다. 이에 대한 이학장의 조언을 들어보았다.

제로 상정하면 좋았을텐데, 이 시기에 열심히 촉구

“우리나라의 역사적 전개상황을 볼 때, 일제 강점

하고 운동하지 못한 것이 아쉽게 생각됩니다. 시간이

기가 끝나고 5년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 뒤로

점점 흐르며 독립유공자 자손도 세대가 바뀌고, 이런

는 상당기간 동안 경제적 빈곤기를 거쳤습니다. 또

상황하에서는 독립유공자의 예우에 관한 과제가 점

수십년간의 군사정부 시절을 겪은 점을 생각해보면

점 힘을 잃어갈 수밖에 없지요. 이제 더 이상 늦추어

우리나라가 전쟁유공자 중심의 보훈체계가 형성된

서는 안된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적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질곡의 과정을 고려하면 독립유공자를 챙길 겨를도

우리나라의 순탄치 못한 근현대사 전개과정을 생

향기나는 삶 이야기 • 한양대학교 정책과학대학 이호용 학장 

  61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향기나는 삶 이야기

각할 때 어쩌면 현실적 어려움은 이해되지만, 이제

러나 독립유공자는 희생을 무릅쓴 자발적 참가자였

더 이상 개선 노력을 늦춰서는 안된다고 시급성과 절

고, 숫자도 적어서 가치가 높지요. ‘독립과 건국’이라

박함을 역설하는 이학장. 그의 답변에 저절로 머리가

는 가치와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가치와 공헌은 달리

끄덕여진다.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듣고보니 정말 타당한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격 국가보훈부에 독립유공 관련 부서를 제안 최근 국회에서 국가보훈처를 국가보훈부로 승격 시키는 법률안이 통과되었다. 이제 3개월 내외 기간

본 유족회의 집행부와 임원들, 그리고 관련 단체, 유 족들이 매우 유념하고, 국가보훈처 등에서도 경청할 만한 훌륭한 정책대안이라고 판단되었다.

에 국가보훈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할 듯 하다. 국가보 훈처에서 국가보훈부 승격의 의미와 그 영향을 어떻 게 봐야 할까?

국가보훈위원회 부활 필요 국가보훈처에는 ‘국가보훈위원회’가 있었는데, 이

또 다른 주요 선진국의 사례는 어떤지? 미국 · 영

학장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이 위원회에서 활

국 · 프랑스 등 구미 열강의 보훈체계는 어떤지 알아

동했다. 이에 이호용학장께 국가보훈위원회의 기능

볼 수 있을까 질문했다.

과 역할을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향후 이 위원회의

“미국, 캐나다, 호주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부(部)에 서 보훈 업무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국은 청(廳) 단 위에서 하고 있는 것 같구요.” “보훈부로의 승격과 함께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 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보훈체계가 군인을 중심으 로 되어 있고, 다른 보훈대상자들과 독립유공자들은 상황과 입장이 매우 다르니, 독립유공자 보훈을 위해

임무를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물었다. 그런데 의외의 답변을 들었다. “국가보훈위원회는 최근 윤석열정부가 활동성이 적은 위원회를 정리하면서 정리, 폐지된 위원회입니 다. 매우 안타깝습니다.” 아니 ‘국가보훈위원회’가 폐지되었다고? 놀라운 소 식이었다. 이학장의 답변은 계속되었다.

별도의 행정 단위, 청(廳)이나 국(局) 단위로 독립유공

“국가보훈위원회는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시절도

보훈을 담당하는 조직을 두기를 제안합니다. 독립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후 보훈처장이 위원장인 조직

공자 단체들이 이런 입법청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으로 격하되고 말았습니다. 조직의 위상이 떨어진 것

“국가보훈부로 승격되더라도, 기존의 관행대로 전

도 아쉬운데, 이젠 조직이 없어졌다고 하니 참으로

쟁유공자 몫만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국가보훈은 희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과거 위원(비상임)으로 일

생과 공헌도에 따르는 원칙이 지켜져야 합니다. 전쟁

할 때도 보니 20~30여 명의 위원중 군인 관련 위원

유공자와 독립유공자는 희생은 비슷하지만, 공헌도

이 대부분이었고, 독립유공자 관련 위원은 거의 없었

는 달리 볼 수 있습니다. 전쟁유공자는 의무적으로

습니다. 국가위원회의 기능은 그것을 담당하는 정부

참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숫자도 많습니다. 그

부처에서 기능을 부여하면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텐

62    

  2023년  4월

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 국가보훈위원회 에 국가보훈에 관한 주요사항을 실질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하여 경찰청 안의 경찰위원회와 같은 의결기관으로 조직을 재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해 봅니다” 그렇다. 이제 국가보훈처에서 국가보훈부 로 승격되는 상황이니, 이학장의 제안이 매우 구체적이며 실현성있게 다가왔다. 다시 국가 보훈위원회의 부활과 기능 활성화가 필요하 다고 본다. 끝으로 서울 시내 주요 대학의 학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미래 세대의 주인 공인 대학생들에게 순국선열에 대한 예우, 그 분들의 독립정신을 함양하고 가르칠 수 있는 적극적 교육과 연구를 부탁하고 싶다고 주문 했다. 특히 젊은 대학생들에게 민족과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생각하고 봉사할 수 있는 교육 을 실천해달라고 했다.

한양대학교 역사관(위)과 교훈 전시 판넬 · 진열장(오른쪽)

“정책과학대 설립 직후에는 교양과목 등 을 통해 한양대의 교시인 봉사와 애국심을 강조

교훈과 설립자 김연준 박사의 교육이념 전시판넬이

하는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최근에는

있었다. 어찌보면 평범하고 소박한 개념일지도 모른

시대적 추세와 교육과정, ‘코로나19’에 따른 비대

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면 온라인 교육 등으로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

들었다.

러나 이른 바 ‘노블레스 오블리쥬’ 교육을 통해 사

한양대 정책대학의 인재들이 개인적 출세나 입

회적 책임을 다하는 리더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

신양명이 아니라, 한국사회와 동아시아, 나아가 세

고자 합니다.”

계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훌륭한 글로벌 리더로 성

이학장을 만난 뒤에 교내 박물관과 ‘한양대학교 역 사관’을 둘러보았다. 과거 대학 본관 건물을 개조하

장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한양대 정문 애지문을 나 왔다.

여 2015년 11월 문을 연 한양대역사관 전시내용에 는 근면 · 정직 · 겸손 · 봉사,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라는

향기나는 삶 이야기 • 한양대학교 정책과학대학 이호용 학장 

  63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특별 인터뷰

[독립운동가 후손이 전하는 현실] ② 김영조 순국선열유족회 사무총장

“행방불명된 유족도 합의해야 보상금 … 대통령령만 고치면 되는 문제”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이유 …  보상금 받은 유족 23%뿐” 글  박상휘 · 박혜연 · 이정후 기자

사진  박지혜 기자

순국선열유족회 김영조 사무총장 이 지난 2월 27일 서대문독립공 원 안에 있는 순국선열유족회 사 무실에서 온라인(인터넷) 언론매 체 ‘뉴스1’과 인터뷰하고 순국선열 유족들의 어려운 현실, 그와 관련 된 몇가지 대안을 논의하는 기회 를 가졌다. 이에 본지에 그 내용을 전재하여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그 실상과 대책을 함께 생각해 보 고자 한다. (김총장의 실제 인터뷰 내용과 일부 다른 부분이 있지만, 그대로 전재한다.)

김영조 사무총장이 뉴스1과 인터뷰를 갖고 있다.

“순국선열 후손들은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말한다. 독 립유공자 서훈이 이뤄졌는데도 보상금을 받은 후손이 23%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김영조 순국선열유족회 사무총장(76)은 27일 서울 서대문독립공원 유족회 사무실에서 과 만나 이같이 지적했다. 선열들이 대한민 국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바쳤지만, 후손들이 힘이 없어 독립유공 자 예우는커녕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며 김 총장은 답답해했다. 학계와 유족회에 따르면 구한말 의병을 포함해 일제에 무장투쟁 운 동을 벌이다 희생된 순국선열은 최소 15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하지만

64    

  2023년  4월

대부분 이름과 자료가 남아 있 지 않아 독립운동 기록이 남아 있는 3,500여명(2%)만 건국공 로훈장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유족이 보상금을 받은 경우는 804명(23%)뿐이다. 문제는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독립유공자법)의 보 상금 규정상 순국선열의 유족 은 아들과 손자까지만 보상금 을 지급하게 한 것이다. 일제의 국권침탈과 그에 대항하는 무 장 투쟁운동이 사실상 19세기

김총장이 발간책자를 소개하고 있다.

말부터 시작됐다는 점을 고려 하면 순국선열들의 후손은 현재 증손대 이후만 남아

독립운동가들의 직계 후손들은 월북했거나 해외로

있다.

이주하는 등 행방불명된 경우가 많다. 호적에는 남

김 총장은 “독립운동 역사는 명성황후 시해가 벌

아 있지만 행방불명이 된 다른 유족들을 찾아 완전

어진 을미사변(1895년 8월20일)부터 광복 전일

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보상금을 신청하지 못하

(1945년 8월14일)까지 총 51년으로 봐야 한다”며

는 셈이다. 호적 정리를 위해 행방불명 신고를 하려

“유족 보상금 법이 처음 제정된 1965년은 광복으

고 해도 행방 불명자의 직계 가족이 아닌 이상 신고

로부터 20년이나 지난 후라 (독립운동가) 손자도

자격도 없다.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총장도 고조부 김준모 지사가 안동 지역에서

유족회가 꾸준히 문제를 제기한 끝에 2012년 법

유명한 한학자이자 의병 소모장으로 활약한 점이

이 개정됐다. 개정된 현행법에 따르면 광복 전 사망

참작돼 2006년 독립유공자 서훈(애국장)을 받았지

한 독립유공자 중 한 번도 보상금을 받지 못한 유족

만, 행방불명된 유족 5명과 합의가 되지 않았다는

은 직계비속 중 1명을 손자로 간주해 보상금을 받

이유로 보상금을 받지 못한 사례다.

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개정안에도 허점이 있었다.

김 총장은 “법이 개정된 지 10년이 넘었는데 보

보상금을 신청한 유족은 반드시 다른 직계비속들

상금을 못 받았던 순국선열 후손 750여명 중 보상

과 완전 합의를 봐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금을 새로 신청해 받은 사람은 80명 정도”라며 “완

광복 이후 6 · 25 전쟁 등 사회 혼란기를 거치면서

전 합의 대신 유족 4분의 3 이상 합의로 시행령만

특별 인터뷰 • [독립운동가 후손이 전하는 현실] ② 김영조 순국선열유족회 사무총장  

  65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특별 인터뷰

큼 경제적으로 궁핍한 처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총장은 “(김동삼 선생의) 후손 분들이 지금 살 기가 굉장히 어렵다. 보상금도 못 받는다”며 “이분 들도 보상을 받도록 법을 바꿔야 하는데 문제다. 일 송과 같은 억울한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또 새로 발굴된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추가 서훈 작업도 속도를 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 다. 유족회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해 11월 유족회가 김총장이 순국선열유족들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신청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22명에 대한 서훈 결 정을 유보했다. 국가보훈처는 ‘심사가 더 필요해 올 8월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사회주의 독

개정해도 행방불명자를 걸러낼 수 있는데, 정부에

립운동가들에 대한 편견이 반영된 것이라는 우려

서는 ‘돈과 관련된 일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유족

가 나온다.

간 완전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답변이 왔다”고 한 탄했다.

김 총장은 “1930년대에는 미국과 영국, 스페인 등 열강들이 전부 일본 편을 들어서 당시 많은 독

김 총장은 일제강점기 안동 지역에서 대거 항일

립운동가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련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의성 김씨 문중 소속이기도

기대했다”며 “사회주의 이념을 갖고는 있었지만 독

하다. 의성 김씨 문중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정통으

립운동의 국격까지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로 이은 서산 김흥락 선생을 중심으로 안동에서 위

고 말했다.

상이 높았기 때문에 경북 지역의 항일 운동을 주도 할 만큼 당대 유림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컸다.

김 총장은 “순국선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너무 나 형편없다”며 “순국선열유족회를 국가유공자 공

의성 김씨 문중에서는 수백만 평에 달하는 전답

법단체로 하고 보상금을 제대로 보상하고 국민들이

을 대부분 독립운동자금을 위해 처분하고 만주로

순국선열을 기리고 참배할 수 있는 추념관을 짓는

넘어가 본격적인 독립 투쟁에 뛰어든 이가 많았는

것이 우선순위인데 (지금까지) 안 되는 것은 후손이

데,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만주벌 호랑이’라고 불리

적으니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는 일송 김동삼 선생이다.

그러면서 “순국선열들은 나라를 위해 자발적으

일송은 만해 한용운 선생과 심산 김창숙 선생, 김

로 재산과 목숨을 다 희생했기 때문에 이 얼과 혼은

좌진 장군, 지청천 장군 등 거물급 독립운동가들이

민족정기로 봐야 한다. 국민 통합을 위해서라도 순

한목소리로 존경을 표하는 인물이지만, 현재 그 후

국선열의 정신을 민족 정체성으로 교육해야 한다”

손들은 월 20만원 상당의 노인연금에만 의존할 만

고 강조했다.

66    

  2023년  4월

자료소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대동단결선언』 원본 (1917년, 독립기념관 소장)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신규식 · 박은식 · 신채호 · 조소앙 등 14명이 발기하여 작성하였다. 2015년 12월 8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안창호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대동단결의 필요성, 국내참상, 해외동지의 역할, 국제환경, 대동단결의 호소 등 과 강령, 이에 대한 답장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4월의 독립운동가

4월의 독립운동가

이희경 · 나용균 · 황기환 지사

유럽과 미주, 일본 · 중국 등지서 맹활약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청년 외교활동가들 글  국가보훈처 제공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 과 공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기환(1886

외교활동에 헌신한 청년외교활동 가 이희경 · 나용균 · 황기환 지사를 2023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하였다. 이희경 · 나용균 · 황기환 지 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전개한 외교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한 인물들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유럽 각국과 열강들을 대상으로 다각적 외교활 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한국독립 문 제를 국제사회에 부각시키고, 한국 민족의 존재와 위상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러시아 등의 국가들로부터 협 력과 지원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 두었다.

이희경(1889~1941)

나용균(1895~1984)

황기환(1886~1923)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의 전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 부는 외교활동을 주요한 독립운동 방략으로 삼았다.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은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각지에서 개최되는 국 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사회에 한국독립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각국 정부의 후원과 지원을 얻는 일이었다.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발맞추어 추진되었 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파리강화회의는 그 첫걸음이 었다. 임시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면서 프랑스 파리에서 전후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강화회의가 개최되자, 외무총장에 선임 된 김규식을 파리위원부 대표로 임명하였다. 파리위원부는 『통신전』 (Circulaire)을 발행하여 유럽 언론기관에 한국독립운동 관련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의 처지와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또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공문 등

68    

  2023년  4월

6~1923)

을 보내 한국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파리강화회의 이후 유럽에서 개최되는 각종 국 제회의에 참석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8월 스위스 루체른 국제사회당대회에서 ‘한국독립승인 결의안’이 통과된 것, 1919~1920 년 영국 하원에서 한국문제가 토의되고 ‘대영제국 한국친우회’가 조직될 수 있었던 것 등이 대표적 외교성과라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는 중국과 러시아 정부의 후원과 지원 을 얻기 위한 외교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임 시정부는 쑨원(孫文)을 수반으로 하는 호법정부 (護法政府)가 세워지자, 외무총장 신규식을 파견 하여 국서를 봉정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 였다. 이에 호법정부는 광둥(廣東)국회에서 ‘한국 독립승인안’을 상정 · 통과시키고, 임시정부의 외 교관을 광둥에 머물도록 허용하고 재정을 원조하 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럽지역 외교활동을 주도했던 파리위원부가 있던 건물

임시정부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정부 를 구성한 후, 러시아에 대한 외교활동에 나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가 레닌(Lenin)에게 독립

외교활동의 지원군, 이희경

운동 자금 지원을 요청한 것은 그 시작이었다. 레

이희경(李喜儆, 1889~

닌은 200만 루블의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고, 그 중

1941)은 1889년 평안남도

60만 루블을 지원하였다. 1922년 1월에는 코민테

순천군 순천면 관하리에서

른 주관으로 모스크바에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

태어났다. 순천군 사립 시

회의(일명 극동인민대표대회)가 개최되자, 대표들

무학교(時務學校)에서 수학

을 파견하면서 적극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 나

하였고, 1905년 4월경 일

갔다.

본 도쿄 고이카와구 야나기쵸 용전관(龍田館)에 머

2023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황기환 · 이 희경 · 나용균 등 세 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전개 한 외교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한 인물들이다.

이희경 지사

물며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다. 1905년 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유학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어학을 공부하고, 오

4월의 독립운동가 • 이희경 · 나용균 · 황기환 지사 

  69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4월의 독립운동가

하이오에서 보통과 중학과정을 마 쳤다. 웨슬리대학에 1년 재학한 후, 1911년에 일리노이대학 의학전문 과에 진학하여 1916년 5월 31일 졸업하였다. 1911년부터 대한인국민회 시카 고지방회에 참여하여 임원과 총무 를 맡았다. 지방회의 자치제도와 규칙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 을 펼쳤다. 1916년 6월 하와이로 가서 병원을 운영하며 한인사회 의 료체계 마련에도 기여하였다.

대한적십자회 제1기 간호원(1919. 08)

1917년 9월 29일 한국으로 돌아와 평양에 머물

동하며 외교활동 분야에서 활동을 펼쳤다. 1919년

던 중 1919년 3 · 1만세시위운동을 목격하였다. 직접

5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평안도 의원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평양·개성·서울로

선출된 것을 시작으로 군무위원장, 임시회계검사

이동하며 만세시위의 열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

원, 법률기초위원, 외무총장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안창호 · 서병호 등과 함께 대한적십자회 재건에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

도 앞장섰다. 대한적십자회는 1905년 10월 대한제 국 칙령 제47호에 의해 조직되었다가 1909년 일 제의 강압으로 일본적십자사에 통합되었던 단체이 다. 발기인 대표로 1919년 8월 29일 임시정부 내 무부의 인가를 얻어 대한적십자회 재건을 이끌었 다. 회규를 제정하고, 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초창기 대한적십자회의 토대 구축과 체제 확립에 힘썼다. 간호원양성소와 병원 설립도 추진하여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력 양성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필요 한 재정 마련을 위해 1919년 10~11월 미국 시애 틀 · 샌프란시스코 · 워싱턴 · 로스앤젤레스 · 시카고 등 지의 한인사회를 직접 찾아가 선전 · 홍보활동을 펼

치체린 접견을 요청한 이희경의 서신(1922.3.22)

70    

  2023년  4월

쳤다. 이를 통해 미주 한인사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1922년 1월경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6개월여 간 러 시아 외무인민위원회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23년 1월경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다시 의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베를린대학 부속병원에 근무 하면서 호흡기 분야를 전공하였다. 그러면서 독일 에 체류하는 한인 유학생들의 실태와 관련 소식을 미국 한인사회에 알렸다. 이희경은 1924년 미국으로 돌아와 독일에 유학 하는 고학생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뉴 욕지방 한인들과 함께 구제금을 모집하여 유학생 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1925년 4월에는 『동아일보』 1937년 7월 4일자에 게재된 이희경 귀국 관련 기사

서재필(徐載弼) · 유일한(柳一韓) · 정한경(鄭翰景) 등

협조를 이끌어냈다. 대한적십자회 회원 모집과 지

서기로 근무하며, 각종 사무 · 출장업무를 수행하는

부 설립에도 적극 나서 대한적십자회 북미지부를

등 회사 발전을 위해 힘썼다.

설립하고, 의연금 4,000여원을 모집하여 상하이 본 부로 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20년 8월 미국 상 · 하원 의원들로 구성된 ‘미의 원시찰단(美議員視察團)’이 상하이를 방문하자, 교 제위원에 선정되어 외교활동을 펼쳤다. 8월 5일 상 하이 아스타하우스 호텔에서 개최된 환영회에 참

과 함께 유한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7년 중순 국내로 돌아와 호흡기 전문의로 활 동하였다. 서울 인사동에 병원을 개업하고, 언론에 위생과 관련된 글을 게재하는 등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 힘썼다. 그러던 중 1941년 6월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

석하여 임시정부에서 제작한 「진정서」를 미국 의원 들에게 전달하고 한국의 실상을 알렸다.

2 · 8독립선언과 국민대표회

1921년 5월 러시아와 외교교섭을 위해 임시정부

의의 든든한 조력자, 나용균

특별전권대표로 안공근과 함께 모스크바로 파견

나용균(羅容均, 1895~

되었다. 파견목적은 모스크바 자금 문제와 관련하

1984)은 1895년 전라북도

여 한형권의 활동 내역을 파악하고, 임시정부와 러

정읍시 영원면 운학동에서

시아 정부 · 국제공산당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 그

태어났다.

리고 이들로부터 자금지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14년 일본 와세다대

나용균 지사

4월의 독립운동가 • 이희경 · 나용균 · 황기환 지사 

  71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4월의 독립운동가

학(早稻田大學) 정치학부에 입학하 여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1918 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민족 자결주의 원칙의 대두로 독립운동 에 유리한 국제정세가 조성되자, 한국인 유학생들과 회합을 갖고 독 립운동에 나섰다. 1918년 최팔용 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1919년 2 · 8독립선언 발표에 기여 하였다. 1919년 7월, 상하이(上海)로 망 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1919.9.17). 가운데 붉은색 원으로 표시된 분이 나용균이다.

하였다.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서 전라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1921년 5월 제8회

다. 그러던 중 1921년 11월, 김규식 · 여운형 등과

임시의정원 회의 때까지 적극적인 의정 활동을 펼

함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원동민족혁명

쳤다. 임시의정원 법제위원회 이사와 위원을 역임

단체대표회(일명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하기

하며 임시정부의 관제 및 헌법 개정에 힘썼다. 또한

위해 러시아로 향했다. 이 대회는 1922년 1월 21

국제연맹회의 안건 수정 특별위원과 정무조사특별

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회원을 지냈다.

개최된 한국 · 중국 · 일본 · 몽골 등 각국 민족운동 단

1921년 5월 12일과 19일 상하이에서 두 차례 개

체 대표들의 모임이다. 반제국주의 투쟁의 중심인

최된 국민대표회의 촉진연설회에 발기인으로 활약

러시아와의 결합을 통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

하였다. 김병조(金秉祚) · 이영열(李英烈) · 서병호(徐

을 모색하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丙浩) · 한진교(韓鎭敎)와 함께 연설회 개최를 주도하

나용균은 이르쿠츠크를 거쳐 1922년 1월 7일 모

며,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였다. 5월 19일 제

스크바에 도착하여 조선대표단에 합류하였다. 공

2회 연설회 직후에는 참석자 300여명의 동의를 얻

식 · 비공식으로 개최된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문제

어 상하이 국민대표회기성회 조직을 촉진하기 위

해결을 위해 힘썼다. 또 조선대표단 50여명과 함께

한 조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를 속히 개최하자는 것을 결의하였

1921년 8월 상하이 · 베이징(北京) · 톈진(天津)의

다. 그러나 대회 기간 중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원과

대표들이 협의하여 국민대표회주비회를 조직하자,

가깝게 지내고, 대회선언문에 서명을 거절했다는

상하이 국민대표회기성회 위원 자격으로 참여하였

이유로 이르쿠츠크파 인사들과 갈등을 겪었다. 이

72    

  2023년  4월

후 1922년 2월 2일 대회가 종료되자, 같은 해 3월 경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한국 민주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이후 제헌국

그 뒤, 활동을 재개한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國

회 의원과 제4 · 5 · 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제6

民代表會籌備委員會)에 참여하였다. 국민대표회주

대 보건사회부장관과 제6대 국회부의장도 지냈다.

비위원회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 소집에 관한

서울 명륜동에 거주하다가 1984년 7월 6일 서거하

모든 사항을 준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새롭게 이 위

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

원회를 구성했는데, 그는 12명의 위원 중 한명으

였다.

로 선출되었다. 서기에 임명되어 1922년 5월 10일, 남형우 · 김철 · 원세훈 · 서병호와 함께 「국민대표회

유럽지역 외교운동의

주비위원회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을 통해

개척자, 황기환

“과거의 모든 분규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황기환(黃玘煥, 1886~

완전 확실한 방침을 수립하여… 국민대표회 소집

1923)은 1886년 평안남도

사항도 준비하고 책임을 부담하여 성립 되었음”을

순천에서 태어났다. 영문 이

밝혔다.

름은 Earl K. WHANG이다.

1923년 유학을 위해 영국으로 향했다. 런던대학

1904년 미국으로 건너

교에 재학하며 정경학(政經學)을 전공하였다. 1927

가 공립협회(共立協會)에서

년 3월 유학생활을 마치고 미국 뉴욕 · 샌프란시스

활동하였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5일 샌프란시

코를 거쳐 국내로 돌아왔다.

스코에서 안창호가 주도하여 조직한 민족운동단체

황기환 지사

이다. 1906년 6월까지 레드랜드 지회의 부회장을 맡았고, 1909년까지 지방회원으로서 활동을 이어 갔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지 원병으로 입대하여 유럽전선에서 활약하였다. 소 대장으로서 중상자 구호를 담당하며 독일 베를린 에 입성한 부대를 이끌었다. 1918년 11월 종전 이 후 유럽에 남아 있다가 김규식의 제안을 받고 프랑 스 파리로 이동하였다. 1919년 6월 3일 파리에 도착한 후, 파리위원부 『독립신문』 1921년 5월 21일자에 게재된 국민대표회의 촉진 제2회 연설회 관련 기사.

에 합류하여 서기장을 맡았다. 「통신전」을 발행하 여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한국

4월의 독립운동가 • 이희경 · 나용균 · 황기환 지사 

  73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4월의 독립운동가

문제를 국제문제로 부각시키는데 힘을 보탰다. 1919년 8월 김규식이 구미위원 부 위원장을 맡게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고, 같은 해 10월 이관용마 저 학업을 마치기 위해 스위스로 향하자, 파리위원부의 실질적 책임 자로 활동하였다. 황기환은 인력 의 부재와 재정의 곤란을 겪었지 만, 이에 굴하지 않았다. 프랑스 · 미 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의 한국 침략과 통치의 실상을 널리

파리위원부 직원들. 둘째 줄 맨 오른쪽이 황기환이다.

알렸다.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부각시키는데도 노력하였다.

한국인 노동자와 유학생 지원에도 앞장섰다.

1919년 10월 프랑스 인권옹호회에 참석하여 한국

1919년 10월~11월, 오갈 데 없는 처지에 놓인 러

독립 문제를 보고하였고, 1920년 1월에는 국제평

시아 무르만스크의 한국인 노동자 500여명을 돕

화촉진회가 주최한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독립회복

기 위해 프랑스 · 영국 정부와 교섭을 벌여 그 중 일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부가 프랑스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19년 11월부터 1920년 12월까지는 프랑스로 오는 한국 인 유학생들에게 학교와 일자리를 주선해 주는 역 할도 수행하였다. 1920년 1월 8일 프랑스 인권옹호회와 협의하여 ‘한국문제 대연설회’ 개최를 이끌어냈다. 파리지리 연구회 대회장에서 열린 이 연설회에는 정치가 · 언 론인 등 각계인사 5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 루었다. 같은 해 4월 23일에는 이탈리아 산레모에 서 열린 평화회의 최고회의에 이미 제출한 「한국독 립안 토론 요구」를 갱신하는 취지의 전보를 보내기 도 하였다.

파리위원부에서 간행한 『자유한국』 제2호 표지

74    

  2023년  4월

1920년 5월, 월간잡지 『자유한국』(La Corée

Livre)을 간행하였다. 프랑스어로 제작하였으며, 한국독립운동 관련 소식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 략 · 만행과 관련된 내용을 담았다. 유럽의 각 언론 기관과 정부의 저명인사들에게 발송하여 한국의 현실과 역사 · 문화를 알리는데 효과적으로 활용하 였다. 1920년 9월 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런던위원 부 위원에 임명되어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며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20년 10월 26일 영국의 언론인 맥켄지(Frederick A. McKenzie)와 협의하여 ‘대영 제국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the

파리위원부에서 발행한 『구주의 우리 사업』

Korea in Great Britain) 결성을 주도하였다. 영국 의 국회의원 · 학자 · 신문기자 등 60여명이 참석한

일본대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도 보냈다. 이

창립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통

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침략과 수탈에 대한

해 영국인들의 지지와 성원을 이끌어냈다. 아울러

실상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승인을 요구하였으며,

한국친우회에서 ① 한국 내 사회 · 정치 · 경제·종교에

「일영동맹(日英同盟) 반대안」을 공식으로 제출하였

대한 현황을 조사하여 널리 선전할 것, ② 한국민족

다. 같은 해 6월 23일에는 프랑스 한국친우회(Les

의 정의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운동에 동정적 원

Ami De la Corée) 결성식에 참석하였다.

조를 제공할 것, ③ 한국인의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1921년 8월경 이승만의 요청으로 미국 샌프란시

옹호할 것 등이 결의되는데 앞장섰다. 그밖에 런던

스코로 향했다. 워싱턴회의에 제출할 독립선언서

의 자유교회 · 세례교회 · 예수교연합회에서 한국의

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1921년 11월 12일부터

참상을 보고하는 등 영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

1922년 2월 6일까지 열린 워싱턴회의에 참석하였

어갔다.

고, 이 기간 중에 하와이에 파견되어 민찬호와 함께

1920년 12월, 『구주의 우리사업』 간행에 참여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적극 나섰다.

여 파리위원부 설립 이후부터 추진한 대유럽 외교

이후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활동을 계속 하던 중

활동을 소개 · 정리하였다. 1921년 6월 12일에는 영

1923년 4월 17일 미국 뉴욕에서 서거하였다. 정

국 런던에서 개최된 대영제국 이사회 수상회의에

부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석한 수상들에게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

2018년 방영된 인기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

는 조선 사람의 청원」이라는 인쇄물을 배부하고,

공 ‘유진 초이’의 모델로 알려졌다.

4월의 독립운동가 • 이희경 · 나용균 · 황기환 지사 

  75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6 · 25 전쟁영웅

이달의 6 · 25 전쟁영웅 (4월)

대한민국 해군 PT 편대

6 · 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 해군 PT 편대 창설

해군 어뢰정 편대, 동해 · 서해에서 은밀한 작전 수행으로 큰 공 세워 글  국가보훈처 제공

대한민국 해군은 수심이 얕고 섬이 많은 한반도 해안에서, 작전이 편리 한 반면에 톤수가 적고 속력이 빠르며 화력도 강한 함정이 필요했다. 이에 1952년 1월 일본의 미군 해군 기지에서 PT 4척을 인수하여 1952년 2월 PT-23(갈매기), PT-25(기러기), PT-26(올빼미), PT-27(제비)로 명명하여 PT편대를 창설했다. 길이 24미터, 톤수 50톤, 목재로 건조된 PT는 최고 50 노트(시속 92.6킬로미터)의 속력을 낼 수 있었고, 주 무장으로 5인치 로켓포 16기를 탑재했다. 또한, 야간 작전 시 목표물 식별이 필요할 경우 조명탄 발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 해군 PT (Patrol Torpedo Boat, 어뢰정)를 ‘2023년 4월의 6 · 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대한민국 해군 PT 편대 는 6 · 25전쟁 당시 동 · 서해안과 그 주변 도서의 적 진출 사전 봉쇄, 옹진 반도 일대의 도서에 대한 공산군의

사를 위해 81밀리 박격포 1문을 탑재했다. 로켓포 유효사거리가 2,000야드(1,829미터)에 불과해 적을 타격하기 위 해서는 야간에 적 해안 가까이 최대한 은밀하게 접근해야만 했기 때문에 PT 편대의 작전은 은밀하고 매우 어렵고 위험했다. PT-23 26 편대는 1952년 4 월 19일부터 서해안에서, PT-25 · 27 편대는 1952년 5월 23일부터 동해안에 서 주로 작전을 수행했다. 서해안의 PT 편대는 대청도에 기지를 두고 장산

침공 계획을 좌절시키고 원산일대

곶, 옹진반도, 해주 등 해안에서 활동 중인 적 함선과 해안가에 설치된 적 포

도서를 수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

대, 보급소 등을 목표로 야간에 은밀히 침투하여 적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등

을 수행했다.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동해안의 PT 편대는 여도에 기지를 두고 호도반도, 마양도, 신포에 이르는 해안선 일대에서 적 함선을 비롯한 해안포, 보급소 등을 목표로 하여 파괴를 했다. 아울러, 원산해역에서는 야간에 적 기뢰부설 차단작전, 기차 파괴작전에도 참여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PT-26은 1952년 9월 18일 진해에서 수리 중 기관실 화재로 선체 가 전소되었고, PT-27은 1963년 6월 30일, PT-25는 1963년 12월 31일, PT-23은 1964년 7월 1일 퇴역하여 임무를 마쳤다.

76    

  2023년  4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핏덩이 안고 한국광복군으로 뛴 “유순희”

부부가 어린 아들 데리고 한국광복군으로 활약

한국광복군 활약과 가족들의 생활상 생생히 전해

글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이 녀석이 제 아들이에요. 갓 낳

남녘에서는 산수유 꽃망울이 활짝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은 핏덩이가 지금 일흔이 넘었으

가운데 어제는 종일 봄비가 내렸다. 3월도 중순으로 치닫고 있으니

니 세월이 많이도 흘렀지요.”라며 유순희 지사는 당시 유일한 유부 녀 한국광복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부대원들의 사랑 을 독차지했던 갓난쟁이 아들 이 름은 ‘광삼(光三)’으로 부대원들이 한국광복군의 ‘광(光)’자와 ‘제3지 대’의 ‘삼(三)’자를 각각 떼어 지어 준 이름이라고 했다. 그 어린 핏덩 이 아들 광삼이를 안고 당당한 광 복군으로 뛴 유순희 지사의 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다.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유순희 지사, 앞 줄 오른쪽에서 6번째(광복군 제3지대 본부 연병장에서, 1945년 7월)

78    

  2023년  4월

정녕 봄은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어느새 6년 전 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날(2017.4.31) 오후 2시, 필자는 동대문구 신내동에 살고 계시는 여성독립운동가 유순희 지사 댁을 찾았다. 그때도 봄비가 촉 촉이 대지를 적시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92세의 유순희 지사는 건강 이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흔쾌히 필자의 방문을 허락해 주었

다. 유순희 지사 댁을 방문하던 날 은 동갑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하던 오희옥 지사와 함께였다. 황해도 황주(黃州) 출신인 유순 희 지사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 1구대 본부 구호대원(救護隊員)으 로 광복이 될 때까지 활동한 분이 다. 안개꽃다발을 사 들고 찾아간 댁에서 유순희 지사는 옛 광복군



시절의 일이 가물가물한 듯 기억을 더듬었다. 그도 그럴 것이 70여 년 전의 일이 아니던가! 마침 거실 벽 면에 걸린 한 장의 흑백 사진이 눈 에 띄기에 아예 유리 액자를 떼어 유순희 지사께 갖다 드리자마자 막 혔던 말문이 터지듯 유순희 지사는 마치 어제 일처럼 광복군 시절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이 녀석이 제 아들이에요. 갓 낳 은 핏덩이가 지금 일흔이 넘었으니 세월이 많이도 흘렀지요.”라며 유순 희 지사는 당시 유일한 유부녀 한국 광복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 다. 흑백 사진은 해방되기 한 달 전

➋ ➊  한국광복군 제3지대 앨범을 보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유순희 지사(가운데), 왼쪽은

오희옥 지사이며 오른쪽은 필자(2017.4) ➋  한국광복군 제3지대 여군소대 사진 속에 유순희 지사의 모습이 보인다(밑줄).

인 1945년 7월에 찍은 사진으로 광복군 제3지대 제

각각 떼어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그 어린 핏덩이

1구대 본부 구호대원들과 찍었다. 유순희 지사는 사

아들 광삼이를 안고 당당한 광복군으로 뛴 유순희

진을 보면서 맨 앞줄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

지사의 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다.

이 자신이라고 말했다. 부대원들의 사랑을 독차지

유순희 지사는 1944년 11월 중국 하남성(河南

했던 갓난쟁이 아들 이름은 ‘광삼(光三)’으로 부대원

省) 녹읍(鹿邑)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전방 특파원

들이 광복군의 ‘광(光)’자와 ‘제3지대’의 ‘삼(三)’자를

조성산과 접선하여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핏덩이 안고 한국광복군으로 뛴 “유순희” 

  79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1945년 2월 김학규가 이끄는 한국 광복군 제3지대 화중지구(華中地 區) 윤창호로부터 광복군 지하공작 원으로 임명받았다. 그 뒤 한국광 복군 제3지대에 입대한 뒤 제1구 대 본부 구호대원(救護隊員)으로 활 약했다. “유 지사님! 이런 갓난아기를 안고 정보활동을 하셨다니 굉장히 위험



했겠어요. 만일 아기가 울기라도 하 면 어쩌려구요.” 필자의 질문에 유순 희 지사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 였다. 어쩌겠는가! 갓난아기를 안고 라도 광복군에 뛰어들 수밖에 없던 상황을 어찌 지금의 시각으로 설명 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한국광복군 제3지대 부대원들이 이름을 지어준 어린 핏덩이 광삼 (光三)이와 유순희 지사는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행복했다. 아이 아빠 가 같은 부대원으로 활약했기 때문 이다. 광삼이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➍ ➌  부부독립운동가 최시화, 유순희 지사의 훈장증 ➍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유순희 지사(가운데). 왼쪽은 오희옥 지사, 오른쪽은 필자

(2017.4)

최시화(崔時華, 1921~?) 씨로 당시 나이 24살이고 유순희 지사의 나이는 19살이었다.

지대장 김학규 등이 임명되어 단위 부대 편제를 갖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일항쟁을 위한 준

추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문서에 따르면 1945

비로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重慶)에서 한국

년 4월 당시 광복군의 전체 병력은 339명이었으며,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창

같은 해 8월에는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

설 직후 총사령부와 3개지대를 편성했다. 총사령부

데는 유순희 지사를 비롯하여 오광심, 오희영, 김정

는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구성

숙, 지복영, 조순옥, 민영주, 신순호 등 여자 광복군

되었고,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공진원, 제3

들도 당당히 남성들과 함께 조국 광복을 위해 뛰었

80    

  2023년  4월

다. 한국광복군 가운데 2023년 3월 현재, 정부로부

지사는 이후 건강이 쇠약해져 ‘코로나19’로 면회도

터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분은 모두 579명이

제대로 되지 않던 2020년 8월 29일, 94세를 일기

다. 이 가운데 남성이 545명이며, 여성은 유순희 지

로 삶을 마감했다.

사를 포함하여 34명이다.

한편, 필자와 함께 유순희 지사 댁을 방문했던

금슬좋은 한국광복군 동지 출신의 부부독립운동

현재 유일의 생존 여성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는

가 유순희 지사. 그러나 불행하게도 광복 후 6 · 25

2018년 3월, 뇌경색으로 쓰러져 지금(2023.3)은

한국전쟁으로 남편과 생이별을 한 뒤 홀로 어린 세

서울중앙보훈병원에 입원 중이다. 봄비가 내리고

자녀를 키워야 하는 운명과 맞닥트렸다. 길고 긴 고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계절이 오면 필자는

난의 길이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유순희 지사는

나긋나긋하게 독립운동 시절을 이야기해주던 유

꿋꿋하게 자녀들을 키워냈다. 유순희 지사는 한국

순희 지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봄, 다시 한번 유

광복군 제3지대의 활약상이 담긴 『항일전의 선봉』

순희 지사의 명복을 빌며 아울러 유순희 지사의 동

이란 앨범을 필자에게 보여주었다. 이 속에는 남편

갑내기 동지 오희옥 지사의 건강을 두 손 모아 빌

의 모습도 들어 있었다. 한국광복군 제3지대 사진

어본다.

첩발간회에서 만든 흑백 사진첩(1982) 속에는 유

유순희 지사 남편 최시화 지사는 1990년에 건국

순희 지사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광복군의 활동 모

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습이 생생히 담겨 있었다.

유순희 지사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유순희 지사는 또렷하게 당시를 기억하는 듯 손가 락으로 한 분 한 분을 가리키며 설명에 여념이 없었

받았는데, 이들은 대한민국의 당당한 부부독립운 동가다.

다. 특히 동지이자 남편인 최시화 지사의 사진이 나 오자 감회에 젖는 듯 멈칫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일제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어린 핏덩이를 안고 한국광복군에 뛰어든 시절부터 환국하여 또다시 민족의 비극 6 · 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부부 생이 별에 달랑 남겨진 어린 자식들, 이후 남편의 생사를 모른 채 어린 자식들을 부둥켜안고 살아낸 모질고 도 기나긴 세월이 야속하기만 했다. “정말이지 내가 92살(2017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유순희 지 사는 안개꽃을 바라다보며 지나온 삶이 안갯속 그 자체였던 듯 지그시 눈을 감는다.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필자를 반갑게 맞이해주던 유순희

필자  이윤옥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 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 로는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 서』,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19권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핏덩이 안고 한국광복군으로 뛴 “유순희” 

  81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순국스크랩 ‘독립민주의 길’ 탐방 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난 독립유공자들

독립과 민주   ·  통일에 평생을 바친 지사들의 자취 아쉬워 글  김학규(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지난 3월 1일, 3·1운동 104주년을 기념하여 김원봉을 기리는 모임 ‘김원봉과 함께’가 진행한 ‘독립과 민주의 길을 찾아’ 역 사 탐방에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장이 참여했다. 김소장은 3월 1일의 탐방 이후 그날 미처 돌아보지 못한 서울수유국 가관리묘역의 다른 묘소를 추가로 탐방하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다. 이에 김학규 소장의 탐방기를 싣는다.  (편집자 주)

이번 탐방은 문익환 통일의집 – 근현대사기념관 –

간과 2구간에 걸쳐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김도연

김창숙 묘소 – 여운형 묘소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 중

(1894~1967), 김법린(1899~1964), 김병로(1887~

김창숙 묘소와 여운형 묘소는 북한산 둘레길의 서울

1964), 김창숙(1879~1962), 손병희(1861~1922),

수유국가관리묘역에 포함되어 있고, 근현대사기념

신숙(1885~1967), 신익희(1894~1956), 신하균

관은 묘역 입구에 자리 잡고 있어 독립운동의 의미를

(1915~1975), 양일동(1912~1980), 여운형(1885~

되새겨 볼 수 있는 코스이다.

1947), 유림(1898-1961), 이명룡(1873~1956), 이시영 (1869~1953), 이준(1859~1907), 조병옥(1894~1960)

열다섯 분의 독립유공자를 만날 수 있는 북한산 둘레길

등 독립유공자 열다섯 분의 묘소를 만날 수 있다.

서울수유국가관리묘역은 북한산 둘레길 1구

원래는 열일곱 분의 독립유공자가 안장되어 있는

82    

  2023년  4월









➊  문익환 목사를 기리는 통일의 집  ➋  한국광복군 합동묘소 터와 기념물  ➌  근현대사기념관 입구의 독립운동가 흉상  ➍  독립민주기념비

한국광복군 합동묘소도 이곳 국가관리묘역에 포함

근현대사기념관 입구에서 만나는 독립유공자 흉상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열일곱 분의 유해는 2022

서울수유국가관리묘역 탐방은 입구에 있는 근현

년 8월 14일에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으로 이

대사기념관을 먼저 둘러본 후 진행하면 더 좋다. 근

장되었다. 다행히 한국광복군 합동묘소 터와 조형물

현대사기념관은 서울 강북구가 지난 2016년에 설

은 그대로 남아 있어 이들 열일곱 분의 한국광복군

립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의

대원들의 행적을 조금이나마 되짚어볼 수 있다.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한 상설전시실과 기획

서울수유국가관리묘역에는 동암 서상일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을 북한산

(1886~1962)의 묘소도 있다. 대동청년당과 대한광

서울수유국가관리묘역 입구에 세운 것은 이곳 북한

복단 등에서 활동한 서상일은 지난 2016년 그의 친

산 둘레길 일대에 안장되어 있는 여러 독립운동가를

일행적에 대한 「뉴스타파」의 보도 이후 친일논란에

기리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휩싸였다. 이 일대가 지난 2021년 서울수유국가관리

근현대사기념관 입구에는 이 일대에 안장되어 있

묘역으로 지정될 당시 서상일의 묘소라 국가관리 대

는 인물 열네 명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 중 열셋은

상에서 제외된 이유이다.

서울수유국가관리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독립유공자

순국 스크랩 • ‘독립민주의 길’ 탐방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난 독립유공자들 

  83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김창숙 서거 60주기 추모 특별전 포스터와 전시 내용

의 흉상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관리묘역에서 제외된

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분이 많은 탓이다.

서상일의 흉상이다. 반면, 국가관리묘역에 포함되어

근현대사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심산 김창

있는 김법린과 조병옥의 흉상은 없다. 김법린의 묘

숙 서거 60주기 추모 특별전’의 주인공 심산 김창숙

소가 도봉구 쌍문동에 있다는 점, 조병옥의 경우는

은 그 대표주자이다. 특별전은 ‘시대에 맞서 싸운 마

제주 4 · 3 사건 당시 민간인 학살의 주요 관련자라는

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이라는 제목으로 독립운동가

점이 반영된 결과라고 한다.

김창숙의 면면만이 아니라 민주와 통일에 여생을 바

흉상 옆에는 ‘독립민주기념비’도 있다. 이 기념비는

친 김창숙의 생애 전반을 전시하고 있었다.

2016년 8 · 15 광복절에 즈음하여 3 · 1운동과 4 · 19정신

유림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김창숙은 국망의 위

을 계승하고자 하는 네티즌들이 모은 돈으로 건립되

기를 맞아서는 외세와 매국세력에 맞서 을사오적 처

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묘역과 국립4 · 19민주묘지가

단 상소와 애국계몽운동 등 국권수호운동에 나섰고,

함께 있는 강북구만이 가질 수 있는 기념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와 친일부역자들에 맞서 비타 협적인 항일투쟁을 흔들림없이 벌였다. 전시실에 새

독립과 민주 · 통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

겨져 있는 “친일 부자의 머리를 독립문에 걸지 않으

‘김원봉과 함께’의 탐방 프로그램이 ‘독립과 민주의

면 우리 한국이 독립할 날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

길을 찾아’인 이유는 인근에 4 · 19민주묘지와 문익환

일제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사를 세우는

통일의집이 있다는 점도 있지만, 이곳에 안장되어 있

것조차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라면서 이를 거

는 독립운동가의 면면이 일찍 돌아가신 이준 열사와

부했다는 일화 등을 통해 시대에 맞서 싸운 심산 김

손병희 선생을 제외하고는 광복 이후 우리 사회의 민

창숙의 선비 정신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84    

  2023년  4월

김창숙이 해방 후에는 고령의 나이에도 일제의 고문

분단에 반대하는 통일민족국가 수립과 독재에 반대

으로 인한 불편한 몸을 마다하지 않고 분단ㆍ독재세

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여생을 바

력에 맞서 평화통일과 민주주의 실현에 앞장서다 돌

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아가셨다. 김창숙은 평생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시대의 불의에 맞서 독립, 민주, 통일의 대도를

묘소의 흔적이 남아있는 지청천 장군 묘소 터,

온몸으로 헤쳐나간 ‘마지막 선비’라는 호칭이 결코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강우규 의사의 묘소 터

아깝지 않은 인물이다.

필자는 이번 탐방에서 평소 찾지 못했던 이명룡의

심산 김창숙의 생애를 돌아본 후 서울수유국가관 리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독립운동가의 묘소를 둘러

묘소는 물론 신익희의 묘소와 신하균의 묘소도 찾아 참배한 것도 뿌듯한 일이었다.

보니 임시정부요인 출신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

섰던 이시영과 신익희,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로 이

로 참여했던 이명룡(1873-1956)의 묘는 근현대사

승만 독재정권에 맞섰던 유림, 이승만독재정권에 맞

기념관 건너편에 있는 통일교육원 경내에 있다 보니

섰고 굴욕적 한일회담반대운동에 나섰던 신숙, 유신

탐방객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임시정부에서

독재정권에 맞섰던 양일동 등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

활동한 신익희와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신하균 부

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자의 묘소도 다른 독립운동가의 묘소와 자연스럽게

일제에 맞선 우리의 독립운동은 자유, 평등, 연대

연결되지 않다보니 접근이 어려운 편이다. 이준 열

의 민주공화국을 목표로 한 미래지향적인 독립운동

사의 묘소와 신익희 · 신하균 부자의 묘소를 연결하는

이었기에 1919년 위대한 3 · 1운동의 열기를 흡수하

길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 수밖에 없는 대목

여 곧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고,

이다.

1945년 8 · 15 광복 이후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준 열사 묘역

지금은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에 있는

통일교육원 안에 있는 이명룡 묘와 묘비

순국 스크랩 • ‘독립민주의 길’ 탐방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난 독립유공자들 

  85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한국광복군 사령관 지청천 기적비(紀蹟碑)와 과거 언론에 보도된 강우규 의사 묘소 위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묘소도 원래는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서울현충원으로 이

수유리 북한산 자락에 있었다. 1994년에 이장했지

장하면서 땅 속에 묻었다는 묘비는 지금도 그 자리

만, 지금도 북한산 자락에는 지청천 장군의 묘소 터

에 그대로 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한국광복군 합동묘 소 터와 마찬가지로 정비하여 탐방객이 찾을 수 있

분단극복을 위해 싸우다 역사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도록 관리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었다.

여운형을 생각하며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있는 강우규

여운형은 일찍이 중국에 망명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의사의 묘소도 수유리 국가관리묘역 인근에 있었다

이 끝난 직후인 1918년에 신규식 등과 함께 신한청

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강우규 의사

년당 조직에 앞장섰고, 김규식을 3 · 1운동의 전야에

는 1919년 9월 2일 새로 부임해오는 조선총독 사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면서는 대중적인 독립운동의

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인물이다. 서대문형

확산을 위해 만주와 일본, 국내에 대표를 파견하는

무소에서 사형을 당한 강우규 의사의 유해는 원래

등 동분서주한 인물이었다. 1929년 일제에 체포되어

신사리(현 은평구 신사동) 수인묘지에 안장되었다,

국내로 압송되었던 여운형은 감옥에서 나온 후 조선

1954년 강우규 의사의 고향인 덕천군민회는 서울시

중앙일보 사장을 맡기도 하였고, 1940년대에는 건국

의 협조를 받아 수유리 우이초등학교 맞은편(산107-

동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에 묏자리를 마련하여 강우규 의사의 유해를 이장

여운형은 해방정국에서 분단을 거부하고 통일민

하고 이듬해에는 묘비도 세웠다. 이 수유리 강우규

족국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였지만,

의사의 묘소는 1966년 국립묘지로 이장되기 전까지

1947년 7월 19일 분단이 기정사실화되는 흐름 속에

12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우이초등학교와 건너

서 극우파 청년 한지근의 총에 혜화동로터리에서 암

편 우이감리교회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살당하고 말았다. 여운형의 장례식은 인민장으로 치

86    

  2023년  4월

근현대사기념관 입구 여운형 흉상과 부근의 여운형 묘소, 묘비

러졌고, 무덤은 미군정의 반대로 서울 시내에 마련하

단극복을 위해 헌신한 분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평

고자 하는 계획이 좌절되면서 우이동 지금의 자리로

화통일의 소중함과 절박함을 배우는 뜻깊은 시간이

정해졌다.

었다고 했다.

여운형의 묘소가 다시 한번 대중적 관심의 대상으

여기에 함께 참여한 한 어린이가 여운형의 묘소

로 떠오른 것은 1991년 남북여성토론회에 북측 대표

앞에서 줄넘기를 한 일도 평생 잊지 못할 명장면으

로 참석한 여운형의 딸 여연구가 묘소를 참배했을 때

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참석자들은 한반도의 미래

였다. 딸이 44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묘소를 참

를 책임질 한 어린이의 줄넘기가 평소 체육을 좋아

배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분단의 아픔을 뼈저리

하신 여운형 선생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기를

게 느끼는 장면이었지만, 합의에 없던 김일성의 조화

바라면서 이날의 ‘독립민주의 길’ 탐방을 마무리하

가 등장하면서 벌어진 남북의 옥신각신은 분단된 한

였다.

반도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비극적 장면이었다. 필자가 참여한 이번 여운형의 묘소 참배는 두 가 지 점에서 뜻이 깊었다. 하나는 심산 김창숙 선생의 손녀 김주 여사와 함께 참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주 여사는 여운형의 묘소 근처에 산다고 했다. 다 른 하나는 여운형의 삶을 되짚어보면서 이날의 탐방 이 갖는 의미를 정리해주신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의 짧지만 울림이 있는 말씀을 듣게 된 점이다. 서중 석 교수는 여운형 – 김창숙 - 문익환으로 이어진 분

필자  김학규 서울 동작구에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맡아 지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서 울현충원 역사탐방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는 근현대 역사탐방을 이끌고 있고, 「오마이뉴스」에 ‘동작 민주올레’를 연재하고 있 다. 저서로 『현충원 역사산책』,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 『낭만과 전설의 동작 구』, 『동작 민주올레』 등이 있다.

순국 스크랩 • ‘독립민주의 길’ 탐방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난 독립유공자들 

  87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순국시론 동산 류인식의 삶과 교육구국운동

협동학교와 민립대학 설립운동 주도, 교육구국 도모 글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우리의 운명을 여하히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들 일이 모두 다 필요하도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닐 수 없다.…그처럼 중 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도다.….”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은 1865년(고종 2년) 5월

군의 쇄국정책과 충돌을 빚으면서 우리나라에 많은

3일 경상도 예안에서 출생하여 척암(拓菴) 김도화(金

희생을 가져왔다. 또, 천주교에 대한 탄압정책을 펴

道和 : 1825~1912)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928

면서, 우리나라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년 4월 29일 64세를 일기로 영면의 길에 들었다.

일로 말미암아 프랑스와의 충돌도 많은 국력의 손실

그런데, 동산의 청소년기는 미국 · 영국 · 프랑스 · 독

을 초래하였다.

일 · 러시아로부터의 개항 압력에 시달리고 있는 시기

우리 조정을 괴롭히는 것이 이것뿐이 아니었다. 이

로서, 나라의 정세가 참으로 암울한 지경에 처해 있

웃한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서

었다. 특히, 미국이 아시아팽창정책을 추진하면서,

서구의 선진한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보다 앞서

우리나라에 대하여 통상을 요구해왔는데, 흥선대원

개화에 눈을 떠갔다. 이처럼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88    

  2023년  4월

은 우리의 조정에 통상을 요구하거나 꾸준히 침략의 손길을 뻗어왔다. 1875년 9월, 군함 운요호(雲揚號) 의 불법침입으로 야기된 조(朝) · 일(日) 양국의 군사충 돌이 있었는데, 일본은 이 충돌의 책임을 우리 측에 씌워 무력으로 강압, 개항을 강요함으로써 그 결과 강화도조약(1876년)을 체결하고 정치적 · 경제적 세 력을 우리나라에 침투시켰다. 이어서 일본은 1904 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고, 내정 간섭을 시작하였다. 한편, 1894년(고종 31년) 1월 동학농민봉기가 일 어나면서 나라가 참으로 어수선하였다. 이는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항거하여 농민들 이 고부관아를 습격함으로써 발단되었다. 이 때, 조 정에서는 관군의 힘만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 다고 판단, 청(淸) 나라에 원군을 끌어들이면서 새로 운 비극이 시작되었다. 청 나라 군대가 파병되자 일 본이 천진조약(天津條約, 1885년)을 구실로 서울에

협동학교 교직원들. 가운데 왼쪽이 유인식, 뒷줄 왼쪽이 김동삼

군대를 입성시키면서, 우리나라가 청(淸) · 일(日) 두 나라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 때, 동학농민

신으로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외교 경험은 전

군은 진압되었지만, 청 · 일 두 나라의 군대는 철수를

무한 사람이었다. 그는 서울에 부임한 후 1개월여를

거부하였다. 우리 조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칩거하면서 일본의 대조선정책의 걸림돌인 ‘명성황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속담에 “고래 싸

후(明成皇后) 제거’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는 8

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월 20일(양력 10월 8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일본

이 때, 일본은 청 나라와의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

공사관에 관련자들을 불러 놓고 실행방안을 논의하

를 확보해가면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려는 계

였다. 암호명 ‘여우사냥’ 작전이 개시되었다. 검객과

획을 차근차근 실천에 옮겼다. 1894년 6월 21일에

낭인들이 궁궐 뒷편의 황후 침실인 옥호루(玉毫樓)

일어난 갑오변란은 이러한 계획에서 출발한 사건이

로 난입하여 왕비를 참살하였다. 이를 을미사변(乙

었다. 일본은 이에 머물지 않았다. 미우라 고오로(三

未事變, 1895년)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반일감정이

浦梧樓)를 공사(公使)로 조선에 파견하여 그로 하여

격화되어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불꽃처럼 일어

금 새로운 국면을 모색케 하였다. 미우라는 군인 출

났다.

순국시론 • 동산 류인식의 삶과 교육구국운동 

  89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협동학교 설립 취지문(『황성신문』 1908년 9월 27일자).

가산서당(협동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안 에 복원)

협동학교 설립에 앞장서다

는 고통도 감내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동산

이러한 상황에 동산 류인식은 청량산에 몸을 의탁

에게 힘이 된 것은 1906년 3월 고종의 흥학조칙(興

하고, 을미의병(乙未義兵)에 참여하였으나, 꿈을 이

學詔勅)과 이에 이은 경상북도 관찰사 신태휴(申泰

루지 못하였다. 이 후, 국권회복의 방도를 모색하면

休)의 흥학훈령이었다. 특히, 신태휴의 흥학훈령은

서 상경하여 류근(柳瑾) · 장지연(張志淵) · 신채호(申采

관내의 서당을 폐지하고 학교를 설립하도록 장려하

浩) 등과 교유하면서 개화사상에 눈떠갔다. 이 때가

고 학생들의 입학을 강제하였다. 그러나, 동산은 잠

1903 · 4년경이었는데, 이로써 동산의 생애에 큰 변

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서

화를 가져왔다.

교지와 교사(校舍)도 있어야 하고, 재원이 필요하였

그리고, 귀향하여 교육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첫

다. 동산은 이를 위해서 호계서원(虎溪書院)에서 기

시작이 교육을 통해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성회를 열고 유림들의 뜻을 모으고, 가산서당(可山書

1907년, 동산은 이상룡(李相龍) · 김동삼(金東三) · 김후

堂)에서 역사적인 개교를 하였다. 이 때가 1907년 봄

병(金厚秉) · 하중환(河中煥) 등과 힘을 모아 안동 내앞

이었다.

마을에 협동학교를 세우고, 2세 교육에 몸과 마음을

학교의 이름은 “나라의 지향은 동국이요, 향토의 지

바쳤다. 이것이 교육구국운동의 시작이었다. 동산이

향은 안동이며, 면의 지향은 임동(臨東)이므로” ‘동’(東)

교무주임을 맡았는데, 교사는 신민회에서 추천하여

자를 따고, 안동의 동쪽에 자리한 7개 면이 힘을 합해

서울에서 보낸 인사는 이관직, 안상덕, 김기수 3명이

서 설립한 것이므로 ‘협’(協)자를 따서 협동학교(協東

나 되었다.

學校)로 정해졌다. 3년제 중등과정으로 1908년 수업

그러나, 그 출발은 순탄하지 않았다. 보수유림의 반대에 부딪치기도 하고, 스승으로부터 파문을 당하

90    

  2023년  4월

을 시작하였는데, 교과목은 수신 · 국어 · 작문 · 한문 · 역 사 · 지리 · 화학 · 생물 · 체조 등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립대학 설립운동 발기 인 참가 동산의 교육을 통한 인 재양성의 꿈은 이에 머물 지 않았다. 1920년 6월, 한규설(韓圭卨) · 이상재 (李商在) · 오긍선(吳兢善) 등이 발기인이 조선교육 협회를 창립하고 민립대 학의 설립에 착수하였는 데, 동산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창립총회(1923.3.29) 기념사진

29일, 조선기독교청년회 관에서 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발기취지서를

이었다.

채택하였다. 이 취지서에 “우리의 운명을 여하히 개

그런데, 이렇게 설정된 계획에 따라 대학설립을 위

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들 일이 모

한 절차를 거족적으로 추진해나가자 총독 사이또오

두 다 필요하도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

마코토(齋藤實)를 비롯한 일제는 크게 당황하고, 이

며 가장 급무가 되고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운동의 저지에 나섰다. 이로써, 동산 류인식을 비롯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닐 수 없다.…그

한 민족지도자들의 민립대학 설립의 꿈은 좌절되고

처럼 중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말았다.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도다.….” 이것이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첫 걸음이었다. 동산은 중앙 집행위원 30인 가운데 1인으로 선임되었는데, 경상 도 각지를 순회하면서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전개하 였다. 이 때,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도 수

필자  권용우

립되었는데, 대체로 3단계로 나누어 실행에 옮겨가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는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즉, 제1단계에는 법

노사대학원장 ٠ 행정법무대학원장 ٠ 부총장 ٠ 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 ٠ 법과대학장 ٠ 산업

과 · 문과 · 경제과 · 이과를, 제2단계에는 공과를, 제3단

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

계에는 의과와 농과를 설치하는 단계적 계획이 그것

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 포럼 대

순국시론 • 동산 류인식의 삶과 교육구국운동 

  91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한 번 더 생각하는 역사

『정치: 아와 비아의 헤게모니 투쟁』 서평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절실

신채호와 안토니오 그람시를 ‘아비헤투’ 개념으로 연결 설명 글  김학준(단국대 석좌교수)

‘한국적 정치학’이 성립될 수 있는가의 물음은 아직도 유효하다. 저자는 이 물음에 대해서도 성실한 답변을 진지하게 시도했다. 그러나 ‘한국적 정치학’에 대한 토론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이며, 그 토론에서 이 책의 학문적 가치는 충분히 인정될 것이다. 신채호가 저 유명한 「조선혁 명선언」을 발표한 때로부터 백주년이 된 올해, 이 책을 통해 신채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이 책의 공은 크다.

『정치: 아(我)와 비아(非我)의 헤게모니 투쟁』 (김학노(金學魯), 박영사, 2023)

신채호와 그람시를 연결한 첫 시도

킨 용어다.

이 책의 제목에 접한 독자는 우선 우리 겨레의 위

신채호와 그람시 두 사람에게는 비록 국적은

대한 사상가이면서 독립운동가로, 역사를 ‘아와 비아

달랐고 서로 몰랐지만, 공통점이 있다. 신채호는

의 투쟁’으로 정의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1880~1936년에 살았고 그람시는 1891~1937년에

을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이 책의 머리말에

살았던 사실에 보이듯 동시대인이었다. 신채호는 일

해당하는 「책을 내며」에서 자신이 단재의 그 정의에

제 군국주의에 대항해, 그람시는 이탈리아 파시즘에

공감해 정치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세움에 있어서 기

대항해, 한 치의 양보나 타협없이 투쟁했으며 옥사했

둥으로 세웠다고 설명했다. 그다음으로, 이 책의 제

거나(신채호), 사실상 옥사했다(그람시). 그들의 선언

목에 들어가 있는 ‘헤게모니’는, 저자의 설명 그대로,

과 이론은 모두 ‘투쟁’으로 귀결됐다. 이 두 사람을 ‘특

파시스트 무솔리니 시대 이탈리아의 정치이론가이

별히 좋아하는’ 저자는 그들의 개념을 ‘아비헤투’로

면서 반독재투쟁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발전시

묶은 뒤 그것을 중심으로 정치를 정의하고 설명하고

92    

  2023년  4월

자 이 책을 썼다. 신채호와 그람시 각자에 관해서는 많은 저 술이 출판됐다. 그러나 ‘아비헤투’라는 개념으 로써 두 사람을 연결해 설명한 저술은 전 세 계를 통해 이 책이 유일하다. 또 정치에 관해 서도 많은 저술이 출판됐다. 그러나 ‘아비헤 투’라는 개념으로써 정치를 정의하고 설명한 저술은 전 세계를 통해 이 책이 유일하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 책의 독창성이 인정 된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와 저서 『감옥에서 보낸 편지』(양희정 번 역, 민음사, 2000)

‘한국적 정치학’의 정립을 위해 돌이켜보면, 저자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

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다시 저자에 따르면,

치학과와 그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저자의 표현으로,

“때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

주로 미국의 정치학자들이 개발한 이론들과 개념들

다.” 다행히 자신의 선학들이 자신과 동일한 문제의

을 배웠다. 이어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슨 캠퍼

식을 갖고 열심히 그들 스스로 학문세계를 구축해

스)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미국식 정치학’을 배워 그

왔음을 깨닫게 됐으며, 특히 문승익(文丞益) 교수가

바탕 위에서 유럽통합을 분석한 논문으로 박사학위

1970년 이래 ‘자아준거적(自我準據的) 정치학의 수

를 받았으며,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다시 저

립’을 위해 노력해왔음을 인정하게 됐다.

자의 표현으로, ‘미국식 정치학’을 강의했다. 그러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선학들이 이루

배경의 그가 무슨 까닭에서 신채호와 그람시를 소환

어놓은 학문적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고 싶다는 강

해 위의 책을 쓴 것일까?

한 바람[을 갖게되어]” 이 주제에 몰두하게 됐고, 그

저자는 「책을 내며」에서 ‘우리의 정치학’을 수립하

결과를 우선 「정치, 아(我)와 비아(非我)의 헤게모니

려는 시도에서 이 책을 썼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

투쟁」이라는 논문으로 작성해 『한국정치학회보』 제

가 공부하고 가르치며 배우는 정치학이 ‘수입된’ 정치

44집 제1호 (2010년 3월)에 발표했다. 이 논문은 하

학으로서 우리의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자각을 하게

나의 시발이었다. 저자는 이어 「남과 북 서로주체적

됐고,”… 이러한 ‘자각’으로부터 ‘미국의존성에서 벗

통합의 밑그림」 (『한국정치학회보』 47집 4호, 2013

어난 한국적 정치학의 수립’을 제의하게 됐으며, 그

년 9월), 「분리-통합 및 홀로주체-서로주체의 개념

제의를 현실화하기 위해 계속해서 작업을 해 이 책을

과 척도」 (『한국정치연구』 27집 1호, 2018년 1월)

펴냈다고 부연했다.

등을 발표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논지에 대한 비

한번더생각하는역사 • 『정치:아와비아의헤게모니투쟁』서평   

93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한 번 더 생각하는 역사

평 또는 반론에 답하는 형식으로 몇 편의 논문을 발

깊은 이해가 없이는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기 어렵

표했다. 저자의 이러한 노력의 축적이 결국 서두에

다. 저자는 이러한 용어들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

서 소개한 이 책의 출판으로 나타났다.

면서 논지를 전개해 이 주제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 들을 설득력 있게 이끌었다.

많은 것을 새롭게 생각하게 만든 책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가르치

나의 전공 주제들 가운데 하나인 남북통일 문제,

듯, 과연 ‘한국적 정치학’이 성립될 수 있는가의 물음

그리고 1946년의 ‘인민항쟁’을 저자의 ‘아비헤투’ 이

은 아직도 유효하다. 저자는 이 물음에 대해서도 성

론으로 새롭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

실한 답변을 진지하게 시도했다. 그러나 ‘한국적 정

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우선 나의 정

치학’에 대한 토론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그 토

치학적 또는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이 매우 부족하

론에서 이 책의 학문적 가치는 충분히 인정될 것이

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

다. 단재가 저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 때

고 있고 인용하고 있는 이론들과 저서들의 폭이 워

로부터 백주년이 된 올해, 이 책을 통해 단재를 다시

낙 넓었기 때문이다. 특히 ‘혐오’ ‘여성혐오’ ‘풍기문

생각하게 만들어준 것만으로도 이 책의 공은 크다.

란’ ‘정신병 환자’ ‘스티그마’ ‘불화’와 같은 단어가 말 하듯, 심리학적이며 정신분석학적 용어들에 대한

필자  김학준 1943년 중국 심양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트주립대와 피츠버그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단국대학교 이사장, 인천대 학교 총장, 동아일보사 사장·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임 중이다.

94    

  2023년  4월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순국선열의 희생 위에 건립된 대한민국’이란 내용을 반영하기를 촉구합니다.



보상금은 서훈을 받은 분은 누구나 수혜일로부터 2대 보상을 받도록 개정을 촉구합니다. ●

(사)대한민국순열유족회를 공법단체로 법제화할 것을 촉구합니다.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②

대대로 물려온 전답과 집 처분, 남만주로 이주, 망명 시작

압록강 건너기 직전 한달 동안 노심초사하며 거의 매일 일기 써 글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지난 호에 이어 1911년 1월 초부터 시작된 석주의 망명일기를 읽어간다. 『국역 석주유고』를 저본으로 하여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약간의 설명을 붙이고 일부 내용은 삭제하여 게재하였다.

5일. 새벽에 일어나 사당에 절하고 물러나와 작은

눈물을 뿌리며 전송하였다.

아우 봉희(鳳羲), 두 분 당숙과 더불어 집안일을 구분

소산(蘇山)의 김흥한(金興漢)이 일부러 나를 보러

하여 처리하였다. 논 몇 마지기[頃]는 남겨서 네 분

찾아오는 도중에 만나서 한 시각이 넘도록 이야기를

윗대의 제물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누었다. 저물어서 평리(平里)에 이르렀다. 저녁 먹

석주는 400년 이어온 임청각의 종손이었다. 망한

은 후에 주머니를 털어 동전 네 꿰미로 술과 안주를

조국을 되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종가를 떠나면서

마련하고 법흥 마을 일족을 불러 함께 즐긴 후에 자

종가의 ‘씻나락’은 남겨두어 누대의 제사비용에 대

리를 파하였다.

비하고 노비문서를 불태워 하인들이 양민이 되게 하였다.

6일   바람이 매우 차갑다. 재종조 종하(鍾夏)씨가

그리고 다시 밭 몇 마지기를 남겨두어 (남아서 고

지전 1원을 노자에 보태라고 주신다. 행차가 안동 동

향을 지킬) 두 조카와 두 분 당숙의 의식 비용을 대도

문 밖에 이르자, 재종조 종기(鍾基)씨가 미리 나와 기

록 하였다. 1백 꿰미[緡]의 동전을 기부하여 흉년에

다리고 있었다. 대개 어제 함께 가기로 약속했었기 때

일족을 구조하는 데 쓰도록 하고, 다시 30 꿰미를 내

문이다. 송기식(宋基植)이 또한 와서 전송하는데 문어

어 재종조 종봉씨의 빚을 갚는 데 보조하였다.

한 마리를 행로 중 찬거리에 보태라고 내놓았다.

식후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재종조 정우

정오 무렵 노복과 말이 도착하였다. 큰 아우 상동

(庭愚)씨는 두 강을 건너와서 전송하니, 평소 애호하

의 소식을 못들은 지 오래인데, 바야흐로 얼굴도 보

는 정이 도타움을 알겠다. 저녁 무렵에 행장을 수습

지 못한 채 헤어지는 것을 서글프게 여기던 차에 때

하여 호연(浩然)히 문을 나서니, 여러 일족들이 모두

맞추어 와서 만나니, 떠나가고 남아 있는 이별의 아

96    

  2023년  4월





➊  임청각에 살았던 고성 이씨 가문의 선조 이종악(1726~1773)의 문집 『허주유고』에 실린 「동호해람」. 당시 임청각과 주변의 낙동강 전

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➋  송기식(1878~1949)의 회갑연 사진(경북매일 제공). 그는 1913년 안동 송천동에 설립된 봉양서숙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18일 3 · 1운동 때 안동면 2차 시위를 계획하고 이끌다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쉬움이 조금은 위로가 된다. 오후에 종기씨 및 김흥한

9일   상주 인봉에 도착하여 강벽오(姜碧梧. 석주

과 함께 30리를 가서 두솔원(兜率院)에 투숙하였다.

의 사위인 강남호의 조부) 어른의 영위에 곡하고 물 러나와 사돈 형제와 회포를 나누었다.

7일   잠깐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10여 리를 가

서 풍산들의 주막에서 김흥한과 작별하였다. 오정 무

10일   노복과 말을 돌려보내고 오후에 출발하겠

렵에 하회에 도착하니, 사돈 류세현(柳世賢)이 이미 내

다고 알렸더니, 강실(姜室=석주의 외동딸)이 눈물바

가 고국을 떠날 뜻이 있음을 알아 대화를 나누는 사

탕을 하며 진정하지를 못한다. 은전 2원을 내주며 나

이 가끔씩 간도의 사정에 대해 언급하였다. 대개 그

중 만날 기약이 머지않으리라고 따뜻한 말로 타일렀

일족인 준영이 장사의 일로 안동(안동; 현재 중국의

다. 종기씨 등과 더불어 30리를 가서 신촌(新村)의 객

丹東, 신의주 건너편 도시) · 봉천(奉天) 사이를 왕래하

점에 유숙하였다. 이날 밤에 눈바람이 크게 일었다.

였으므로 그곳 소문을 제법 들은 것이 있다고 한다. 11일   추풍령에 이르러보니, 낮 기차가 이미 떠나버 8일   아침 먹은 후 출발하려고 하는데 류실(柳室=

렸다. 정거장 남쪽 개울가의 작은 주막에 기숙하였다.

석주의 여동생)이 정에 약하여 눈물을 흘린다. 동전 여 섯 꿰미를 주며 달래었다. 종기씨와 천천히 걸어 재 넘 어 구담에서 잠시 쉬었다.

12일   오전 2시에 경부선 직행 기차를 타다. 을사

년(1905)에 부상(扶桑=현 김천시 개령면 부상리)으로

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② 

  97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양기탁이 만주에서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1916.10.17). 만주는 당파도 없고 인물이 많으니 단합이 잘 될 것 같다는 내용이다. 재정적 기반 을 마련하기 위해 벼농사를 권장하려고 하는데, 안창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묻고 있다(독립기념관 소장).

가던 길에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으나, 기

의 방법이 됨을 알았습니다. 온 나라를 둘러보아도 큰

차에 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8시 12분에 경성의

단체로서 대한협회만한 것이 없는데, 그 전신은 곧 독

남문 밖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렸다. 박원구 군이 길을

립자강회입니다. 드디어 우리 대한의 정신이 여기에

안내하여 일행 네 사람이 제중원(濟衆院)에 같이 묵었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고 지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

다. 한적한 위치에 사옥이 정미(精美)하다. 여관주인

러나 필경 경회(京會 대한협회 본회)는 경회 자신일 뿐

최용호는 예수교인으로 순박 근실하며 글이 능숙하

이었습니다. 그 득실이 지방의 지회와 무슨 상관이 있

여 더불어 이야기할 만하였다. 오후에 박원구 군이 경

습니까? 한스러운 것은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갑작

신학교(儆新學校=연희전문 현재 연세대학 전신)에 가

스럽게 강권을 가진 자에게 해산 당한 것입니다.”라

서 우리 일행의 소문을 자못 크게 전하였다.

고 하였다. 양기탁씨는 “예예”하며 아무 말이 없었다.

13일   아침에 양기탁(梁起鐸)씨가 내방하였는데,

14일   일찍 일어나 씻고 빗질하고 나니, 책상 위에

초면에도 정성스럽고 극진한 모양이 오랜 벗과 다름

책이 한 권 있어, 훑어보니, 곧 『왕양명실기(王陽明實

이 없다. 식후 인력거에 올라 그의 집을 찾아가니, 주

記)』로 국한문을 섞어 편집한 것이었다. 대개 양명학

인이 다과를 마련하여 대접하며 조용히 말하는데, 정

은 비록 퇴계 문도의 배척을 당하였으나, 그 내용이

겨운 뜻을 실감하였다. 양기탁씨가 나에게 협회에 대

직절하고 간요하여 속된 학자들이 감히 의론할 수 있

하여 묻기에, 내가 대략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

는 바가 아니다. 또 그 평생의 지절은 빼어나고 정신

는 암혈의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시국의 변화도 잘 모

은 강렬하였다. 본원을 꿰뚫어 보되 아무 거칠 것이

르면서 오직 옛날 소견만으로 앉아 승패를 점쳤습니

없었으며, 세상의 구제를 자임하였으되 아무 두려움

다. 여러 번의 시도가 다 효험을 보지 못하고 그런 후

이 없었으니, 한대(漢代)와 송대(宋代)를 통틀어도 대

에야 오직 국민이 모인 단체가 나라를 보전하는 핵심

적할 만한 사람을 보기 드물다. 또 그의 독립과 모험

98    

  2023년  4월

의 기개는 더욱 오늘과 같은 시대에 절실하다 할 것이

는 일이라 걱정이 놓이지 않는다.

다. 다만 우리 동방의 풍조는 옛것을 믿는 태도가 너 무 지나쳐, 무릇 선배가 논한 바가 있으면 하나라도 자

19일   9시 10분에 경의선 열차를 승차할 때 여러

신의 의사를 더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합치하지 못

사람이 정거장에 나와 전송하였다. 10시에 개성을 지

한 점이 있으면 문득 이단사설(異端邪說)로 지목한다.

나 사리원에 이르러 용천 사는 신덕인(申德人)이라는

심할 경우에는 ‘성인을 비난하고 법도를 업신여긴다.’

사람을 만났다. 나이는 60남짓 한데 순박하고 진실하

고 배척해 왔다. 이러한 폐단을 고치지 못하면 자유

여 고풍이 있는 사람이다. 간도의 사정에 제법 소상하

의 사상을 꽃피울 수 없을 것이고, 우리나라를 끝내 구

여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니 나그네 길의 괴로

제할 수가 없을 것이다. 모르겠거니와, 우리들 중 어

움을 모두 잊을 만하였다. 오후에 평양에 당도하였다.

떤 사람이 능히 의연하게 자임하여 300년간의 학설

선천에 이르러 신노인을 작별한 후에는 차 안에

을 2천만의 세속된 무리와 도전하여 결투할 것인가?

는 한 사람의 한인도 없고 다른 나라 사람들의 말소

오후에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옮겨오는 일을

리만 떠들썩하니 사뭇 무료함을 깨닫겠다. 신의주에

의논하였는데 양기탁씨가 자신의 일처럼 여겨 일일

이르러 하차하여 대동회사(大同會社)를 찾아가니, 주

이 가르쳐 주었다.

인 신효석(申孝錫)은 곧 신덕인의 재종질이었다. 사 람됨이 그 아저씨와 아주 비슷하다. 한번 보자마자

15일   오후에 고향의 가족들에게 출발하여 올라

마치 오래 사귄 사람과 같이 느껴졌다.

오라는 전보를 쳤다. 21일   용강학교의 학도 이용혁(李龍赫)을 여관에서 16일   귀향하는 종기씨를 전송하였다. 종기씨는

우연히 만났는데 붙임성이 매우 절친하였다. 함께 거

여비를 다 써버렸으므로 6원을 내어 노자에 보태라

리에 나가 유람을 하며 시장의 정황을 두루 둘러보았

고 하였다.

다. 대개 우리 한인의 가게는 초라하고 장사는 쓸쓸하 니, 의관은 자못 정갈하고 훌륭하다. 청인의 경우에는

17일   제중원 주인 최용호가 『성산명경聖山明

상업은 자못 흥성하나 말소리나 용모는 거칠고 비루

鏡』이라는 책을 한 권 주었다. 그 책의 대강의 뜻은,

하며, 고용하여 부리는 사람이 많다. 일인은 거처가 화

유 · 불 · 선 삼교의 내용으로 질문과 응답을 가설하여

려하고 상업이 왕성하며 용모는 강하고 사나웠다. 이

구성한 후 결국은 예수교로 귀결한 것이다.

런 점에서도 세 나라 사람의 우열을 알 수가 있겠다.

18일   집으로 보낸 전보가 도착하였다고 한다. 20

22일   신효석에게 부탁하여 우리나라 돈을 청국

일에 출발하려 하는데, 사방에 감시가 깔려있어 빠

돈으로 환전하였다. 후일에 도강한 다음에 쓸 일이 있

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사하

을 것에 대비해서이다. 일본 사람의 서점에서 만주와

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② 

  99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한국의 지도를 샀다. 23일   도보로 제방 위에서 철로를 따라 압

록강 가에 이르니 강에는 얼음이 굳게 얼어 발거(跋車 바퀴가 없는 썰매 수레)가 왕래한 다. 강 건너 산봉우리가 웅장하게 치솟은 모 양이 본국에서 보던 야트막하고 미약한 형세 와도 같지가 않았다. 일인(日人)이 장차 강 위에 무지개 다리를

중앙선 철도가 부설된 1940년대 초 임청각 전경

놓으려고 돌기둥을 이미 벌여 세웠다. 작년 에 안동에서 봉천 사이의 철로 공사를 이미 마쳤으니, 만약 이 다리가 한번 낙성되면, 연 경이며 여순이며 하얼빈 등지가 모두 하룻길 이 될 것이다. 국력의 부강함이 두려울 뿐 아 니라, 그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큰 야욕이 어 디에 목표를 두고 있는지를 알 만하다. (여기 서 석주가 당시에 압록강 강변에서 만주를 바라보며 지은 시 한 수를 함께 읽어 본다)

1910년대 압록강 철교

압록강 강변에서 만주를 바라보며 鴨綠江上望滿洲

100    

부여가 왕업을 일으킨지 어언 사천년

扶餘王業四千秋

그 때는 국경이 저 만주까지 아울렀네

國境當年幷滿洲

기자와 위만이 아무 까닭없이 차지했고

箕衛無端來占據

한과 당이 이를 좇아서 멋대로 침략했네

漢唐從此恣侵蹂

판도 확장이 원래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恢張版籍元非易

수치 누르고 변방에 처함을 달갑게 여겨

甘處藩屛抑可羞

결국에는 저 길고 긴 압록강으로 하여금

遂令一帶長江水

동서 경계선이 되어 흐르게 하고 말았네

劃定東西兩界流

  2023년  4월

24일   바람결이 매우 맵다. 25일   집 식구들이 만약 정해진 날짜대로 떠났다

27일 강을 건넘 二十七日渡江 삭풍은 칼날보다 날카로와

朔風利於劒

면 오늘이 도착하는 날이다. 저녁 먹은 후에 등불을

차갑게 내 살을 에는구나

凓凓削我肌

들고 정거장에 나가 기다렸다. 밤든 지 오래되자, 과

살 에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肌削猶堪忍

연 일행이 일제히 도착하는 것이 보인다. 맨 앞에 나

애 끊어지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腸割寧不悲

선 것은 아들 준형(濬衡)이고 부녀자 및 어린 것들은 한 가운데 있고, 동생 봉희 부자가 뒤를 따른다. 2천

기름진 옥토로 이루어진 삼천리

沃土三千里

리의 험난한 길에 탈 없이 도착하니 기쁨을 알 만하

거기에서 살아가는 인구 이천만

生齒二十兆

리라. 내가 등불을 들고 앞서서 신효석의 집에 단란

즐거운 낙토 우리 부모의 나라를 樂哉父母國

히 모여 앉았다. 고향 소식을 자세히 들으니, 내가 출

지금은 그 누가 차지해버렸는가

而今誰據了

이미 내 땅과 내 집을 빼앗기고

旣奪我田宅

다시 내 처자마저 넘보나니

復謀我妻孥

발한 후 과연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고 준형은 경찰 서에 구인까지 되었었다고 한다. 26일   동생 봉희가 남은 장구를 수습하기 위해 내

일 돌아가기로 하니, 서글픈 마음에 목이 메인다. 그

머리는 차라리 베어질 수 있지만 此頭寧可斫 무릎을 꿇어 종이 되진 않으리

此膝不可奴

편에 큰 동생 상동과 두 분 당숙께 편지를 부쳤다. 집을 나선지 채 한달이 못 되어서 出門未一月 26일   식사 후에 동생을 남겨두고 발거를 타고 압

벌써 압록강 도강하여 건너버렸네 已過鴨江水

록강을 건넜다. 고개를 돌려 고국을 돌아보니, 돌아

누구를 위해서 발길 머뭇머뭇하랴 爲誰欲遲留

올 기약이 묘연하다. 사람은 목석이 아닌데 감상이

돌아보지 않고 호연히 나는 가리라 浩然我去矣

없을 수 없어서 시 한수를 지었다.

필자  최진홍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고려대에서 경제학 ·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 ·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 임연구원을 지냈고, 현재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를 맡고 있다. 시대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에서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면암 최 익현 선생의 5대손이다.

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② 

  101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90회)

함경북도 성진의 만세시위(1)

그리어슨 목사, 성진면 만세시위 적극 지원

함북에서 가장 빠른 3월 10일 3 · 1운동 첫 시위 전개 글  이정은(3 · 1운동기념사업회장)

성진은 함경북도 남단의 항구도시다. 한말까지 길주군의 일 부였는데, 1899년 함경북도 최초의 개항장으로 지정되면서 성진부로 승격되었다. 1910년 일제에 강제 병합되면서 성 진부는 성진군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망국의 충격과 함께 지 역민의 일제에 대한 반감이 더욱 고조되었을 것이다. 1931 년 성진면이 성진읍으로 승격되고, 1941년 성진읍이 성진부 로 승격되면서, 성진군의 나머지 지역은 학성군(鶴城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북한에서는 6.25전쟁 때 전사한 이곳 출신 김책(金策)의 이름을 따서 김책시와 김책군으로 바꾸었다가 1961년 시와 군을 합쳐 김책시로 만들었다.

그리어슨 선교사 성진에는 캐나다 장로회 의료선교사이자 목사이 며, 교육자인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 한국이름 구례선(具禮善, 1868–1965)이 있었다. 그는 1898년 9월에 한국에 와서 성진과 북간도 용정, 블라 디보스톡 등 북방지역에 개신교의 기초를 놓았다. 그 는 성진에서 제동병원(濟東病院)을 설립 운영하면서, 남녀 보신학교를 설립하여 젊을 세대를 키웠고, 욱정 교회(旭町敎會)로 불린 성진교회의 목회를 인도함으 로써 병원과 학교, 교회의 세 축을 중심으로 기독교

102    

  2023년  4월

성진시 지도와 성진항 원경

성진 북쪽에서 본 성진읍성(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성진병원과 한국인들의 모습(1920년)

의 기반을 다졌다.

송되게 했다.

목수인 아버지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도 한

1919년 2월 중순 함흥을 중심으로 한 학생조직이

국으로 와서 아들을 위하여 집 짓는 것을 도왔다. 그

3.1운동을 계획할 때 그리어슨은 자신의 집에서 지

리어슨은 집을 널찍하게 지어서 성경 등 기독교 전도

역 지도자들이 치외법원 지역인 자신의 집에서 비밀

자료를 파는 자료실과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병원시

모임을 갖도록 허용했을 뿐 아니라, 적극 지원했다.

설을 갖추었다. 이 집은 러일전쟁 기간(1904-5)에는 러시아군 막사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 교회 옆 땅을 더 사들여 성진교회와 보신학교(普信學 校), 성진 진료소를 지었다. 1914년, 그리어슨은 선교위원회로부터 7천 달러 를 지원받아 성진에 현대식 병원을 지었다. 1917년

사전 준비 1919년 2월 중순 함흥 학생 단체로부터 박승봉[朴 承鳳, 일명 박응칠(朴應七)]이 성진의 유지를 찾아 왔 다. 그는 머지않아 중앙에서 놀랄만한 민족적 거사가 있으리라는 것을 전달하고, 호응을 당부했다.

에는 이 성진진료소를 제동병원으로 확장했다. 이

3월 6일 함경남도 원산 예배당에서 성진 예수교회

병원에는 8명의 한국인 의사가 있었는데, 그중 4명

앞으로 독립선언서를 우송해 왔다. 일본 경무총감부

이 보신학교와 성진 YMCA 간부 출신이었다. 교육

고등경찰계가 이 사실을 탐지하고 경계에 들어갔다.

사업의 결실이었다. 재동병원은 1백명 이상의 입원

성진 기독교계의 지도자인 강학린(姜鶴麟)·김상필

환자와 1,700여 명의 외래 환자가 있는 큰 병원으로

(金相弼)·강희원(康禧元)·김영배(金榮培)·이화선(李化

발전했다.

善)·이수용(李秀鎔)·서재영(徐在英)·이효근(李孝根)·서

그리어슨은 1906년 북간도 용정에 집회소를 세웠

유진(徐有珍)·김원배(金元培)·안성윤(安聖允)·김성우

으며, 이것이 1912년 해룡과 1913년 용정에 지부로

(金聖宇)·배민수(裵敏洙) 등은 그리어슨의 제생병원에

발전했고, 아치볼드 바커(Archibald H. Barker)와 도

모여 독립운동 계획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거기서는

날드 맥도날드(Donald A. McDonald) 선교사가 파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하여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

3월의 전설(90회) • 함경북도 성진의 만세시위(1) 

  103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90회)

제1회 성경반 학생들과 함께한 그리어슨목사(앞줄 오른쪽 끝, 1902년)

성진군 성진면 만세 시위 지도

었다. 그래서 일본 경찰의 촉수가 미치지 못하고, 무

(許容弼)이 밤을 새며 서울에서 품에 숨겨온 선언서

슨 일이 있더라도 치외법권으로 보호받는 그리어슨

와 격문을 밤을 새며 3만매를 인쇄하였다.

목사 집에서 회합할 생각을 하였다. 강학린 목사가 이를 위해 성진 욱정교회(旭町敎會) 신도와 함께 3월 7일 저녁 그리어슨 목사를 방문하 였다.

3월 9일은 일요일, 욱정교회 예배에 신도 50여 명 이 모였다. 그리어슨 목사는 욥기 37장 21절을 인용 하며 용기를 북돋우었다. “이제 사람들은 궁창에 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

“그건 곤란합니다.”

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 북방에서는 금빛이 나오

부인 테나는 반대했다. 이전에 블라디보스톡에서

나니 하느님께서는 두려운 위엄이 있으니라.”

한국 독립운동자를 도왔다는 이유로 심한 모욕과 고 초를 당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예배에 서울에 다녀온 2명의 교회대표도 참 석하여 강학린 목사를 비롯한 교회 간부들에게 서울

그러나 그리어슨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상황을 보고하고, 즉시 행동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내 집에 올 때 일일이 승낙을 맡고 다녔

역설하였다. 강 목사 이하 여러 지도자들은 다음날인

습니까? 친구가 친구를 찾아와 이야기를 하는 데 새

3월 10일 월요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연락과 준비를

삼스럽게 무슨 승낙이 필요합니까?”

서둘렀다.

성진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곧 그리어슨 목사 집 에서 계획모임을 했다. 그리어슨 목사도 참석하였다. 그들은 서울 상황을 알기 위해 동지 2명을 서울에 파 견하였다.

3월 10일 성진면 시위 3월 10일 오전 10시경 보신남학교 학생 45명이 태 극기를 들고 교사 안성윤의 지휘 하에 독립만세를 외

교회 청년 김상필·이효근·서유진 등 6명은 보신남

친 후 학교를 나와 욱정(旭町)의 제동병원 앞에 모여

학교 등사판을 그리어슨 목사관 구내 고용인 주택에

나팔을 불어 군중을 불러 모았다. 250여 명이 모여들

가져다 놓고, 3월 7일 함흥 영생학교 졸업생 허용필

었다. 보신여학교 교사 이규용, 제동병원 직원 김원

104    

  2023년  4월

배, 정의택, 농민 이경화, 잡화상 김수용과 음 식점 주인, 시계수선업자, 묘목상 등 예수교 신자들과 천도교 교인들이 함께했다. 이들의 권유로 참여자들은 더욱 늘었다. 시위대는 욱 정을 출발하여 일본인 집단 거주지인 본정(本 町)으로 행진했다. 본정 식산은행지점 부근에 서 성진경찰서 경찰들이 도열하여 저지했다. 일경들이 해산을 명령하고, 태극기를 빼앗 으려 했다. 군중들이 이에 완강히 대항하며 일경을 공격해 부상을 입혔다. 또한 기와 등 을 던져 순사 3명과 경부 1명에게도 부상을

성진 보신학교 학생들의 시위에 관한 함경북도 장관(도지사)의 보고 전문

입혔다. 본정의 일경 저지선을 뚫고 시위대는 성진

교 교사 2명, 예수교 신자 13명이었다. 이들은 재판에

군청으로 나아가 압박했다. 군수가 나와 해산을 종

회부되어 옥고를 겪었다.

용하고 일경들은 무력으로 위협했으나, 군중들은 불

그리어슨은 이렇게 기록했다. “즉각, 소방도끼로 무

응했다. 일경들이 군중들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했

장한 일본인 소방수들과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이 일인

다. 오후 4시 30분경 군중들은 군청에서 물러나 해

정착지에서 출발하여 고요한 한국인 거주지로 쳐들어

산했다.

와 때리고 차고, 총기를 발사했다. 그렇잖아도 진료가

이규용은 오후 9시경 부트선교사 고용인인 마(馬)

몰리는 월요일 부상자들이 병원으로 밀려들어 왔다.”

여인 집에서 서재영, 유명식 등과 독립신문을 등사했

그리어슨은 곧 일본 경찰에 소환되어 독립선언서 3

다. 이후 일경의 가택 수색으로 허용필이 경성에서

만매 인쇄 등과 같이 성진 만세시위를 지원하고 참여

가져 온 격문 60매, 선언서, 등사판은 압수됐다.

한 혐의로 조사받았다. 보신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성

밤 9시경 다시 수백명의 군중들이 읍내에서 독립

진 만세시위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계속)

만세를 외쳤다. 이에 군수, 보신학교장 로스 등이 설 득하고 제지하여 만세 군중들은 해산했다. 일제는 재향군인, 소방조원 및 공장의 직공들까지 동원해 경계를 강화했다. 함경북도장관은 보병 제37여 단 나남부대에 병력 동원을 요청했다. 군부대는 그날 밤 기병 장교와 하사 등 14명을 육로로, 보병 장교 2명 과 병졸 20명은 3월 12일 아침에 해로로 성진으로 출 발시켰다. 성진에서 체포된 주도 인사 15명은 보신학

필자  이정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3월의 전설(90회) • 함경북도 성진의 만세시위(1) 

  105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러시아어 ‘동방의 정복자’, 우리말 지명 해삼위. 만주 · 연해주 독립운동, 그 현장을 가다 ②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지역 부동항, 태평양함대 사령부 위치 전략 항구

연해주 항일투쟁 중심지 개척리 ·  신한촌 등 흔적 모두 사라져 글  이원규(소설가)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 유이민

한인 유민들이 해삼위라고 부른

사, 항일투쟁사와도 연관이 깊다.

교통의 요지

는 크루즈 여행상품도 있었다. 2018년 11월 말, 공항에 내려

초기 이민 시대에 연해주를 지배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어로

서 탄 택시가 좌석벨트도 없고 시

하던 제정 러시아 총독은 연해주

‘동방의 정복자’라는 뜻을 가졌다.

속 150km로 달려 벌벌 떨었던 기

와 시베리아 개척에 한인을 최대

인천공항을 이륙해서 두 시간 남

억부터 난다. 시내에 도착해 호텔

한 이용하려고 자유이민법을 제정

짓이면 도착할 수 있어서 코로나

에 짐을 풀고 독수리 전망대부터

하고, 보호정책과 함께 그들을 러

팬데믹 이전에 한국인 여행자들

갔다. 세계 어느 항구를 가도 이보

시아화하기 위한 동화정책을 폈

이 많이 찾은 곳이기도 했다. 강원

다 전망 좋은 곳은 드물다.

다. 그래서 수많은 유민이 두만강

도 속초에서 하룻저녁 자면서 가

블라디보스토크는 지리적으로

을 건너 이곳까지 진출해 한인공 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이 도 시를 해삼위(海蔘威)라고 불렀다. 그리고 연해주 전체의 항일투쟁 역량을 응집시키는 역할을 했다.

독수리 전망대에서 본 블라디보스토크 금각만 전경

106    

  2023년  4월

는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반도 의 남단, 표트르 대제만(灣)에 포 함된 작은 금각만(金角灣)을 안고 있는 항구도시이다. 극동의 부동 항(不凍港)으로서 1860년대 이래 러시아 극동 진출의 발판 구실을 했다. 1903년에 시베리아 횡단열 차가 개통되어 러시아 중심부로 연결할 수 있게 되면서 그 위상이

블라디보스토크역. 100여 년전 모습 그대로이다.

더 커졌다. 지금도 러시아 해군의 태평양 사령부가 앉아 있다. 한국 유이민사, 항일투쟁사와 도 연관이 깊다. 초기이민 시대에 연해주를 지배하던 제정 러시아 총독은 연해주와 시베리아 개척 에 한인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자 유이민법을 제정하고 보호정책 과 함께 그들을 러시아화하기 위 한 동화정책을 폈다. 그래서 수많 은 유민이 두만강을 건너 이곳까

옛 개척리 전경. 아래에 블라디보스토크 카레이스카야거리의 시장이라는 설명이 있다(수원대 박환 교수 제공).

지 진출해 한인공동체가 형성되 었다. 그들은 이 도시를 해삼위(海

(新韓村) 등 옛 한인 집거촌에서

있던 곳을 ‘웅덩마태’, 그 위쪽을

蔘威)라고 불렀다. 그리고 연해주

둔덕이나 옛길 등 흔적을 볼 수 있

‘둔덕마태’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전체의 항일투쟁 역량을 응집시

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간 2018

해양공원으로 바뀌어 있다. 1900

키는 역할을 했다.

년에는 그것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년대에 개척리에는 망명해온 의

1937년의 한인 중앙아시아강 제이주 후 연해주에서 한인들의

병장, 계몽운동가 들이 모여 살았

옛 개척리는 해양공원으로 변해

다. 1908년에 고종황제가 블라디

삶의 흔적은 거의 다 사라졌다.

옛 개척리는 현재 포크라니치

보스토크로 파천(播遷)하여 망명

30년 전 내가 처음 이 도시에 갔

나야 1번지이다. 200미터쯤 아래

정부를 세우려 한 적이 있었다. 실

을 때는 개척리(開拓里)와 신한촌

는 해안이다. 선착장과 모래펄이

현되었다면 이곳은 황제를 옹위

순국 역사기행 • 만주 · 연해주 독립운동,그 현장을 가다 ② 



107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1999년에 세워진 신한촌 기념비. 길 건너편에 이동휘의 집터가 있다.

하는 거점이 되었을 것이다. 개척

를 타고 도착한 곳도 이곳이고, 동

錫)과 홍범도는 피신해 체포를 면

리의 옛 사진을 보면 ‘우리 동포들

지 이치권(李致權)에게서 이토 히

했다.

이 120년 전에 이 정도로 살았구

로부미(伊藤博文)의 하얼빈행 정

나!’하고 놀라게 된다.

보를 들은 곳도 여기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 옛 개척리 에는 2014년에 세운 작은 기념비

홍범도(洪範圖) 의병장도 그 무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

가 있을 뿐 벽돌 조각 하나도 찾

렵에 망명길에 올라 개척리에 갔

사가 순국하고, 그해 9월 국권피

을 수 없다. 기록을 보면 1911년

다. 계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활

탈 소식이 전해지자 이상설(李相

에 러시아 당국이 콜레라 근절을

동했으나 무장투쟁밖에는 관심이

卨) · 홍범도 · 이범윤(李範允) 등 애

명분으로 우리 동포들을 개척리

없었다. 그는 간부 자리를 박차고

국지사들은 개척리에서 성명회

에서 내몰아 자기들 병영으로 삼

나가 에겔세트 부두에서 하역 인

(聲明會)를 조직했다. 9월 11일 러

았다. 망명해온 의병장, 계몽운동

부로 일하며 군자금을 모았다.

시아 극동공화국 당국이 일본의

가 등 지도자들과 보통의 동포들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한때 기

요구에 따라 성명회와 십삼도의

이 쫓겨가서 새로 자리를 잡은 곳

자로서 몸담았던 『대동공보』가

군 간부 200여 명을 체포하는 사

은 신한촌이다.

발행된 곳도 개척리였다. 1909년

태가 벌어졌다. 이상설과 이범윤

10월 초, 안 의사가 두만강 국경

을 비롯한 8명의 간부는 이르쿠

가까운 연추(延秋, 안치혜)에서 배

츠크로 유배당했고 유인석(柳麟

108    

  2023년  4월

신한촌의 기념비 1912년 신채호(申采浩) · 이상

설 · 장도빈(張道斌) 선생이 『권 업신문』을 창간했다. 1914년에 는 대한광복군정부를 결성했다.

➊  ‘백마를 탄 김장군의 전설’ 김경천 장군의

1932년 모습(외증손녀 김올가 씨 제공) ➋  김경천이 누명쓰고 숙청 당하기 전에 교 수로 일했던 옛 조선사범대학 건물

1919년 3월 17일에는 고국에서

“노인네가 목소리가 쩌렁쩌렁

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했지. 총바치(포수) 출신이라 유식

시위를 벌였다. 그다음 해 삼일절

하진 않아서 봉오동 대첩을 설명

에는 아치형의 독립문을 세웠다.

하는데 육두문자를 많이 썼어. 나

일본군은 1918년 러시아 볼셰

는 개구쟁이 친구들과 함께‘제에

비키 혁명군인 적군(赤軍)과 차르

미 씨부럴’하는 소리를 몇 번 하시

황제 편인 반란세력 백군 간의 내

나 세었는데 열여섯 번이었지.”



전에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출병했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러시아 적군 한인 부대 연합군과 충돌하자 이를 핑계로 신한촌과 우수리스크의 한인촌을 기습하였 다. 많은 지도자가 체포되고 처형 당했다. 신한촌 독립문은 연해주 동포 들의 독립정신을 상징하는 기념 물이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없 다.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독

우스운 일화이지만 소중한 역

립문이 있던 자리’라는 간단한 표

사의 일부이다. 홍범도는 60대 후

지판이라도 세웠으면 좋겠다.

반에 들어 은퇴군인 연금을 받으

독립문 자리를 짚어보고 신한촌 언덕을 내려갔다.

1993년 전세기를 타고 독립기

며 1937년 중앙아시아강제이주

김경천이 강의한 대학건물과 일

념관과 함께 간 첫 연해주 답사

직전까지 니꼴라예프카의 한 콜

본영사관

때, 신한촌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

호스에서 수직원(守直員)으로 일

바다 쪽으로 100미터쯤 이동

고(故) 송희현(宋喜鉉) 선생의 안

하고 있었는데 그때 신한촌에 다

하면 ‘A2 서울스카야’라는 표찰

내로 독립문 자리를 밟아보았다.

시 왔던 것이다.

이 보인다. 강제 이주 전 한인들이

송 선생은 거기서 연설한 홍범도 장군을 회상해 들려주었다.

그런 증언을 해줄 노인마저 사

살았던 거리 이름이 남은 것이다.

라진 것을 아쉬워하며 기억 속의

30년 전 처음 갔을 때는 전통적인

순국 역사기행 • 만주 · 연해주 독립운동,그 현장을 가다 ② 



109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심 역할을 한 곳, 100년 전 흑백사 진을 보면 흉물스러운데 러시아 인들이 밝은색을 칠해 사뭇 우아 한 모습이다. 일본총영사관 건물 앞길을 내 려가면 부두가 보인다. 조금 더 가 면 러시아풍 건물 블라디보스토 크역에 이른다. 100년 전 우리 선 열들이 항일투쟁을 하며 무수히 옛 일본총영사관 건물. 최근 도색하여 밝은 느낌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한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총본산이었다.

드나들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건 물 외양은 옛 사진 그대로인데 안 으로 들어가면 리모델링을 잘해 서 산뜻하다.

바라크 주택 이즈바가 있었는데

문서 관련 자료를 구해 실었다. 건

항구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

지금은 산뜻한 신축 건물로 바뀌

물은 청회색 페인트가 칠해진 3

러시아의 태평양 해군사령부 건

어 있다.

층 구조인데 현재는 은행과 파데

물이 앉아 있다. 국제간섭군 시절

그곳을 떠나 부두로 향하면 큰

예프 도서관 겸 노동자 동맹 연해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홍

길 왼쪽 오께얀스카야 프로스펙

주 지방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

범도가 총 몇 자루를 사고 군자금

트 18번지에 1931년에 설립했던,

고 있다.

을 모으기 위해 부하들과 막노동

해외 소재 최초 한인들의 대학인

항구 쪽으로 더 걸어 내려가면

조선사범대학 옛 건물이 세월의

사거리를 끼고 낮은 비탈길에 옛

풍상을 이기며 서 있다. ‘백마 탄

일본총영사관 건물이 아직도 견

김 장군’, ‘원조 김일성’의 전설 김

고한 모습으로 서 있다. 아드미랄

경천(金擎天) 장군이 간첩죄로 억

라 포키나 18번지이다. 우리 독립

울하게 숙청당하기 전까지 교수

운동사 일본 관헌자료들을 보면

로 일하던 곳이다. 그는 조국 광

‘포조(浦潮) 영사관’이 무수히 나온

복을 보지 못하고 우랄산맥 너머

다. ‘포조’는 일본어로 블라디보스

유형지에서 순국했다. 나는 『김경

토크를 뜻하는‘우라지오’이다. 영

천 평전』을 쓸 때, 소련 비밀경찰

사관은 국제간섭군 출병 이후 한

이 김 장군에게 누명을 씌운 기밀

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중

110    

  2023년  4월

을 한 에겔세트 부두도 가까운 곳 에 있다. 필자  이원규 인천고, 동국대학교 국문 학과 졸업. 현대문학 장 편소설 공모 당선으로 등 단. 분단 주제 소설들을 주로 썼으며 독립투사들 평전도 썼다. 소설집 『훈 장과 굴레』 · 『황해』 · 『천 사의 날개』 · 『마지막 무관생도들』 등, 평전 『약산 김원봉』 · 『김산 평전』 · 『조봉암 평전』 · 『김경천 평 전』 · 『민족혁명가 김원봉』 등을 출간했다. 동국대 겸임교수로서 오랫동안 소설을 강의했다.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서구 근대문화, 전통문화 어우러져 풍부한 구경거리, 이야기거리가 있는

대구 근대문화골목

선교사주택 3 ·1   운동길 교회 ·성   당 이상화고택 등 이어져 글 · 사진  편집부

대구, 옛지명 달구벌은 일찍부터 사람 들이 살기 좋은 터였다. 넓은 들과 산,

말 봄꽃이 한창 피어나고, 젊은 남

유명한 청라언덕, 동산(東山) 지난 3월 하순 방문한 대구 근

녀와 가족, 관광객이 몰리는 명소

대문화골목의 청라언덕 일대는 적

가 되었다. 우리가 학창시절 많이

어도 하나의 ‘낙원’처럼 보였다. 일

불렀던 박태준 작곡의 ‘동무생각’

찍 핀 여러 꽃들과 벚꽃, 그리고 여

에 나오는 노래말의 배경 ‘청라언

산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나라와

러 문화재와 볼거리 등을 보고 즐

덕’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박

백성의 안녕을 기원했다. 또 통일신라

거워하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

태준의 첫사랑은 대구 계산학교

가 도읍을 경주에서 옮기려 했던 큰 고

니 그렇게 생각되었다.

(청라언덕 옆 계성중고의 전신) 시

강이 어우러지고 사통팔달의 요지로 다 양한 사상과 이념, 사람들이 몰린 삶터 였다. 대구의 진산(鎭山)으로 신라 김 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기원했던 팔공

을이기도 했다. 대구 사람들은 마을 등 을 통한 공동체 의식이 강했고, 국난 위 기 때마다 나라와 지역사회 공동체를 위한 활동을 활발히 펼쳤던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팔공산에서 대구사람을 비롯한 여러 고을의 의병과 승병들이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

절 짝사랑하던 이웃 신명여고 학

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 꽃 향내맡으며 너를 위해 노 래부른다 ~~~” 이 노랫말에 무척 잘 어울리게, 요즘 청라언덕은 정

힘을 모아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➊ ➊  박태준 ‘동무생각’ 노래비 ➋  청라언덕과 연결되는 3 · 1만세운동길 90계단

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 대구 근대문화골목  



  111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➌  선교사 블레어주택  ➍  선교사 스윗즈주택  ➎  초기 선교사 전도 모습  ➏  서상돈 고택

생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초기

이 세워졌는데, 붉은 벽돌 건물에

에서 연유한 2세 나무가 보호수로

가곡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동무

푸른 담쟁이덩굴이 휘감아 덮고있

지정되었으나, 고사하여 바로 옆

생각’은 이렇게 태어났다.

는 모습을 보고 ‘청라(靑蘿)언덕’으

에 3세목을 심어 현재까지 그 역

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성을 계승하고 있다.

청라언덕은 대구에 있는 토성인 달성(達城)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

과거에 대구가 사과의 명산지로

청라언덕에 있는 현재 대구제일

산(東山)으로 불렸다. 그러나 1899

자리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아담

교회는 일제강점기 대구시 중구

년 미국 북장로교의 아담스와 존

스 선교사 · 존슨 의료선교사가 교

남성로에 있는 북장로교 선교사

슨 선교사가 달성 서씨 문중에서

회 교인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서

들이 건립한 경상북도 최초의 기

조그만 동산 일대를 구입하여 조

양 사과나무를 도입하여 보급한

독교회인 남성정교회가 전신이다.

선 선교의 본거지로 삼게 되었다.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라언

이 교회는 1933년 미국 북장로교

이곳에 병원과 교회, 선교사 주택

덕에는 존슨이 가져온 사과나무

회 선교부에서 세운 경상북도 최

112    

  2023년  4월

초의 기독교 교회로 교세가 확장

게 여행할 수 있는 장애물 없는 관

되어 ‘제일교회’로 개명했다. 1898

광지이다. 2019년에도 한국관광

년 기와집 4동을 구입하여 교회당

100선에 선정되는 등 대구의 역사

으로 사용하면서 경북 지방 최초

와 문화를 체험하기 위한 공간으

의 기독교 교회인 남성정교회가

로 대구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

창립된 것이다. 이후 교세가 확장

게 사랑을 받고 있다. 실제로 외국

됨에 따라 1908년 재래 양식과 서

인 관광객들도 상당수 찾아오고

구 건축양식을 절충하여 단층의

있는 실정이다.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또 1933년

대구광역시 도심에 위치한 중구

9월 신도들의 헌금과 지방 교회의

는 2006년 이상화·서상돈 고택을

성금으로 지금의 벽돌조 교회당을

중심으로 ‘근대문화공간디자인개

건축하고 제일교회로 개명하였다.

선사업’에 선정되면서 국비를 지

1937년에 벽돌로 높이 33m의 종

원받아 대구 지역의 근대사를 중

근대골목투어 중 가장 인기 있는

탑을 세워 현재의 모습을 완성하

심으로 스토리텔링 기법을 이용한

코스이다. 1.64㎞로 짧은 코스이지

였다.

‘근대골목’을 만들었다. 이후 주제

만 2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코스(동

별로 5개 코스를 만들어 ‘대구골목

산 청라언덕-3·1만세운동길-계산

2012년 한국관광을 빛낸 10개

투어’, ‘골목투어’ 상표를 등록하게

성당-이상화 고택-서상돈 고택-

의 별 선정

되었다.

대구 구 교남 YMCA 회관-구 제일

1902년 세워진 계산성당

‘대구 근대골목’은 2012년 ‘한국

제1코스는 경상감영 달성길이

교회-약령시 한의약박물관-마당

관광을 빛낸 10개의 별’(한국관광

다. 북성로와 서성로를 중심으로

깊은 집-진골목-공감 게스트 하우

100선)로 선정되었고, 2013년에

한 3.25㎞에 2시간 30분이 소요되

스-대구 화교협회)이다. 대구의 근

는 ‘지역문화브랜드 대상’을 수상

는 탐방코스(경상감영공원-향촌문

대 문화의 발자취를 담은 곳으로

했다. 또 2014년에는 ‘대한민국 걷

화관-북성로-경찰역사체험관-최

국채보상운동을 주창한 서상돈 등

기 좋은 길’에 선정되었다. 2015년

제우 나무-달서문-이상화 생가-이

대구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에는 누구나 쉽고 즐겁게 여행할

병철 고택-삼성상회 옛터-달성공

제3코스는 패션한방길이다. 동

수 있는 무장애 여행지인 ‘열린관

원)이다. 대구의 과거 달구벌을 떠

성로와 남성로를 중심으로 한 2.6

광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열린관

올릴 수 있는 테마로 조선시대 대

㎞에 2시간 정도 소요되는 탐방코

광지는 장애인(지체, 시각, 청각),

구의 모습과 근대 사회로 발전하

스(주얼리타운-교동귀금속가게-

노인, 영유아 동반가족 등 모든 관

는 대구의 변천사를 느낄 수 있다.

동성로-남성로[약령시]-서문시장)

광객이 이동의 어려움 없이 즐겁

제2코스는 근대문화골목이다.

이다. 대구의 중심인 동성로와 과

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 대구 근대문화골목  

  113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➐  이상화 고택 내부 전시  ➑  이상화 생가 안채

거 상업의 중심지였던 약령시를

하는 장소였던 문우관(상덕사) 등

길, 계산성당, 민족시인 이상화와

테마로 한 코스다.

다양한 종교(천주교, 불교, 개신교

국채보상운동을 주창한 서상돈의

등)와 이국적 건축물을 느낄 수 있

고택, 근대문화체험관인 계산예가,

는 테마로 구성되었다.

조선에 귀화한 중국인 두사충(杜

제4코스 삼덕 봉산문화길은 골 목투어 코스 중 가장 긴 코스이다. 총 4.95㎞로 3시간 정도의 탐방시

대구시 중구청에서는 골목투어

思忠)의 뽕나무 골목, 400년 역사

간이 소요되는 코스(국채보상운동

뿐만 아니라 근대로의 여행에서

를 자랑하는 약령시, 제일교회, 한

기념공원-삼덕동거리-김광석 다

야경투어, 맛투어, 독립운동 흔적

의약박물관, 조선시대의 과거길인

시그리기길-봉산문화거리-대구향

찾기 투어, 전문가와 함께하는 테

영남대로, 에코한방웰빙체험관, 옛

교-건들바위)이다. 대구의 젊음과

마투어, 도심순환형 청라버스투어

대구의 번화가인 종로, 화교(華僑)

문화예술의 거리를 테마로 일본식

등을 운영하고 있다(「근대골목투

소학교, 진골목 등으로 이어진다.

건축 사찰과 대구의 유명한 음악가

어」,『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김광석, 담장허물기 운동으로 유명 한 삼덕동거리 등을 만날 수 있다. 제5코스 남산100년 향수길은

청라언덕은 대구 지역에서 기독 교가 지역사회에 뿌리내려 정착하

근현대 역사와 문화가 잘 어우러

고 동산의료원이 사회봉사를 통해

진 명소, 근대문화골목

성장한 중심지이다. 또한 대구가

남산과 인쇄골목을 만날 수 있는

근대문화골목은 대구시의 근대

낳은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 박

코스이며, 2.12㎞에 1시간 40분의

문화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길

태준이 학창시절의 추억을 노래한

탐방시간이 소요되는 코스(반월

이다. 비교적 짧은 길이지만 볼거

‘동무생각’의 배경이기도 하다.

당-관덕정순교기념관-성유스티노

리가 많아 다 돌아보려면 2시간 정

3 · 1만세운동길은 1919년 전국

신학교-성모당-샬트르성바오로수

도 소요된다. 대구시의 골목투어를

적으로 일어난 3 · 1운동이 대구에

녀원]이다. 천주교 순교 사적지뿐

전국 유명 관광지로 만든 가장 인

파급되어 3월 8일 일어난 장소이

만 아니라 동화사 말사인 보현사,

기 있는 핵심 거리이다. 동산 청라

다.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서문시

제일교회의 전신인 남산교회, 강학

언덕과 선교사 주택, 3 · 1만세운동

장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만세

114    

  2023년  4월

시위운동이다. 이날 학생들은 선

망명하여 중국군 장교,

교사 주택을 거쳐 청라언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

유명한 90계단을 내려가 서문시

정원 의원으로 활동하

장으로 향하며 시위 독립운동을

며 독립운동을 전개하

전개하였다.

였다. 그는 궁중비사와

1902년 완공된 계산성당은 경

야사 등 역사학에도

상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조예가 깊었으며, 시서

양식의 카톨릭 성당으로 역사적

화, 특히 전각(篆刻)에

전통을 인정받아 사적 제290로 지

능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구에 서

유고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상

정되었다. 또 부근에는 ‘빼앗긴 들’

양화를 처음 들여온 인물이기도 하

화가 경찰에 검거되면서 숨겨두

에 봄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다. 그의 화풍은 서동진으로, 다시

었던 이장희의 시와 자신의 시 상

1943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항

이인성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저서

당수가 발각되어 불태워졌다고

일민족시인 이상화 선생이 사망하

로 『산은유고(汕隱遺稿)』등을 남겼

한다. 참으로 아깝기 짝이 없다.

기 전에 살았던 고택, 1900년대 초

다. 한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권기

최근 이상화 시의 모티브가 된 ‘빼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국권 회복을

옥(權基玉)은 이상정의 부인, 즉 이

앗긴 들’이 대구시 남구 앞산 앞의

도모했던 민족운동가 서상돈의 고

상화의 형수인데 이상정과 함께 부

미군 캠프 워커 부지였다는 사실

택이 있다. 대구 약령시는 조선시

부 독립운동가로 유명했다.

이 밝혀졌다. 종전에는 수성구 수

대부터 이어져 온 3대 한약재 전문 시장이었다.

선교사 챔니스주택과 구 동산의료원 현관(이전 복원)

이상화 시인은 대구는 물론, 우

성못 일대에 있었던 옛 보리밭을

리 모두가 사랑하는 시인이다. 특

보며 ‘빼앗긴 들’을 떠올렸다는 것

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이 정설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상화 형

언제 읽어도 좋다. “지금은 남의

다만 시내 중심가에 있는 이상

이상정 장군

땅 빼앗긴 들에도 봅은 오는가, 나

화 시인의 생가는 재개발을 눈앞

이상화 고택에서 가까운 곳

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

에 두고 있는 구 주택가 한 가운데

에 이상화의 형 이상정(李相定,

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

에 위치하고 있어 향후 보존과 활

1896~1947) 장군의 고택도 있다.

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용대책이 시급한 것으로 보였다.

물론 옛 자취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걸어만 간다 ·  ·  · ” 이상화 시인의 이

대구 근대문화골목에서 개화기

만, 대구시 당국에서 안내 표지판

시는 두고두고 긴 여운을 남긴다.

와 일제강점기 등 근대시기 대구

을 설치해 알아볼 수 있다. 이상정

이장희 시인과 이상화 시인은

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고, 아름

은 계성학교 미술교사, 용진단 위

서로 친구였다. 이장희 시인이 29

다운 봄날을 만끽하는 것도 매우

원장을 지냈고, 1925년 중국으로

살로 자살한 뒤에 이상화 는 그의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 대구 근대문화골목  

  115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자랑스런 우리 것들

태극 · 무궁화 문양 등 새긴

북간도 명동촌 막새기와

명동촌 막새기와에 태극문양 등 새겨 민족의식 고취

용정 3 · 13만세운동의 배경돼 글  김시덕(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교수)

명동촌을 비롯한 북간도 한인들은 막새

1919년 3월 13일 북간도(현재

기와의 항일 민족의식을 상징하는 문양

중국 연변) 용정(龍井) 서전 평야

에서 보듯 일상생활이 곧 항일 민족운동

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 · 13 용정 만세 운동은 북간도

이날 용정 천주교 예배당의 정오

의 항일 민족교육이 있었기에 가

종소리를 신호로 용정 인근에 터

능했다. 북간도에서는 1906년 근

전을 마련한 한인 3만여 명은 일

대식 교육을 지향하는 서전서숙

제히 만세를 불렀다. ‘독립을 선

(瑞甸書塾)을 설립했으나, 1907년

를 항일 민족의식으로 키워나갔다. 독립

포한’ 것이 아니라 ‘포고문’을 낭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선

은 그러한 정신에서 우리에게 왔다.

독하여 ‘독립을 선전 포고한’ 것이

생이 헤이그 특사가 되어 학교를

이었고, 교육이었다. 자나 깨나 항일로 독 립을 하고자 하였다. 한인들은 대한인(大 韓人)의 상징인 태극기와 무궁화, 그리고 십자가로 이은 지붕 아래서 밥을 먹고, 공 부하고, 잠을 자고, 놀면서 생활 그 자체

었다. 독립을 선언한 국내의 3 · 1 운동과는 성격이 달랐다.





116    

  2023년  4월

➊  명동촌 옆 장재촌의 기와집 ➋  명동촌 기와집의 태극문양 막새기와

연주문 삼태극형(1)

연주문 삼태극형(2)

운영할 수 없었다. 재정난과 함께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

인 신학문 교육과 우수 교사 확

1907년 일제가 북간도 한인을 보

보에 나섰다. 커리큘럼에는 항일

호한다는 빌미로 세운 간도 임시

북간도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

민족의식은 물론 무장 독립 투

파출소의 압박으로 문을 닫을 수

명동학교

쟁을 위한 군사훈련 과목도 있

밖에 없었다.

특히 규암 김약연 선생은 용정

었다. 항일 민족교육은 와룡동의

그러나 북간도의 항일 민족교

에 서전서숙을 설립할 때 적극적

창동서숙(昌東書塾), 소영자의 광

육은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았

으로 후원하였고, 감학연, 남위

성서숙(光成書塾), 자동의 정동서

다. 북간도에는 1899년 집단으

언, 최기학 등 문하생을 직접 보

숙(正東書塾) 등으로 확산되어 북

로 이주하여 개척한 명동촌이 있

내 신학문을 배울 수 있게 하였

간도 항일 민족운동의 토대가 되

었다. 선구자 규암(圭巖) 김약연

다. 그런데, 기대했던 서전서숙이

었다.

(金躍淵, 1868~1942) 선생은 장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자

이러한 항일 민족교육은 학교

재촌(長財村)에 규암재(圭巖齋)

규암 선생은 세 서당을 합하여 명

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표

를, 소재(素齋) 김하규(金河奎) 선

동서숙(明東書塾)을 세우고, 신학

적인 것이 명동촌 주택의 지붕에

생은 대룡동(大龍洞)에 소암재를,

문 교육을 시작하였다.

있는 막새기와이다. 막새기와는

남위언(南韋彦) 선생은 중영촌에

이어 1908년에는 명동학교(明

기와로 이은 지붕의 끝을 마무리

오룡재라는 3개의 서당을 열어

東學校)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

하는 기와로 여기에 문양을 넣어

자랑스런 우리 것들 • 북간도 명동촌 막새기와 

  117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자랑스런 우리 것들

태극기 십자가 무궁화 혼합형

지붕을 장식하였다. 명동촌에서 삼태극과 꽃문양 이 새겨진 막새기와를 처음 발

으로 받치고 있는 ‘연주문 삼태극

(兌, 동) · 진(震, 서)의 사괘(四掛)

형’이다. 양각이지만, 기와에 새

를 새겨 태극기를 양각으로 형상

긴 탓으로 문양은 단순하다.

화한 ‘태극기 십자가 무궁화 혼합

견한 곳은 중영촌의 오룡재터였

1918년 증축 때 제작한 것으

형’이다. 괘의 위치와 종류가 다

다. 여기서 중화민국 2년이란 명

로 추측된다. 명동학교가 한창

른 것은 태극기 제작 기법이 통

문을 새긴 암키와와 함께 막새기

번창할 시기인 1914년부터 증

일되어 있지 않았고, 일제 탄압

와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전하

축을 시작하였는데, 미주한인회

을 피하려는 속임수였을 것이다.

는 이야기에 명동촌의 지도자이

에서 의연금을 출연하여 보낼 정

위쪽 리의 좌우에는 원으로 둘

자 ‘간도 대통령’으로 불렸던 규

도로 민족교육의 기치가 높았던

러싼 십자가를 넣고, 아래쪽 감

암 김약연 선생이 기와 기술자에

때였으므로 의도적으로 한인(조

의 양옆에는 5개의 꽃잎이 있는

게 기와 굽는 법을 배워 직접 기

선)의 상징인 태극 문양을 새겼

꽃문양을 새겼다. 십자가는 도안

와를 구웠다는 것이다. 이때 규

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

을 위한 기하문 같기도 하지만,

암재는 물론 명동학교 건물을 지

이 심했으므로 태극기의 2 태극

1909년부터 명동촌 전체가 기독

을 때 막새기와에 문양을 넣었을

이 아니라 전통적인 3 태극을 사

교로 개종하였기에 십자가로 보

것이다.

용했을 것이다. 또한 태극 문양

아야 한다.

6개 유형의 막새기와 문양

막새기와의 문양은 대략 6개 유형으로 나뉜다. 제1유형은 연

이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사

아래쪽 좌우에 대칭형으로 배

용되는 문양이라는 점, 선교사의

치된 꽃문양은 도상화(圖像化)되

보호 등으로 태극 문양을 넣을

어 어떤 꽃을 모티브로 하였는

수 있었을 것이다.

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주문 안의 삼태극형으로, 막새기

제2유형은 삼태극 태극기 십

중앙의 꽃술 부분이 크고, 꽃잎

와 가운데에 오른쪽으로 회전하

자가, 무궁화 혼합형으로 삼태극

의 모양을 볼 때 무궁화로 봐도

는 삼태극이 있다. 다시 이를 연

을 중앙에 두고, 상하좌우(동서

부족함이 없다. 또한 명동학교

주문으로 둘렀으며, 이를 월계관

남북)에 이(離, 상) · 감(坎, 하) · 태

가 항일 민족 학교였고, 마을 전

118    

  2023년  4월

다각형 5엽 꽃문양 형

체가 독립운동기지였으며, 이상

양에 따라 그린 탓에 모양이

향 건설을 목적으로 명동촌이 기

일정하지 않다.

획되었기에 무궁화로 단정해도

다른 하나는 막새기와의 외

무리가 없다. 사실 5개의 꽃잎이

형에 따라 선을 그려 반원과

있는 꽃을 도상화하면 구분이 쉽

다각형 직선이 혼합된 형태이

지 않다.

다. 그 안에 5엽 꽃문양을 새

제3유형은 ‘다각형 5엽 꽃문

겼는데, 이중으로 그린 꽃잎

양 형’으로 하나는 5각형 안에 5

에 양각으로 점을 찍어 꽃술

엽 꽃문양을 넣은 것으로 중앙에

혹은 잎줄기를 표현하였다.

화심을 작은 원으로 도드라지게

화심(花心)에도 양각 점을 찍어

제작연도가 명확해졌다. 1911년

새기고, 각 꽃잎의 중앙에는 잎

꽃술을 표현하였다. 바깥쪽에는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수립

줄기 혹은 꽃술을 도상화하였다.

월계관이 받치고 있다.

되었기에 1912~13년 사이에 기

중화민국 2년, 중화민국 3년 명 암키와

꽃잎은 이중 양각 선으로 그렸는

이 막새기와가 발견된 중영촌

와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데, 패랭이꽃이나 무궁화로도 보

에서 ‘중화민국 2년(中華民國二

‘중화민국 3년’ 명 기와에는 ‘中’

인다. 꽃잎과 꽃잎 사이에 다시

年)’, ‘중화민국 3년(中華民國三

자 위쪽에 한글로 ‘한’이라는 글

점을 찍어 균형을 잡은 느낌이

年)’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암키

자까지 새긴 것으로 보아 명동

강하다. 5각형은 막새기와의 모

와가 함께 발견되어 막새기와의

학교가 항일 민족교육을 하였고,

중앙 삼태극 좌우 대칭 꽃문양 형

자랑스런 우리 것들 • 북간도 명동촌 막새기와 

  119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자랑스런 우리 것들

술 혹은 잎줄기를 강하게 표기하 고, 꽃문양 바깥쪽으로 이중선을 둘러 그림자 효과를 두어 입체감 을 강조하였다. 이 형태는 외형 상 이화문과 많이 닮았다. 이 막 명동촌 막새기와(태극기 · 무궁화 · 십자가 혼합형) 명동학교 꽃문양 막새기와 모음

새기와를 이은 학교 건물 사진이

명동촌 전체가 독립운동기지로

대칭으로 새기고 나머지 여백에

때인 1943년에 찍은 것이다.

서 항일 민족운동의 의지가 얼마

꽃가지를 그린 ‘중앙 5엽 꽃문양

나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좌우 대칭 삼태극형’이다. 가운

몸소 체험하고 경험하는 과정에

제4유형은 중앙에 오른쪽으

데 5엽 꽃문양은 요철을 두어 입

서 민족의식 고양돼

로 회오리치는 삼태극을 배치하

체감을 강조하였다. 꽃잎에 꽃술

1943년은 명동학교 역시 ‘위

고 이를 연주문으로 감싼 후 그

혹은 잎줄기 표시를 강하게 새겨

(僞) 만주국(일제의 괴뢰국가 만

바깥쪽 좌우에 5엽 꽃문양을 새

이화문(李花文)처럼 보인다. 큰

주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

긴 ‘중앙 삼태극 좌우 대칭 꽃문

화심과 꽃잎 모양을 보면 무궁화

어 항일 민족교육이 아닌 일본식

양 형’이다. 연주문 바깥 위쪽에

에 가깝다. 바깥쪽 여백에 꽃가

교육을 했다고 박송학은 자서전

는 좌우로 원을 그린 흔적이 있

지를 새겨 가운데 꽃문양을 에워

에 적고 있다. “우리가 입학해서

고, 그 중간과 주변으로 선 문양

싸면서 받치듯 그려 꽃받침 혹은

부터는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였

과 점을 찍었으나 선명하지 않

월계관을 표현하였다.

다. (중략). 3학년 때는 일본 황군

다. 좌우의 꽃문양은 대칭의 미

있는데, 박송학이 소학교 2학년

제6유형은 ‘5엽 꽃문양 형’으

(皇軍)이 고무가 많이 생산되는

로 가운데에 5엽의 꽃문양을 입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였다 하며

제5유형은 가운데에 5엽의 큰

체적으로 시문하고, 화심을 크게

우리들께 고무뽈도 주었다. 그리

꽃문양 넣고, 좌우에 삼태극을

표현한 형태이다. 각 꽃잎에 꽃

고 교실문으로 들어가는 문 밑에

를 살린 것이다.

중앙 5엽 꽃문양 좌우 대칭 삼태극형

120    

  2023년  4월

5엽 꽃문양 형

와 무궁화, 그리고 십자가로 이 은 지붕 아래서 밥을 먹고, 공부 하고, 잠을 자고, 놀면서 생활 그 자체를 항일 민족의식으로 키워 나갔다. 독립은 그러한 정신에서 우리에게 왔었다. (좀 더 자세한 정보는 필자의

1943년 명동학교 소학생 사진과 명동학교 건물 막새기와(제6유형)

「북간도 명동학교 막새기와의 꽃 발판에도 미국, 영국 국기를 그

들이 조직한 충렬대(忠烈隊)가

문양에 나타난 민족의식」, 『한국

려놓아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일

앞장섰다. 충렬대가 조직되고,

독립운동사연구』 48, 101~147쪽

본이 이긴다고 소리쳤다. (하략)”

대규모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조, 사용된 사진은 (사)규암독립

라는 회고에서 당시 학교의 분위

나설 수 있었던 배경이 북간도

사상연구소에서 제공)

기를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기존

의 항일 민족의식 교육에 있었

사진의 명동학교 건물과는 형태

다. 항일 민족의식이 교육으로

상 차이가 있다. 이 건물은 1920

만 가능했을까? 아니다 몸소 체

년 경신참변으로 전소된 건물을

험하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몸에

1923년에 목조와 벽돌집으로 중

배었다.

필자  김시덕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 업했다(문학박사). 국립 민속박물관, 대한민국역 사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건한 건물 중 하나이다. 일제의

명동촌을 비롯한 북간도 한인

탄압을 피하고자 사실적인 무궁

들은 막새기와의 항일 민족의식

재는 을지대학교 장례지

화보다는 이화문을 닮은 문양을

을 상징하는 문양에서 보듯 일상

립사상연구소 부소장, 서울특별시 동산분과 문화

사용함으로써 민족교육의 색채

생활이 곧 항일 민족운동이었고,

재위원이다. 논저로 『코로나 시대, 다시 집을 생

를 감추었을 것이다.

교육이었다. 자나 깨나 항일로

오동전투』(2020) ; 『한국의 상례문화』(민속원,

과장 등을 지냈으며, 현 도학과 교수, (사)규암독

각하다』(2021,공저) ; 『대한독립! 그날을 위한 봉

3 · 13 용정 만세 운동에는 명

독립을 하고자 하였다. 한인들은

2012) ; 「북간도 명동학교 막새기와의 꽃문양에

동학교와 정동학교 학생과 선생

대한인(大韓人)의 상징인 태극기

등 다수가 있다.

나타난 민족의식」, 『독립운동사연구』 48(2014)

자랑스런 우리 것들 • 북간도 명동촌 막새기와 

  121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우리문화 사랑방

우리 전통차, 녹차가 아니라 그냥 “차(茶)”다 우리 전통차

차에 관한 상식

차에 관한 올바른 상식 글  김영조(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살아있는 차의 성인이라 불리는 순천 금

4월 20일은 24절기 봄비가 내

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녹

둔사 지허스님은 말했다. “녹차는 일본에

려 백 가지 곡식을 기름지게 한

차는 우리 고유의 전통차가 아니

서 역수입된 차입니다. 분명 전통차는 따

다는 ‘곡우(穀雨)’다. 그런데 곡

라는 것이다. 고려시대나 조선시

우 무렵부터는 찻잎을 따서 덖

대 여러 차 관련 문헌을 봐도 “차

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즈음 언

(茶)”라고만 나오지 “녹차(綠茶)”

론들은 이를 취재하느라 여념이

는 없다. 그 까닭은 우리 전통차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언론이 죄

가 녹차와는 다를뿐더러 예전부

다 “녹차”라며 보성 차밭만 취재

터 그냥 차라고만 했기 때문이다.

로 있습니다. 물론 녹차를 없애자는 것도, 나쁘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녹차를 전 통차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 니다.” 차 한 잔을 음미하면서 건강과 함께 잃어 버렸던 자아를 찾을 수도 있으리라. 물을 식히면서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은은한 다갈색 빛깔이 나에게 와서 하나 되면 드디어 우리는 세상과 하나 됨을 느 낄 수 있으리라. 행복이란 것이 분명히 마 음 안에 있을진대 한 잔의 찻잔에 담긴 맛 과 향을 차분하고 조용한 기분으로 느끼 면 좋지 않을까?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는 차로 맺어진 벗이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122    

  2023년  4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 는 천 년 역사의 ‘차(茶)’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은 물론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가 무척 이나 즐겼던 전통차는 삼국시대 에 인도나 중국에서 들어와 정착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처음 차 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언제 일까? 지금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기 록이다. “처음 차가 들어온 것은



신라 27대 선덕왕(632~647)이며, 처음 차 씨앗이 뿌려진 것은 신 라 42대 흥덕왕 3년(828)에 대렴 이 임금의 명으로 당나라에서 가 져온 씨앗을 지리산 부근에 심었

➊  청자 꽃 모양 잔과



찻주전자(12세기, 국립 중앙박물관) ➋   차에 관한 기록이 있는 국보 《삼국유사》 권4~5(문화재청 제공)

다.” 이것이 그동안 정설처럼 알 려진 차 전래의 시작이다. 하지만, 최근엔 그 이전에 들어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겼다. 우선 일부 내용이 일연의 《삼국유 사》에 전한다는 《가락국기(駕洛國

왔다는 기록이 있게 한 중국 당나

서는 가야의 수로왕비 허씨가 인

記)》에 “인도 아유타국 공주인 허

라 육우(陸羽, 《다경-茶經》을 씀)

도에서 가져온 차씨를 심어서 된

황옥(許黃玉, 33~89)이 금관가야

가 태어난 해보다 무려 72년이 앞

것”이라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

의 왕비로 시집오면서 차씨와 차

선 것이다.

다. 이 밖에도 신라 승려 충담(忠

를 가져왔다.”라는 기록이 그것이

또 일제강점기 역사학자이

談), 지장(地藏), 원효(元曉) 등의

다. 또 같은 책에는 가락국 시조

며 민속학자인 이능화(李能和,

기록에도 차를 가져왔다는 얘기

수로왕 제사에 차(茶)를 제수품목

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朝

가 등장하는 등 김대렴이 가져왔

에 넣은 것으로 나온다. 이해는 서

鮮佛敎通史)》에서도 “김해 백월산

다는 설보다 빠른 문헌은 많다. 어

기 661년으로 흥덕왕 3년에 들어

에는 ‘죽로차’가 있었는데 세상에

떤 기록을 근거로 하더라도 우리

우리문화 사랑방 • 전통차 

  123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우리문화 사랑방

순천 선암사 뒤편에 펼쳐진 야생차밭

전남 보성의 녹차밭(최우성 기자)

나라에 차가 들어온 것은 1,300년

은 찐차(증제차)이고 차를 우리면

녹차를 전통차라고 말하는 것은

이 넘는 역사다.

연두빛을 띤다. 그래서 녹차(綠茶)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라 부른다. 특히 일제강점기 우리

지허스님은 여기에 덧붙인다.

전통차와 녹차, 품종과 가공 방식

나라에 역으로 들어온 녹차는 주

“녹차는 일본에서 개량한 야부기

그리고 우려낸 빛깔이 달라

로 보성지방에 심으면서 대량생

다종으로 뿌리가 얕고, 잎이 무성

전통차와 녹차는 우선 품종이

산 체제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전

합니다. 그래서 대량생산 하는데

다르고 가공 방법이 다르며, 우려

통차가 야생이어서 우선 양이 적

아주 좋을 것입니다. 어쩌면 값싼

내면 빛깔이 다르다. 먼저 야생으

은 탓에 값이 조금 비싼 것이 흠이

차를 마시는 데 장점이 될 수도 있

로 맥이 이어온 전통차의 가공방

라면 녹차는 대량생산이 가능해

지요. 하지만 뿌리가 얕으니 비료

법은 솥에 열을 가하면서 비비듯

비교적 싼 값에 즐길 수 있어 장점

를 줄 수밖에 없어서 좀 그렇습니

하는 덖음방식이다. 그렇게 해서

이 되기는 한다.

다. 그러나 우리 토종 야생차는 뿌

만든 차를 우려내면 빛깔은 다갈

리가 곧고 땅 위의 키보다 3~4배

색을 띤다. 또 한국의 다성(茶聖)

녹차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가 깁니다. 그래서 암반층, 석회질

초의(艸衣)선사가 '우리의 차(茶)

전통차라고 하지 말아야

층에 있는 담백한 수분, 무기질을

는 곡우 전후보다는 입하(立夏) 전

살아있는 차의 성인이라 불리

흡수하여 겨울에 더 푸르고, 꽃이

후가 가장 좋다'라고 말한 것처럼

는 순천 금둔사 지허스님은 말했

핍니다. 그래서 녹차에 견줘 우리

여름차를 으뜸으로 친다.

다. “녹차는 일본에서 역수입된

의 전통차가 깊은 맛이 있는 것입

그러나 녹차는 우리 차나무가

차입니다. 분명 전통차는 따로 있

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오랫동안 토착

습니다. 물론 녹차를 없애자는 것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화 과정을 거친 것이다. 가공방법

도, 나쁘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왜곡된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 가

124    

  2023년  4월

한국 · 중국 · 일본의 후발효차들(농촌진흥청 제공) 살아있는 차의 성인 금둔사 지허스님

운데서 녹차를 마치 우리의 전통 차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그 하나

* 찐차 : 찐차는 한자말로 증제차 (蒸製茶)라고 하는데 쪄서 가공

다. 녹차라고 해서 거부할 까닭은

하는 차를 말하며, 대표적인 것

없다. 다만 녹차는 녹차고 전통차

이 녹차다. 하지만, 국내에서 가

* 후발효차 : 떡처럼 만들어 20년 이상 발효시킨 보이차. 보이차

는 전통차임을 분명히 하자는 것

공되는 녹차는 찌기와 덖기를

는 원래 20년 발효된 것을 명차

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보성지방

섞는다.

로 치는데 유통되는 것 가운데

을 중심으로 퍼진 녹차를 전통차 처럼 생각한다면 홍차를 들여와 많이 생산하고 소비한다고 해서 우리 전통차라고 우기는 것과 무 엇이 다를 것인가? 차의 종류

1) 가공방법에 따른 나눔 * 덖음차 : 우리의 전통차가 바로 덖음차인데 솥에 불을 때면서

는 날짜를 고치거나 발효 방법 2) 마시는 방법에 따른 나눔 * 잎차 : 잎을 우려낸 물을 마시는 것 * 가루차[(抹茶] : 가루로 만들어

일본에서는 부초차(釜炒茶)로 부른다.

을 변형한 것들도 있어 잘 골라 야만 한다.

따뜻한 물을 부어 거품 만들어

4) 찻잎을 따는 때에 따라 나눔

마신다. 물 대신 요구르트 등을

전통차와 녹차는 찻잎을 따는

붓기도 한다. 가루차는 잎을 통

때가 다르다.

째로 마신다는 점에서 장점이

전통차는 24절기 가운데 청명

지만 만일 농약을 친 찻잎이면

전에 따는 명전차(明前茶)가 있고,

마셔서는 곤란하다.

봄차(춘차:春茶), 여름차(하차:夏

비비듯이 가공한다. 이 덖음차 를 중국에서는 초청차(炒靑茶),

* 반발효차 : 포종차, 우롱차 * 발효차 : 홍차

茶), 가을차(추차:秋茶)들이 있다. 3) 발효 정도에 따른 나눔 * 불발효차(비발효차) : 전통차와 녹차는 발효시키지 않는다.

녹차는 곡우 전에 따는 우전차(雨 前茶)가 최상품이며, 5월 초순에 따는 세작(細雀)을 주로 마시고,

우리문화 사랑방 • 전통차 

  125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우리문화 사랑방

그 이후에 따는 중작과 대작은 물

다도는 원래 일본의 풍속이며 우

대신 마시는 엽차로 쓰며, 첫물차

리 것이 아니다.

두물차로도 나눈다.

“우리 겨레는 숙우에 찻잎이 천 천히 퍼지면서 향기와 맛을 남기

우리는 예전에 세상을 뜬 조상

는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아 밝음

이나 부처님께 바치는 헌다례(獻茶

과 어두움을 보고 자신의 분에 맞

5) 생산지에 따른 나눔

禮)는 있었지만, 평상시의 차생활

는 푸근한 삶의 지름길을 터득하

한국의 보성, 화개, 해남차가 있

은 엄격한 모습이 아니고 그저 즐

였다.”라고 한 보윤스님의 말씀을

으며, 중국의 육안, 용정, 무이차

기는 것이었다. 차로 벗을 삼았던

찻잔을 기울이기 전에 꼭 한번 생

가 있고, 일본의 우지차, 사야마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이 차를

각해보면 좋을 일이다. 또 “예부

차, 시즈오카차가 유명하다.

마실 때 무릎을 꿇고 마셨다고 들

터 성현이 다 차를 사랑하는데 차

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엄격한 차

는 군자와 같아서 성품이 사특하

마시기가 전통차의 보급을 막고

지 않다(古來賢聖俱愛茶 茶如君子

* 작설차(雀舌茶) : 여린 찻잎이 참 새의 혀와 닮았다는 뜻.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性無邪)”라는 말도 전한다.

* 감로차(甘露茶) : 아침이슬이 가 시기 전에 찻잎을 따서 만든 차.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차 마시기

6) 별명으로 부르는 차 종류

차 한 잔을 음미하면서 건강과 함께 잃어버렸던 자아를 찾을 수 도 있으리라. 물을 식히면서 자신

* 죽로차(竹露茶) : 대나무숲에서 이 슬을 먹고 자란 잎으로 만든 차.

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은은한

* 춘설차(春雪茶) : 봄눈이 채 녹기 전에 돋아난 여린 잎으로 만든 차.

되면 드디어 우리는 세상과 하나

* 응조차(鷹爪茶) : 매의 발톱과 닮 았다는 뜻.

것이 분명히 마음 안에 있을진대

* 맥과차(麥顆茶) : 보리의 알을 닮 았다는 차.

분하고 조용한 기분으로 느끼면

다도(茶道)’, 진정한 차 마시기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차생활에서 한 가지 더 짚어볼 것이 있다. 마치 엄격한 다도(茶 道)를 알아야 차를 마실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126    

  2023년  4월

다갈색 빛깔이 나에게 와서 하나 됨을 느낄 수 있으리라. 행복이란 한 잔의 찻잔에 담긴 맛과 향을 차 차 마시기 (그림 뉴스툰 제공)

좋지 않을까?

필자  김영조 2000년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2011년 한국문화사랑협회를 설립하여 한국문화 를 널리 알리고 있다. 또한. 2015년 한국문화를 특화한 국내 유일의 한국문화 전문 지 인터넷신문 《우리문화신문》을 창간하여 발행인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자은 책 으로는 《맛깔스런 우리문화속풀이 31가지》, 《하루하루가 잔치로세(2011년 문화 관광부 우수도서)》,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종가》, 《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 등이 있다.

궁핍과 시련 속의 임시정부 끝까지 지켜



깨어나라, 현재는 언제나 힘들고 험난하다 글  이오장(시인 · 한국문인협회 이사)

깨어나라, 깨어나라 꿈만 꾼다면 허무의 신봉자 게으름 피운다면 무능력자 현재는 언제나 힘들고 험난하다 나라를 뺏긴 것은 무능력이지만 되찾지 못하는 것은 천고의 죄인 다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배우고 익히는 것이야말로 애국의 첫걸음 독립의 시작이다

이시영 (1869.12.3~1953.4.17) 독립운동가 · 정치가. 1907년 안창호·이동녕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 다. 1910년 8월 6형제의 재산을 처분하여 남만주 유하현(柳河縣)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 · 망명했다. 경학사 (耕學社)와 신흥강습소 설립을 주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법무총장,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고 한 국독립당 감찰위원장을 지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51년 2월 이승만 대통령에 반대하여 사직했다. 1952년 8월 제2대 대통령선거에 야당인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순국선열 • 지하에서 울리는 소리 (13) · 이시영 

  127

순국 Network    함께해요, 나라사랑 순국선열 Photo News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 85주기 추모식 열려 2023년 3월 10일, 도산안창호기념관

순국선열

국가보훈처 서울지방보훈

Photo News

청은 ‘도산 안창호 선생 서 거 85주기 추모식'이 10일 도산안창호기념관에서 열 렸다고 밝혔다. 나치만 서 울지방보훈청장, 김재실 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장

대한민국의 얼, 독립정신

을 비롯해 기념사업회 회 원,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

광복의 빛을 되찾게 한 숭고한 희생을 기

표 및 회원, 학생 등 100여

억합니다.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명이 참석했다.

개인의 안위와 행복보다 소중하게 여긴 선각자들. 어두운 현실에 희망의 불씨를 피운 순국선열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오

안창호 선생은 1897년 '독 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자주독립과 국민의 자각 필요성을 역설했다. 1902

늘이 있습니다. 이제 순국선열의 희생정

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 회장에 선출됐으며, 1905년 '공립협회' 초

신을 되살려 겨레의 미래를 다시금 밝힙

대 회장으로 취임하고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1907년 귀국 후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를 결

니다. 어두웠던 시절, 아름다운 눈물로 광 복의 빛을 환하게 밝혀준 순국선열, 그 정 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성하고 구국운동을 펼쳤다. 191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를 조직해 초 대 회장에 취임했으며 1913년 '흥사단'을 만들어 민족계몽 운동과 국권 회복 활동을 전개했 다.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돼 1938년 3월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 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나치만 서울지방보훈청장이 대독한 추모사에서 "지난 1월 매입한 미국 흥사단 단소를 모든 국민이 즐겨 찾는 교육의 장으로 조성해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미래 세대에게 계승하겠다”고 밝혔다.

천안시 석오 이동녕 선생 서거 제83주기 추모제 거행

2023년 3월 13일, 석오이동녕기념관 충남 천안시가 3월 13일 천안출신 독립운동가 석오 이동녕 선생 서거 제 83주기 추모제를 거행했다. 석오이동녕기념관에서 열린 추모제는 박상돈 천안시장, 서문동 ‘석오이동녕선생 서훈상향범시민추진위원회’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곡, 추념사, 추모사, 헌화와 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천안시는 지역 대표 독립운동가인 석오 이동녕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있다. 이동녕 선생은 천안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임 시정부 주석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로, 중국 충칭시 치장에서 1940년 서 거했다. 이동녕 선생의 공적은 지난 1962년 정부가 공훈을 기려 건국훈 장 대통령장(2급)을 추서했으나 공적에 비해 훈격이 낮다는 지적이 꾸준 히 제기돼 왔다. 이에 천안시와 석오이동녕선생선양회는 지난해 12월 석 오 이동녕 선생 서훈 상향 범시민 추진위원회를 출범하고 이동녕 선생의

서훈을 ‘건국훈장 대통령장(2급)’에서 ‘대한민국장(1급)’으로 상향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추진중인 선생의 서훈 향상은 최근 국가보훈처가 3월에 구성한 ‘국민공감위원회’에서 공적자료 조사와 심사, 국민공감도 등을 심의해 올해 안에 결정하게 된다.

128    

  2023년  4월

장수군, 백용성 조사(민족대표 33인중 1인) 제83주기 열반 추모행사 열어 2023년 3월 15일, 장수군 용성교육관 독립운동가 백용성 조사 제83주기 열반추모행사가 3월 15일 (음력 2월 24일) 생가지인 장수군 번암면 죽림정사 용성교육관 에서 (사)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이사장 법륜스님) 주관으로 엄 숙히 거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박용근도 의윈, 기념사업회 이 사, 정토회 회원 등 200여 명이 참석했으며, 백용성 조사님의 행장(걸어온 길) 낭독을 통해 조사의 행적, 유훈, 업적 등을 살 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기념사업회 이사장인 법륜스님은 추념사를 통해 백용성 조사의 유업을 자세히 설명하고 “나라사랑 정신과 불법정신을 잘 기억해 시대적 과제인 평화통일을 이룩하자”고 강조했다. 추모행사 후 행사장에서 법 륜스님의 즉문즉설이 진행됐으며, 오후에는 법인 이사회와 회원 정기총회를 통해 독립운동가 백용성기념관건립 등 현안문제를 심의 의결하는 등의 행사를 가젔다. 백용성은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옥고를 치렀다. 1864년 전북 장 수에서 태어났는데, 1940년 2월 열반했다. 속명은 백상규(白相奎), 법명은 진종(震鍾), 대각교(大覺敎)를 창시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안중근의사 113주년 추모식에서 “동양평화 만세 만만세”유묵 최초 공개 2023년 3월 26일, 서울 효창공원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가 3월 26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안중근 의사의 빈 무 덤 앞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년 추 모식’을 열고 안 의사의 동양평화 정신이 담긴 유묵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 유묵은 가로와 세로 각각 135㎝와 35㎝ 크기 비단 천에 ‘東洋平和萬歲萬萬 歲 庚戌 二月十八日 旅順監獄在監中 大 韓國人 安重根書(동양평화만세만만세 경술 2월18일 여순감옥 재감중 대한국 인 안중근서)’ 라는 글귀가 먹으로 쓰여 있다. 안 의사의 손바닥 도장도 선명하게 찍혀 있다. 글귀는 ‘동양평화 만세만만세 1910년 2월 18일 여순감옥 수감 중에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라는 의미다. 기념 사업회에 따르면 이 유묵은 국내 소장자 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소장 자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도쿄 유학 중 이 유묵을 입수했다고 한다. 소장자가 최 근 기념사업회에 연락하면서 유묵의 존재가 알려졌다.

순국선열  Photo News 

  129

순국 Network    함께해요, 나라사랑 순국선열 Photo News

이상재 선생 96주기 추모제·신장리 3 · 1만세운동 재연 행사 열려 2023년 3월 29일, 충남 서천 이상재 생가 · 마산면 신장리 충남 서천에서 3 월 29일 독립운 동가인 월남 이 상재 선생 제96 주기 추모제와 제16회 마산 신 장 3 · 1 만세운 동 재연 및 기념 행사가 잇따라 열렸다. 이상재 선생 기 념사업회는 이날 한산면 종지리 이선생 생가에서 김기웅 군수와 유족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를 진행했다. 공금란 이사장은 “격변하는 개화기, 암담 한 일제 치하에 굴하지 않고 자주독립과 국민계몽을 위한 길을 걸어오신 이상재 선생의 존엄한 나라 사랑 정신을 본받아 그 뜻을 실천하겠다”고 말했다. 마산면 신장리에서는 ‘제16회 마산 신장 3 · 1 만세운동 재연 및 기념행사’도 열렸다. ‘코로나19’ 때문에 3년 만에 열린 이날 행사는 만세운동 재 연, 독립선언서 낭독, 가두 행진, 풍물패 공연 등으로 진행됐다. 마산 신장 3 · 1 만세운동에는 1919년 3월 29일 조남명, 고시상 등 14명의 열사 를 주축으로 2천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출생 148주년 기념식 개최 2023년 3월 26일, 서울 이화장 이승만 대통령 출생 148주년 기념식이 3월 26일 오후 서울 종로 구 이화장에서 이승만대통령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렸다. 황교안 기념사업회장, 최재형 국회의원, 박진 외교부 장관, 박민식 국가보 훈처장, 독립 유공자 유족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1875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이 대통령은 1896년 서울에서 협성 회를 조직하고 협성회보와 매일신문을 발행해 주필로 활동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고종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돼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됐다. 감옥에서 청일전기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1904년 11월 미국 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10년 귀국했다. 1912년 박용만·안창호와 협력해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1921년 5월 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 제 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 일본 침략을 폭로했다. 그러나 임시의정원에서 1925년 3월 탄핵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30    

  2023년  4월

김기봉 부회장, 조찬 포럼에서 박진 외교부 장관에 질의 2023년 3월 9일, 서울 프라자호텔 3월 9일 오전 7시 30분 서울시청 앞 ‘더프라자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서울대 학교 총동창회 조찬포럼”이 있었다. 이 행사에서는 초청연사인 박진 외교부장 관의 “국력 세계 6위 대한민국의 외교전략”이라는 제목의 연설이 1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연설 후 질의응답이 있었는데, 단 한사람의 질의가 있었다. 그 자 리에 참석한 김기봉 광복회 서울시지부장(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이 질문하 였다. 질의성 질타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관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 평화, 번영을 위해 진력하시는 장관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천만 관객이 관람한 영화 “암살과 밀정”의 배 경 독립단체인 의열단 창단 주역의 후손입니다. 이번 3 · 1절 대통령 경축사와 관련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대통령 경축사에서 언급한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대한 발표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크게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선 · 후가 뒤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유공자 후손 등의 양해를 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며, 장관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일본은 25년 전에 있었던 김대중 · 오부치 선언 을 계승한다고 약속했는데, 일본의 새로운 사죄나 반성이 없다면 김대중 · 오부치 선언을 계승한다는 발표가 먼저 나오도록 하고, 우리의 우호 적 선언이 뒤에 나와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일본은 김대중 오부치 · 선언을 계승한다는 말은 입속에서 우물거리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지 금이라도 일본 기시다 총리가 확실하게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한다는 명확한 발표가 있도록 장관님의 역할을 기대합니다. 3 · 1절 대통령의 경축사는 거두절미란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거두절미도 주어가 있어야 하는데 이번 경축사는 주어가 빠진 거두절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에 박진 장관은 잘 알겠다고 하고,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고 한다.

해군 제2함대, 제13주기 천안함 46용사 추모식 엄수 2023년 3월 26일, 해군 제2함대 사령부 해군 제2함대사령부는 제13주기 천안함 46용사 추모 식을 3월 26일 추모비 앞에서 거행했다. 안상민(소장) 2함대사령관 주관으로 진행된 이날 추모 식에는 천안함 46용사 유가족과 생존 장병, 이종호 해 군참모총장, 김계환 해병대사령관, 데이비드 레스퍼런 스(David A. Lesperance) 미2사단장, 마크 셰이퍼 (Mark Schafer) 주한미해군사령관을 비롯한 한·미 군 (軍) 주요인사와 유관기관 관계관, 예비역 전우회, 천안 함재단 등 민·관·군 관계자 200여 명이 참석했다. 특히 지난 2021년 진수한 신형호위함인 천안함(FFG826) 승조원들이 참석해 선배 전우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추모하고 서해수호 의지를 결의했다. ‘헌신영예 기장 전도 수여’는 올해 명칭을 새롭게 개정한 ‘헌신영예 기장’을 천안함 생존 장병들에게 수여하는 것인데, 이종 호 해군참모총장이 천안함 생존장병을 대표해 이채권 소령과 허순행 원사에게 전도 수여했다. 안상민 2함대사령관은 “2함대 장병과 군무원 모두는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46용사의 조국을 위한 명예로운 헌신을 13년의 세월동안 단 한 순간도 잊은적 없다”면서 “영원한 전우이자 ‘서해 수호신’ 천안함 46용사의 애국정신과 호국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싸우면 박살내서 서해를 완벽히 사수하겠다”고 말했다.

순국선열  Photo News 

  131

순국 Network    함께해요, 나라사랑 문화로 만나는 세상

제1부에서는 한국광복군 과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군사합작 및 독수 리작전(Eagle Project)을 소개 하며, OSS훈련 미국 측 책임자 였던 클라이드 싸전트(Clyde B. Sargent) 대위의 아들이 2021년 12월 독립기념관에 제공하여 국 내에 최초로 공개된 독수리작전 희귀 사진자료 등이 전시된다. 제2부는 미국 OSS본부가 전개 한 냅코작전(NAPKO Project)을 비롯, 미국의 대일항전에 활약한 한인들을 소개한다. 주미외교위

■ 4월에 주목되는 전시

원장 등으로 활약하며 대미외교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오산·평택 미군기지 내 “미국과 함께 한 독립운동” 기획전시 개최

를 전개한 이승만 박사가 굿펠로 우(Millard P. Goodfellow)에게 보낸 편지, 냅코작전에 참여한

독립기념관,

19명의 한국인 비밀요원, 독립운

주한 미군기지 내 기획전시 최초 개최 글 l 편집부 사진 l 독립기념관

동가 안창호 선생의 장녀이자 미 해군에 입대한 첫 아시아계 여성 장교 안수산(Susan Ahn Cuddy) 선생 관계 자료 등이 전시된다.

독립기념관은 한미동맹 70주

최한다. 독립기념관이 주한 미군

이번 전시는 3월 20일부터 24

년을 기념하여 3월부터 5월까지

부대 내에서 기획전시를 개최하

일까지 오산미공군기지 USO에

주한미군을 대상으로 오산·평택

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 개최되고, 4월 10일부터 5

미군기지 내에서 기획전시 “미

전시는 1941년 미일전쟁 발발

월 10일까지는 평택 캠프험프

국과 함께 한 독립운동(Korean’

부터 1945년 광복 전후까지 전

리스(Camp Humphreys) 내

s Independence Movement

개된 1940년대 한미군사합작을

미2사단·미8군 한국작전전구

with the United States)”을 개

주제로, 총 2부로 구성된다.

박물관(2ID, 8th Army KTO

132    

  2023년  4월

MUSEUM)에서도 진 행된다. 독립기념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제2차 세 계대전 당시 한미 양국 이 연합하여 대일공동 항전을 추진했다는 사 실을 소개함으로써, 많 은 한국인들이 미국과 함께 일제에 항전했다

전시명 : 미국과 함께 한 독립운동(Korean’s

는 사실을 알리고자 이

Independence Movement with the United States)

전시를 기획했다고 한

전시자료 : 이승만 박사가 OSS 훈련 책임자 굿펠로우

다. 한미동맹 70주년을

에게 보낸 편지, 승전기원 뱃지 등 19점

맞이하여 개최되는 이번 전시가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공

1차 : ’23.3.20.(월)~3.24.(금) / 오산미공군기지 내

동으로 맞섰던 양국의 역사적 경험을 이해하고, 한미 양

USO(Airman&Family Readiness Center)

국의 우호와 협력을 공고히 하는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

2차 : ’23.4.10.(월)~5.10.(수) / 평택 미2사단·미8군 한

된다.

국작전전구 박물관(2ID, 8th Army KTO MUSEUM)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 공식 개관 기념

“부산의 책” 전시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이 3월 1일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부산근현대역사관은 3월 2일(목) 오후 개관식을 진행하고, 별 관 개관 기념 특별강연을 3월 4일(토) 오후 개최하였다. 주제는 ‘1950년대 부산의 책 이야기’로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 1층 로비에서 선착순 신청자 30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부산근현대역사관은 별관 개관기념 북큐레이션 전시 “부산의 책”을 2023년 2 월 17일(목)부터 6월 15일(목)까지 개최한다. 입장료는 없다.

문화로 만나는 세상 

  133

순국 Network    함께해요, 나라사랑 문화로 만나는 세상

BOOKㆍ화제의 책

작지만 큰 한국사, 인삼 이철성 지음, 푸른역사 펴냄 ‘인삼’으로 꿰어낸 시시콜콜 한국사. ‘백제 인삼’은 6세기 중국에서 최고의 약재였고, 12세기 고려를 방문한 송 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인삼’을 소개했다. 홍삼은 18세기부터 조선의 공식 무역상품이 되었고, 산삼은 광해군~ 경종 시기 한ㆍ중ㆍ일을 잇는 인삼로드를 통해 동아시아의 번영을 가져왔던 주인공이었다. 또한 대원군의 부 국강병책, 고종의 광무개혁에서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까지 개혁과 변화를 위한 든든한 재원이 되 기도 했다. 그러니 인삼은 단순한 약초가 아니라 우리 역사에 깊이 뿌리내린 문화의 담지자라 할 수 있다. 정조 가 건설한 수원 화성의 번영을 위해 서울에서 이주하는 부자들에게 가삼 무역의 독점권을 주려 한 사실은 한국 사에서 인삼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 주는 좋은 예다.

알면 좋은 대구 독립운동사 정인열 지음, 피서산장 펴냄 달구벌 대구는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팔공산 의병에다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대구를 무대로 국채보상운동 과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 비밀결사로 뭉쳐 독립운동에 나섰고, 다양한 생각과 항일 저항정신을 전국 에 전파했다. 특히 대구의 학생, 청년 젊은이들은 사상과 이념의 용광로가 되어 독립운동의 한 축으로 순국 희 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구와 대구사람은 광복 이후 극심한 이념과 사상의 갈등이라는 혼란스런 정국에서도 좌우를 아우르는 활동을 벌였고, 한국전쟁 때는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또한 대구는 독 재 정치에 대해서도 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민주화를 외치는 선구가 되었다.『대구독립운동사』는 이런 대구 역사를 파악하는 데 일조한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김성경 지음, 창비 펴냄 “떠나온 여자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전쟁과 분단의 격랑 속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살 아남았는가. 남북이 분단된 지 어느덧 78년이 되었다. 분단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생을 다할 때가 되었으며, 한국 현대사에 깊게 드리워져 있던 북에 대한 적대감보다 북에 대한 거리감이 훨씬 더 압도적인 감 정이 된 지도 오래되었다. ‘마음’이라는 키워드로 분단의 문제를 탐구해온 지은이는 북에 대한 무관심은 남한사 회의 역사적 중층성에 대한 무지로 이어진다며 그들이 사실은 우리의 거울상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세계사를 바꾼 화학 이야기 오미야 오사무 지음(김정환 번역), 사람과나무사이 펴냄 현대 문명의 초석이 된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인의 유리 생산과 활용, 4,500년 전 쿠푸 왕의 피라미드, 2,300년 전 페르시아제국을 정벌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염색 위장술’에 이르기까지 ‘화학 지식’이 세계사 를 바꿨다! 이 책은 138억 년 전 빅뱅으로 인한 우주 탄생과 46억 년 전 지구 탄생에서부터 생명 탄생과 진화, 불ㆍ적색 안료ㆍ재봉 바늘 · 점토 · 유리 · 금 · 구리 · 식물섬유 · 종이 · 비단 · 화약 · 화포 · 청동기 · 철기 · 전기 등의 발명 과 발견, 농경 시작, 빵 · 맥주 · 와인 제조 등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 동안 ‘화학’이 원동력이 되고 추동력이 되 어 형성된 인류사와 세계사, 한발 더 나아가 지구사와 우주사를 다룬다.

134    

  2023년  4월

화제의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제1차 세계대전 다룬 반전영화, 전쟁의 참상과 모순 폭로 장르 전쟁, 액션, 드라마 147분 | 2022년 10월 28일 개봉 | 청소년 관람불가 | 감독 에드바르트 베르거 | 출연 펠릭스 캄머러, 다니엘 브륄, 아론 힐머 외 이 영화는 독일의 반전작가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1898 ~ 1970)의 소설 ‘서 부 전선 이상 없다’를 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 영화 속 “권력을 주면 괴물이 된다”, “전쟁을 끝 내지 않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라는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이면서도 반 전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인간 역사의 참혹한 대비극 이었다. 300만 병사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민 간인을 포함해 1,7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참혹한 역사는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이 영화는 심금을 울

영문 포스터와 ‘서부 전선 이상 없다’(넷플릭스 제공)

리는 대신, 전쟁의 의미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 음을 던진다.

3월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촬영상 수상 올해 3월 제95회 미국 오스카 국제장편영화상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독일이 받았다. 제임스 프렌드 촬영 감독이 촬영상도 받았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받았던 상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 주목을 받지 못해 좋은 흥행성적을 거 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영어로 제작되지 않은 국제 영화임에도 4개 부문을 수상 한 이 작품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올해 2월 영국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에 드바르트 베르거), 각색상, 외국어영화상 등 7개 부문을 휩쓸기도 했다.

문화로 만나는 세상 

  135

회원 신청 및 후원금 모집 안내

겨레의 빛 밝힌 순국선열 숭고한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순국선열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그분들의 아름다운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심축이 되어야 한다는 기치 아래, 순국선열 유족들이 모여 이룩한 단체가 바로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입니다. 본회는 공적(公的) 재정 지원없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 하신 15만 순국선열 위패를 모시는 현충사(위패봉안실)를 상시 개방하여 국민들이 기리고 참배할 수 있도록 자체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악한 재정사정으로 애로가 많아 국민 여러분들이 순국선열기념사업회 회원이 되어 순국선열을 기리고 추모함과 동시에 많은 후원을 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3월 후원자 이름 김주원 강해순 이근춘 문영송 최진홍 김기봉 김영조 나형택 박경주 이용위 이옥비 권순제 이영묵 광복회 서울지부 광복회 안동지부 홍양호 박인수 (라무출판사) 김일례 광복회 충북지부 이정재

2023년 3월 후원현황



매월 고정 후원자 금액

누계

1,500,000 1,200,000 1,000,000 500,000 500,000 100,000 100,000 100,000 100,000 100,000 50,000 50,000 50,000 300,000 210,000 100,000

1,500,000 1,200,000 1,000,000 500,000 500,000 100,000 100,000 100,000 100,000 100,000 50,000 60,000 50,000 300,000 210,000 100,000

200,000

200,000

-

280,000 300,000 300,000

이름 이동일

금액 100,000

누계

이름

금액

누계

3,500,000

이옥비

20,000

320,000

김시명

50,000

750,000

나형택

10,000

340,000

성택암

140,000

1,590,000

나경희

10,000

340,000

이용기

50,000

140,000

김영조

20,000

820,000

권기문

10,000

170,000

김효식

20,000

920,000

이항증

10,000

40,000

권정륜

20,000

820,000

채수덕

10,000

340,000

김주원

20,000

680,000

하연자

10,000

340,000

황명하

10,000

62,000

이동철

10,000

310,000

이근춘

50,000

550,000

유숙자

20,000

660,000

강해순

20,000

280,000

이정훈

10,000

전영복

10,000

이춘신 이병교

이휘

10,000

320,000

서보현

10,000

380,000

구영욱

10,000

200,000

한지연

10,000

170,000

김두식

10,000

160,000

430,000

장병화

10,000

70,000

410,000

배인한

5,000

175,000

10,000

390,000

남기형

10,000

510,000

10,000

350,000

신동희

10,000

340,000

순국선열기념사업회 회원가입 및 후원 신청서 ■

회원가입 및 후원신청서(신청고객기재) 신청인(성명)

생년월일

연락처

이메일

주소 후원금액

□ 1만원

출금은행/계좌

□ 3만원

□ 5만원

□ 기타(

□ 20일

□ 27일

원)

은행 / 계좌 :

출금일 ■

□ 2만원

□ 5일

□ 14일

개인정보 수집 및이용 동의 [개인정보 수집 및이용 동의] - 수집 및 이용목적 : CMS 출금이체를 통한 요금수납 - 수집항목 : 성명, 전화번호 휴대폰번호 금용기관명, 계좌번호 - 보유 및 이용기간 : 수집, 이용 동의일로부터 CMS 출금이체 종료일(해지일) 5년까지 - 신청자는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을 거부할 권리가 있으며, 권리행사시 출금이체 신청이 거부될 수 있습니다.

동의함 □

동의안함 □

[개인정보 제3자 제공 동의] - 개인정보를 제공받는 자 : 사단법인 금융결제원 - 개인정보를 제공받는 자의 개인정보 이용 목적 : CMS 출금이체 서비 스 제공 및 출금동의 확인, 출금이체 신규등록 및해지 사실 통지 - 제공하는 개인정보의 항목 : 성명, 금융기관명, 계좌번호 생년월일, 전 화번호(은행 등 금융회사 및 이용기관 보유) 휴대폰번호 - 개인정보를 제공받는 자의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 CMS 출금이체 서비스 제공 및 출금동의 확인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 신청자는 개인정보에 대해 금융결제원에 제공하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으며, 거부시 출금이체 신청이 거부될 수 있습니다.

동의함 □

동의안함 □

[출금이체 동의여부 및 해지사실 틍지 안내] 은행 등 금융회사 및 금융결제원은 CMS 제도의 안정적 운영을 위하여 고객의 (은행 등 금융회사 및 이용기관 보유) 연락처 정보를 활용하여 문자메세지, 유선 등으로 고객의 출금이체 동의여부 및 해지사실을 통지할 수 있습니다. 상기 금융거래정보의 제공 및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 제3자 제공에 동의 하며 CMS 출금이체를 신청합니다. 신청일자 :







주) 1. 인감또는 서명은 해당 예금계좌사용인감또는서명을 날인하여야 합니다. 2. 가존 신청내용을 변경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먼저 해지신청을 하고 산규 작성을 하여야 합니다. 3. 주계약자와 여금주가 다른 경우 반드시 예금주의 별도 서명을 받아야 합니다.



신청인 :

서명

후원금 계좌번호 ●

농협 001-01-289781 기업은행 137-069459-01-011

(예금주 : 사단법인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 본회는 기획재정부 기부금 지정단체입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41(독립공원) TEL: 02-365-4387 FAX: 02-365-4363 E-mail: [email protected] http: //www.soongook.org



월간 『순국』 광고게재 안내

대한민국의 얼, 독립정신

아름다운 나라사랑을 실천합시다 순국선열이란 일제에 침탈된 국권회복과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맞서 싸우다가 돌아가신 분들을 이릅니다. 오늘의 자유와 번영은 순국선열의 희 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주요 국가행사 시에 우 리들이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올리는 것도 순 국선열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그 뜻과 얼을 이어 가기 위함입니다.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그 숭고한 정신을 온 국민들에게 고취시키고, 이를 올바로 계승하기 위해 월간 『순 국』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본 책자는 우리 시대의 갈등을 넘어, 소통과 화합, 통일의 가치를 제시하 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일등 정론지입니다. 그래서 품격이 다릅니다. 귀사의 광고 게재를 통 해 순국선열을 기리고, 나라사랑의 아름다운 마 음을 실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 ■

2023년  4월호

발 행 일 발 행 처 발 행 인 주 소 홈페이지 E-mail 발행등록

2023년 4월 1일 발행(통권 제387호) 광복회ㆍ사단법인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이동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현저동) TEL 02-365-4386~7 FAX 02-365-4363 www.soongook.org [email protected] 1989년 6월 17일, 서대문 라-00074

편집고문 편집자문 편집주간 편집위원

김중위 김희곤 장세윤 이정은, 최진홍, 김대중, 김도형, 김세원, 김시덕, 김영조

디자인/인쇄 주소 전화

(주)태신미디어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로 242 02-3662-8200

광고마감 : 매월 20일 광고문의 : 월간 『순국』 편집부 TEL 02-365-4386 Fax 02-365-4363 E-mail [email protected]



정기구독 안내

월간 『순국』의 아름다운 친구가 되어주세요 ㆍ월간 『순국』 구독을 희망하시는 분은 이름, 이메일, 전화번호, 주소를 명기해 전자우편([email protected]) 및 팩스(02-365-4363)로 보내 주세요. ㆍ구독료 입금계좌 중소기업은행 137-069459-01-011 예금주 : 순국선열유족회 ㆍ월간 『순국』은 전국 유명 서적 및 인터넷을 통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값 8,500원 ※ 본지는 정기간발행물 윤리위원회의 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

국유단 누리집

12

식지않는 열정으로 든든한 동반자가 되겠습니다 태신미디어는 30년 전통의 풍부한 경험과 최신 설비를 바탕으로 편집 디자인은 물론 제작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식지않는 열정과 지속적인 파트너 쉽으로 귀사의 가치와 성과를 더욱 높이기 위한 든든한 동반자가 되겠습니다.

작업의뢰

편집 디자인

교정 및 수정

인쇄

납품

l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로 242 l Tel.02.3662.8200 l [email protected] l www.taeshinmedia.com

대 한 민 국 의 얼, 독 립 정 신

SPECIAL THEME 한국독립운동과 국제도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적 전개 순국 특별 초대석

2023년 4월호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관 관장

2023

4

아름다운 사람들 통권 제387호

이달의 순국선열  |  김동삼 선생 · 송병조 선생 향기나는  삶  이야기  |  이호용 한양대학교 정책과학대학 학장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  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난 독립유공자들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 기행  |  만주 · 연해주 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②

값 8,500원 9 771599 906004

ISSN 1599-9068

Vol. 387

03

대구시 두류공원 이상화 동상과 시비

Get in touch

Social

© Copyright 2013 - 2024 MYDOKUMENT.COM - All rights reserved.